September 2019 Flashcards

1
Q

Mark 4:38 (KRV)

A

38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원문을 보면 주무시고 계셨다 두 단어에요. 독자 입장에서는 뭐 그게 그거 아닌가. 이 두 단어는 비교를 하자면 완전히 다릅니다. 주무시더니 는 잠자는 사실을 그냥 말한 거에요. 근데 주무시고 계시더니. 이 말은 과거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주무시고 계셨다. 무언가 일관되게 반복된 상태를 말합니다. 점점 뿌옇게나마 안개가 거두어지고 그림이 드러나요. 배끝에 설국에 나오는 꼬리칸 처럼, 내동댕이 쳐져 있어요.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상태가 주무시고 계시며 왔어요. 뭘 말하고 싶은걸까요? 제자들이 탄 배는 우리 교회로 상징하는 겁니다. 지금 교회에 예수님이 과거서부터 지금까지 주욱 주무시고 계세요. 잠들어 계세요. 누가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오늘날 현대교회가 영적인 상태를 이렇게 만들었다.

배의 풍경을 통해 이 시대를 살아가는 머리를 그리스도로 삼고 오늘날 그리스도의 몸들을 적나라하게 투영시킨 표현이요. 많은 이땅의 교회들에 과연 예수님이 깨어서 주인된 교회가 얼마나 될까? 저도 두려워요. 하나님 제가 만여명 의 성도들을 섬길 때 절대 리더로서 예수님을 앞서지 않게 도와주시옵소서. 리더십이라는 이름으로 성도들을 섬기는 명목으로 예수님의 의도보다 사람의 의도가 앞서는 교회가 되지 않을까. 제일 큰 두려움이요. 그런 교회가 된다면 우리 교회는 예수님이 여전히 주무시고 계셔야 하는 교회가 됩니다.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바들바들 조심스럽게 깨어있어야 할 부분이에요. 자칫하면 교회라는 배의 구조속에 제자들이 타 있는데 어딘가에 항해하는데 저 꼬리칸 근처에 주무시고 계시고 사람들이 난리치는 이런 풍경을 만들어내지 않을까. (!)

너희는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가만히 있는 것 제일 못한대요. 뭔가 움직이고 꿈틀거리고 어딘가를 가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 처럼 우리 스스로 속을 때가 있다는 거죠. 하나님 입장에서도 고물에 베개를 하고 주무실 수 밖에 없는 거죠. 그런 꼴. 이 배는 그런 그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38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깨웠다. 부활의 전문적인 마가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을 부활시켜 일으키실 때에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 마가적 전통적인 표현이에요. 예수님 일으킨 주체가 하나님이요. 그런데 이 배에서는 누가 예수님을 일으키죠? 제자들이 주체가 되어서 일으켜요. 이거는 믿음의 행동이 아니라는 거에요. 믿음의 개요가 어떤 상태냐면. 꼬리칸에 예수님을 데리고는 다니는데 집에서 부리는 종같은 위치에 예수님의 인식구조를 가지고 있다구요. 자기 인생사에 필요할 때만 부르는 이벤트성 예수님이에요. (!)

신앙은 삶입니다. 진짜 사랑은 이벤트가 아니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나요. 수상한 관계죠. 진짜 사랑하는 관계라면 그냥 만나요. 소소하게 자질구레하게 만나요. 같이 있는 게 그냥 좋아서 만나요. 신앙생활이 일상이 아니라 대단한 난리가 났을 때만 주님이 필요한 것. 신앙의 칼라가 이벤트가 된 거죠. 많은 신자가 이런 구조 안에 놓여져 있어요. 제자들 배안의 모습속에서 이것을 발견합니다.

다급해서 자기들이 예수님을 깨워요. 늘 예수님을 깨우시는 주체는 하나님 밖에 있을 수 없어요. 그분만이 일으키세요. 제자들이 다급해서 정신차리라고 깨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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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Mark 4:40 (KRV)
Galatians 2:20 (KRV)
Revelation 3:14–20 (KRV)
Mark 4:41 (KRV)

A

40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마가복음에서 꾸짖었다 가 많이 나옵니다. 이 꾸지람을 통해, 예수님이 오늘 제자공동체인 교회에게 하시는 얘기가 뭘까 좀 분석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어느 것이 더 맞는 얘기고 확실한 얘기인가 들으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가진 것과,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어느 게 더 확실할 것 같아요? 1번. 답을 유보하고 예를 드릴게요. 집에 큰 아들 작은 아들. 큰 아들은 용돈 주면 쓸줄 모르고 엄마한테 맡겨요. 근데 작은 놈은 용돈 똑같이 주면 악착같이 잘 챙겨요. 엄마 아빠 안맡기고 알아서 솔솔잘 써요. 부모 입장에서는 누구를 더 걱정할까요? 큰 아들이요. 너 돈 있니? 안사도 돼? 자꾸 물어요. 오히려 큰 아이에게 더 돈이 들어가요. 신경써주고 챙겨줘야 하니까. 너 왜 자꾸 그러니, 돈주면 쓰지. 하는 얘기가 엄마 아빠가 있는데 제가 꼭 신경쓸 필요 있나요. 어쩌다가 둘째가 엄마 나 뭐 사게 돈 줘. 엄마가, 너 돈준거 있잖아 네돈으로 해. 하고 마는데. 큰녀석은 돈이 없으니까 미리 걱정해야 하고 챙겨줘야 하고 결산 나중에 하면 더 돈이 들어가요. 어른이 나를 다 챙겨주고 책임져주고 엄마 아빠 성품을 잘 알아요.

답은 1번이에요. 물론, 후자도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에요. 근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여전히 예수님은 내 상대적 개념이에요. 내가 내 믿음으로 예수님을 믿으며 사는 거에요. 아마 제자들의 믿음 상태가 이정도 선에서 유지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제 이런 믿음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시냐면. 갈라디아서 2장.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0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전도할 때 새신자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14절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했어요. 아주 부요한 도시. 눈을 고치는 안약 재료가 생산되는 도시. 물질적으로 넉넉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신앙에 대한 절실함이 부족했어요. 신앙은 절실해야 합니다. 사랑은 절실해야 합니다. (!)

14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물이 귀한도시요. 수로가 쭈욱 있습니다. 근데 오다보면 물이 식어요. 미지근한 물에 석회가 있어서 먹으면 구토나요.

17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구원은 노크한다고 문 열고 문 닫고 잠그고 하면 안얻어지는 거 아니에요. 마음 문 안열면 구원 안 얻는다 가 아니라 이미 백성된 라오디게아 교회 미지근한 성도들에게 사랑하는 자를 책망해서 얘기하는 거에요. 더 이상 필요할 때만 이벤트 처럼 분립을 당하고 그 때 그 때 너에게 도움을 주는 보조자로 이제 살기 싫다. 이제는 내가 네 마음 안에 들어가서 네 마음의 보좌에 살고 싶다. 이거 뭐 하자는 거에요. 이제 같이 살림 살자는 얘기에요. 언제까지 내가 네 종노릇 하고 있겠느냐. 꼬리칸에 앉아서 부를 때만 달려가는 종같이 살겠느냐. (!)

41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제자들이에요. 뱃사람 아니에요. 바다와 풍랑에 준엄한 명령. 그가 누구시기에. 도대체 그가 누굽니까? 다급할 때만 부르는 도깨비 방망이 마술램프의 마왕 아니에요. 그분은 주인이에요. 빨리 일어나, 우리 애가 시험이야, 막 깨워 흔들어야 할 분이 아니라구요. 우리 신앙생활은 어때요, 그런 형국이 없습니까? 사랑하는 교회 성도여러분, 우리는 매일 매일, 소원이 하나 있다면 우리 청년들이 예수님의 깊은 사랑에 대해 매일 새로 눈떠가는 희열을 경험했으면 해요. 하나님의 생명과 그 풍성함에 대해 매일 새롭게 눈떠갔으면 좋겠어요.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풍성함에 매일 눈 열어져갈 때 그 분을 정말 사랑하고 싶은 삶의 결실들이 저절로 나오는. 그렇게 헌신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은 누구도 못말려요. (!) 진짜 헌신이요, 진짜 사랑입니다. 저가 누구이기에. 이런 신음이 우리에게도 나오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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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Mark 5:27–29 (KRV)

A

27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28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29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한분만 아셨어요. 예수님만.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마태복음. 마치 이 여인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아요. 지금까지. 가만히 앉아있어서 이러고 있다가는 방법이 없겠다. (!) 모든 체면 염치 불구 다 걷어붙이고 거리로 뛰어나와 청중에 끼여들어서 지나가던 예수님 옷을 만집니다. 근데 아무도 그 사실을 몰라요. 누구나 한 번 예수님 옷 스쳐갔을 거에요. 그러나 이 여인의 손댄 것은 본질적으로 달랐어요.

Mark 5:30 (KRV)
30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이 여인만 손대었을까요? 아뇨. 바싹 바싹 에워싸서 밀고 가던 때이기 때문에.

Mark 5:24 (KRV)
24이에 그와 함께 가실쌔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이 여인은 간절함, 인격적인 기대감을 가진 믿음의 접촉이었어요. 정확히 찾아내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 대었는가. 여기에 수천명의 성도들이 앉아있습니다. 물리적으로 앉을 수 있고, 인격적으로 접촉하는 이 여인과 같은 예배자가 있을 것입니다. 이 열망을 가지고 손대는 예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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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Q

Mark 5:34 (KRV)

A

34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

평생 가장 복된 소식을 듣는 현장이었을 것입니다. 내 병을 전가시킵니다. 정확히 구속의 주로 봅니다. 부정한 사람이 정한 사람에 손대면 부정하게 되요. 십자가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죄인의 오욕을뒤집어 쓰고 말 없이 죽으셨어요. 내가 건강한 자를 위해 온 줄아느냐?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없다. 병든 자에게라야 필요있다. 이 여인을, 딸아 하고 고쳐내십니다. (!)

지금 유대 공동체로는 희망이 없다. 그 때까지 회당이라는, 성전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서 생명을 죽이고, 종교 안에서 그 시대를 숨막히게 하고 있었어요. 어쩌면 우리 상황과도 흡사한 상황일수밖에없습니다. 백성들을 살리고 진흥케 하고 새롭게 하는 게 아니라, 백성들의 숨통을 끊어놓아요. 야이로의 딸의 모습이요. 그런데 예수님은 길을 가다가, 열두 해 동안 혈류증 앓고 있던 이 대속으로 고쳐내면서 새로운 십자가의 공동체와 대안에 대해 설명하시는 거에요. 열 둘이 암시하는 것, 이렇게 열 두 제자들을 통해, 열 두 사도들을 통해, 이제는 회당이 아닌,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새로운 공동체를 통해 복음을, 살려내는 복음을 가르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복음의 공동체를 이 사건 안에 감추어 놓습니다. 우리교회또한 대안적 공동체로 새롭게 거듭나는 축복이 있기 원합니다.

회당장은 자기 죽어가는 딸도 못 고쳐내요. 유사한 열 두 해 혈류병 앓던 여인은 예수님이 새롭고 산 길을 열어놓을 분이라는 것을 고백함으로 생명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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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Mark 5:40–41 (KRV)

Mark 5:43 (KRV)

A

40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41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말씀으로도 세상 창소하시는데 손을 잡으세요? 이것은 상징적 그림이에요. 죽어가던 예수님 공동체가 세상을 향해 손댐을 시작하십니다. 과부의 아들이 동네 사람들과 장례식 치르러 마을 입구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만납니다. 절대 해서는 안된 정통 유대인의 관습,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일어나라. 그 슬픔으로 가득찼던 어머니 가슴에 아들을 돌려줍니다. 주님께 손댐을 맡겨야 합니다. 순전하고 온전한 믿음입니다.

달리다굼 하셨어요. 조용히 아침에, 엄마가 깨우는 소리입니다. 얘, 일어나야지. 한국엄마는 이불 재끼면서 학교 안가? 이 단어가 뜻밖에도 히브리어가 아니고 아람어에요. 정통 히브리 사람들만 알아듣는 암호같은 용어에요. 하나님 자녀들만 아는 영적인 비밀. 다 안데려 오셨어요. 서로가 마음 속에 계시되는, 눈빛만 보면 알아요. 형제, 조금 힘들지? 주님 곧 오셔. 이런 암시가 있단말이에요. 왜 웃어요? 중요한 암시인데. 웃을 문제가 아니라 정말 이에요. 왜 아람어를 쓰셨느냐? 달리다굼. 지금 절망스럽지만, 어둠만 깔린 것 같지만. 아무 방법이 없는 것 같지? 달리다굼. 그 뜻은, 성경에 해석해놓기를,

Mark 5:41 (KRV)
41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통곡하고 떠들고, 그럴 줄 알았어. 다른 의사나 부르지. 왜 불렀어, 미쳤지. 비웃고. 별의 별 악담. 악플 달고 그랬을거에요. 게시판 때문에 십년 늙은 것 같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소리를 다 뒤로 하고, 소녀에게,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일어날 것이다. 생명이 가진자만이 아는 비밀이다. 할렐루야. 이 한주간, 많은 힘든 일들 부딪힐 때마다, 속으로 얘기하세요. 달리다굼.

43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허기진 제자 공동체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허기진 배를 먹여라. 먹여야 어른이 되어요. 우리 청년들을 하나님 말씀을 먹여야 어른이 됩니다. 믿습니까. 이 한주간도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흥겹게 붙들리는 행복한 한 주가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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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Q

Mark 6:3 (KRV)

Matthew 13:53–58 (KRV)

A

3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배척한지라. 걸려 넘어뜨리려 한지라. 한가지 중요한 사실 첫번째 메세지입니다. 가족의 사항과 이름까지를 들먹이며 정확하게 예수에 대해 알고 있었어요 몰랐어요. 알고 있어어요.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예수를 나름대로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속에서 배척과 불신앙이 이루어져요.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요. (!) 우리 안에 교회 안에 이런 그룹이 많다는 것 소스라치게 놀라야 해요. 나는 어머니 뱃속부터 믿었어. 난 할말이 있어. 때가 오래되므로 선생의 자리에 가 있는 자에요. 자칭 어머니도 알고 아버지 일찍 돌아가신 것 알고, 사생자 비슷하게 취급하는. 어렴풋이 알고 형제 누이까지 정확히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정작 알고 있다는 이 그룹속에서 무서운 불신앙이 벌어지고 있어요. 어떻습니까. 저는 깜짝 놀랐어요. 매주 몇편씩 연구해서 청년들에게 전하는데 내가 너희보다 낫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순수한 청년들보다 내가 예수님에 대해 더 모를 수 있다. 역설적으로 무지한 일들이 벌어져요. 이게 신비에요. 알고 있다는 속에서 불신앙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일이 도모되요.

교조적인 비늘이 덧씌워지고 있지는 않은지, 심각하게 자기 자신을 고소해볼 필요가 있어요. 정작 그분을 하나님 아들로, 생명을 교제하고, 그분과 매일 관계가 맺어지고, 그분을 호흡하고 느껴지는 관계적 측면에서의 앎은 전무한 것입니다. (!) 배척해요. 무서운 현실이죠. 집안에도 부부가 투명인간 부부들 많아요. 남자들은 걸핏하면 소리지르죠? 내가 도박을 해, 돈을 안벌어다 줘, 고함 지르죠. 그런데 부부생활이라는 게 못된 짓안하고 돈 벌어다 주는 것만인가요? 아니잖아요. 어느날 부인이, 코에 바람소리를 넣어가며 맛있는 피자먹고 싶어. 그러면 열심히 네이버 찾아서 여기 가서 먹어. 등신. 여자는 그 소리가 아니잖아요. 나가서 같이 팔짱 끼고 피자도 먹고 싶고 이런 거지. 윈도우 부부. 보여주기 위한 부부. 공식적인 자리에서 뭐 괜찮아요, 편견이상은 되요. 통칭해서 꼴깝. 격렬하게 싸우더라도,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알고. 징징거리고 도닥거리고. 그게 부부죠.

이 마을 사람들은 정확한 정보를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아무 생명의 관계가 없었어요. (!) 교회에 뜻밖에 피투성이가 되어서 이런 상태. 성경 다 꿰고 앉았어요. 그러나 전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난적이 없어요. 우리 청년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일 학교 다닐 때부터 성경 좍 외우고, 지명, 족보 좍 외우고, 그러나 인격적으로 만난 적이 없다면. 심각하죠. 신앙인의 불신앙. 첫번째 명제입니다.

53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
54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55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57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58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부분적으로 기적을 일으키시고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결별을 통고합니다. 하나님 만큼이나 넓고 커요. 목회 30년 넘게 하고 목회학 가르치지만, 제가 목회를 조금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그 목회학의 내용이 매년 업그레이드 되요. 그 말은, 목회가, 교회의 생리를 하면 할 수록 알아가는 게 아니라 모르는 게 자꾸 기어나와요. 이런 면도 있구나. 한 해 한 해 자꾸자꾸 보여주셔서 올해 깨달은 커다란 은혜는, 목회는, 양떼 섬기는 것은, 매 순간순간마다 새로운 은혜 없이는 한걸음도 갈 수 없는 게 목회의 현장이구나. 주의 인자하심은 아침마다 새로우니. 하나님이 아침마다 새로운 은혜를 주시는 거에요. 네가 알고 있는 거 내려놓아라. 네가 써먹던 거 내려놓아라. 오늘 오늘 살아갈 새 은혜가 필요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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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Q

Mark 6:7–8 (KRV)

A

7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8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이 파송이 있기 전에 예수님은 고향 땅에서 자신이 모멸당하고 배척당하는 모습을 시청각 자료로 정확히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 얘들아, 너희들 나 따라다니며 무슨 박수와 환호만 있는줄 아느냐? 따뜻한 잠자리 영화가 기다릴 줄 아느냐? 그거 아니다. 나 따라서 고향 한 번 가보자. 가장 가깝다는 혈육 고향사람들 마저도 예수님을 배척하더라구요. 열두팀이 묶어져서 세상으로 보내어지기 전, 예수님은 그들에게 단단히 시청각 자료로 확인시키는 작업이요. 복음 전하는 전도자의 삶에는 이런 핍박, 이런 멸시, 이런 고난이 따를 것인데 준비하고 떠나라. 미리 보여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 가지 제목 붙드십시다. 내가 예수님을 오랜세월 안다고 했는데 오히려 지식이 나의 영적인 내면을 가리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 내속에 그런 측면은 없습니까. 이 제자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를 가장 잘 안다는 고향사람들 마저도 나를 배척하지 않느냐. 너희들이 앞으로 복음 붙들고 가는데 이와 같을 것이다. 각오하고 나를 따르라. 한번 확인시키고 지나갑니다. (!웨슬리안, 이단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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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Q

Mark 6:18–20 (KRV)

Mark 6:30–31 (KRV)

A

18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19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20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

아내가 못마땅하게 여겨요. 저 사람 그대로 둘거에요? 틀린 말은 아니거든요? 잡아넣습니다. 헤롯은 요한의 그 신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요한의 말이 틀리지 않다, 그리고 저 사람이 전하는 내용들이 달게 들리더라. 마음에 번민과 갈등, 찔림이 일어나지만, 귀는 기울여지는 거에요. 맞어, 일리가 있어. 그런데 행동은, 따르질 않아요. 정확히 빌라도 모양입니다. 일곱번 가량 을 적극적으로 무죄를 선고해요. 아무리 심문해도 완전하게 변호해준 사람이에요. 한 방에 날라가기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 로마황제 관할 안에 꿈은 로마 중앙 정부로 진출하는 거에요. 빌라도도 그 중 한명. 무슨 일이 벌어졌냐면,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로마 정부의 세자누스, 정치적 끈이 떨어져요. 숙청되어요. 입지가 없어진 거에요. 당신 그 사람 놓아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 자기가 왕이라고 떠들지 않습니까. 가이사가 왕이죠. 자칭 왕이라는 자를 왜 놓아줍니까. 충신이 아니지요. 그 한마디에 넘겨줍니다. 그러나 무죄하다는 것 알고 있었어요. 지식은 한계 있는 지식이죠.

구약의 또 한 사람. 열번씩이나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합니다. (!) 끝까지 대항했던 인물, 바로. 그 마음이 완고하고 강퍅하여, 완악하여. 빌라도, 바로, 그리고 헤롯. 공통점이 머리로는 아는데 내면의 영적으로 하나님을 옳게 섬길 수 있는 자체적인 능력이 없다는 게 들통나는 거에요. 왠지 귀가 기울어져요. 내면의 영적인 상태가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이 들통납니다. 그래서 그는 세례요한을 처형하고 맙니다.

30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마가의 독특한 기법. 사실 30절은 13절에서 건너뛰어야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턱 삽입된 것이 세례요한의 어처구니 없는 죽음 사건이 개입되어있어요. 그럼 이 사건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있는 이유가 뭘까요. 시대가 얼마나 미치광이처럼 광풍을 맞고 있는가를 봅니다. 그리고 헤롯이라는 정점의 인물을 통해 뭘 깨닫습니까. 인간은 머릿속으로는 진리를 알고 좋아해도 뭐가 없더라. 우리 내면 안에 그것을 연결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더라. 바로도 헤롯도 빌라도도 공통적인 인물이요. 하나님 능력도 경험하고 말씀도 들어알고 있고 죄없다는 분이라는 것 알아요. 헤롯도 마찬가지. 그러나 죽이고 처형하고 완악하게 해요. 자기 이익입니다. 그 끝은 자기 이익이요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사악할 수 있고 주관적으로 악할 수 있는가 (!) 양자 사이에 끼워놓아요. 제자들이 다니며 만나는 이 세력, 이 세상의 죄악, 궁궐안에서 벌어지는 광적인 일 벌어짐. 어느 인간이든지 겪고 토해낼 수 있는 삶의 결과물들입니다. (!ㅠㅜ 그레이스, 이렇게 잡아먹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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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 6:34 (K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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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요한 마저도 목베인 상태. 그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처럼 보였어요. 스플랑크 니조마이. 불쌍히 여겼다.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아주 중요한 얘기인데, 이 단어는 창자가 끊어지는 단장의 아픔을 얘기해요. 애간장이 끓는다. 실종자 부모님들, 이런 심정아니겠어요? 단장의 아픔.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 너무 고통이 혹독하면 들어붙어서 새까맣게 탄대요. 예수님이 그런 통증이 오신 거에요.

가르치시더라. 단순한 말이 아니에요. 돌보시더라. 이제부터 돌보시더라. 돌보심의 첫째 사역이 가르치는 거에요. (!ㅠㅜ 어떻게 가르칠 수 있습니까) 양떼들에게 아무 족구 잘하고 행정 잘하고 해도 가르치는 말씀 사역이 없으면 꽝이에요. 거기에서 돌봄이 시작되어요. 리더들도, 중직자들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정말 교회 멤버십으로서 가르치는 공간을 대상을 가지고 있는가, 그 사람이 목자요, 돌보는 사람이에요. (!) 불쌍히 여기사, 빵사다주고 이러지 않고 생명의 떡을 먼저 주었다구요. 유명한 목사는, 빈민 운동한다고 했어요. 장사하고 교인들 먹이고 입히고 몇십년동안 난리 쳤어요. 그리고 나서 인생 황혼에 깨달은 것이,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결국 말씀 안들어가면 인간적인 정만 남는 구나. (!)

이민 목회. 정말 정으로 목회했어요. 마켓 문닫는 시간 기다렸다가 같이 문도 같이 닫고 손잡고 기도도 하고 온 정을 쏟았어요. 삼년 그러고 나니까, 정밖에 남는 게 없더라구요. (!) 누구한테도 얘기하지 못했지만 내가 지금 뭐한 거지? 돌아오는 귀국길에 결심한 게 이젠 정으로 목회 안한다. 성도들에게 정말 말씀을 먹여야 한다. 남는게 정밖에 없어요.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사 가르치시기 시작하셨어요. (!) 우선순위 뒤집어서는 절대 안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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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 6:37 (KRV)

Mark 6:38–44 (K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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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오늘날 교회에게 하는 얘기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오늘 날 교회가 가장 시대앞에 흔들리지 말아야 할 사역의 우선순위는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거에요. 먹을 게 뭘까요. 하나님 말씀이요. 정상적이고 건강한 양식으로 배불리면 선교 안나가도 선교나가겠다고 하고 봉사 안해도 봉사하겠다고 자발적으로 일어납니다. (!)

나눔과 섬김이라는 포럼. 그런 모임이 있었어요. 꽉 차게 오지는 않았는데 한 형제가 피피티 준비해서 우리 교회에서 그동안 행해지고 있는 사역을 간단하게 소개를 잘 했어요. 일곱가지 정도. 모든 사역의 공통점이 무엇이냐면 교회에서 위에서 해라 이게 아니라 자생 자발적으로 은혜 받아 시작된 사역이요. 은혜 받으면 사역은 자발적으로 되어지게 되어있습니다. (!) 제대로 깨달아지면 저절로 흥겨웁게 나오게 되어있어요. 가장 중요한 게 뭘까요, 먹을 것을 주어야 해요. 하나님 생명 양식으로 내 영혼이 즐겁고 배불러질 때 사역의 열매는 저절로 되게 되어있어요. 우선순위.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오늘날 이 교회가 이 사역의 원칙을 뒤집어 이해했기때문에 속은 허한데 동원되고 함께 이것저것 불려다녀서 많은 사역했어요. 그렇게 해도 은혜 받아요. 그런데 보편적으로 탈진이 오고 사역에 피로감이 옵니다. 이 두개가 같이 가야해요. 끊임없이 새로운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을 때 사역이 새로운 힘으로 버틸 수 있습니다.

37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제일 중요한 사역의 원리. 논리? 합리성일까요? 아니요. 믿음의 역사입니다. (!) 내 눈엔 아무 증거 아니뵈어도. 하나님의 일이라는 건 증거보고 가는 거 아니에요. 믿음으로 발을 내 딛을 때가 있어야 해요. 믿음의 증거, 믿음의 역사에요. 홍해가에 선 백성들이 댈랑 말랑 할 때, 물 갈라진 게 아니라 믿고 담그니까 홍해가 요단이 갈라졌어요.

38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가로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39제자들을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40떼로 혹 백 씩, 혹 오십 씩 앉은지라
41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42다 배불리 먹고
43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44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

빈들에 펼쳐진 성찬의 향연입니다. 요한복음은 이는 이 떡은 하늘에서 내려온 내 몸이라. 41절에,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감사하시고라는 말이에요. 떡을 떼어. 강조했어요. 떼어라는 말을 공부하면 으깨어 부서지다. 자기 몸을 찢다. 빈들에서 펼쳐지는 불쌍히 여김 받는 청중들을 향해서 이 청중들을 향해, 완악함, 능력없는 영혼들을 위해 어떤 죽음을 죽으러 오셨는지 성찬의 위대한 향연을 펼쳐주고 계십니다. 그 생명의 떡을 먹고 나음을 얻고 고침을 받고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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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 8:6 (K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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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그 앞에 놓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 앞에 놓더라

네 개 동사를 발취해야 합니다. 오병이어에서도 같은 것입니다. 가지사. 원문에는 받아서. 떡을 누구에게 받아요, 제자들에게서 받아요. 번역상 조금 이상하니까 가지사 했어요. 축사하시고. 예수님도 떡을 받아서 나누어주세요. (!) 무슨말이 될까요, 하물며. 우리가 가진 것이 내 것이 있겠나. (!주여,) 예수님은 만유의 주인이세요. 자기 것이라고 형식을 취하지 않고 받아서 나누어 주세요. 그것은, 예수님이 아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정확한 정의입니다. 청지기. 내가 받지 않은 것 있나요. 누구를 도와준다 이것 조심히 써야 합니다. 나누다. 이것을 써야 합니다. 돕다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전인류 중 사람은 하나님밖에 없어요. (!) 아담과 하와. 하와는 돕는 배필이라. 종이 아니라 종의 모습으로 상징적인 역할은 사랑해서 스스로 종이 된 것입니다. 신부에게 요구된 상징적 역할이요. 오늘날 교회가 그렇게 세상 앞에 서야 합니다. (!) 하나님께 받은 것은 성도들은 나누어야 해요. 돕는 게 아니에요. 돕는 것은 신적이고 굉장한 단어인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도 만유의 주재자이시지만, 받아서. 자신이 육체의 모습이기 때문에. 축사하시고. 감사하시고 라는 뜻. 성도들의 고매한 인격과 신앙의 덕목을 가늠하는 몇가지 잣대가 필요한데, 야고보서를 통해 설명드리지만, 첫째는 신앙의 품격은, 인간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한 태도입니다. 어떻게 이해하는가. 둘째는, 그 사람에게 감사가 있는가. 고상한 신앙에 재는 몇가지 잣대 가운데 감사가 있는가.

은혜가 넘치는 교회일수록 감사가 넘쳐야 해요, 받은 대로 여러분이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거 교회에다가 헌금 안해도 되요. (!) 그 감사를, 어떤 모양으로던 일상에서 베풀며 살면 됩니다. 받았으니 감사하는 것입니다. (!)

세번째 동사 떼어. 으깨어 부수다. 성만찬을 가르치실 때 떡을 떼어. 예수님의 살을 찢어. 고난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모든 감사의 기초가 근거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찢어. 떼어. 감사는 그리스도 죽음에 기초해요. 그분이 십자가에 대신하여 대속하여 죽으신 것은, 언어로 그 감사를 표현할 길 없습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아니 그럴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전 욕먹을 때마다, 싸지. 마땅히 욕먹고 야단 맞을 때 많습니다. 당연합니다. 왜. 살아 숨쉬는 자체가 플러스 인생이에요. 망해도 마이너스 인생이 될 수 없어요. 왜? 인생의 근거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근거하기 때문에. (!)

마지막 동사 나누어 주게 하시니. 그 그리스도의 죽음에 기초한 감사와 받은 것을 흩어주고 평생 나누어주도록. 그 중요한 결론은 복음 선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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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 8:2 (K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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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예수님의 긍휼히 여기심.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예수님을 보내십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자비로. 신약은 긍휼로 설명하세요. 스플랑코 니조마이. 단장의 아픔이라는 뜻이에요.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 (!) 기적과 소명은 어느 자리에서 확인되냐면, 불쌍히 여기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소명이 눈떠지는 것 알게 되요. 애통하는 자는, 천국을 경험할 것이요. 어떤 문제에 대해 지독히 애통하다보면, 하나님 나라가 거기 보이기 시작해요. 역사속에 허다해요. 한나라는 슬픈 여인 속에 시대의 열쇠를 감추어 놓으세요. 그리스도인들 덕목속에 애통의 덕목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소피아. ! 아란) 요즘 죄를 짓고도 슬퍼하지 않아요. 마음이 완악하고 곤고해서 애통하지 않아요. 그래서 시대가 변하지 않아요. 고통의 현장에 고통받아야 하고 함께 해야 할 때에 그 정서가 일어나야해요. 인간은 그렇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아요. 마음 속에 그 고통과 애통이 생산될 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 인간 내면을 그리 설계하셨어요. 인류를 구원하실 때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경험하셨다구요, 먹을 것이없이 죽어가는 무리들을 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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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 8:1 (KRV)

A

1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항상 배고파요. 내가 참 떡이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 나를 먹고 마시는자는 영원히 목마르고 주리지 아니하리라. 육적인 떡을 통해 영원한 떡이신 그리스도를 설명하십니다. 먹을 것이 없는 것은 인류의 문제입니다. 이사야가, 아모스 선지자가 고발했던 것 처럼, 지금은 물이 없고 떡이 없어 기근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이 없어 기근이라. 빵의 문제도 의식주 문제도 아니요, 생명의 떡, 영적인 허기가 있는 거에요. 가난한 자 부한 자도 영의 문제가 보편적인 문제입니다. 인류는 먹을 것이 없어 고통입니다. 여러분이 공부해서 남을 먹여주는 자로 서기 바랍니다. 평생 소원이 되기 바랍니다. 아이들 키울 때 흔히, 야 공부해서 남주냐? 공부해서 남 줍시다. 그래야 건강한 공부가 됩니다. 높은 자리 오르기 위해 하는 공부라면 하지 마세요. 한꺼번에 몰살시킬 수도 있는 흉기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 남 주기 위해서 공부하시고, 남 먹이기 위해서 공부하시고, 오천명 오만명 먹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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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 8:23 (KRV)

Mark 8:26 (K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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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마을 안입니까 바깥입니까? 바깥입니다. 마지막에도,

26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철저한 구별을 얘기합니다. 이 마을은 이 눈먼자가 앞 못보며 살았던 그 동안의 사회입니다. 그동안의 그의 세계에요. 이 말은, 더이상 여기에서 머물러서는 안된다. 들어가지 마라. 다시 예전 삶의 자리로 돌아가지 말라. (!) 그만큼 지난 어둠의 세계는 너무도 칠흙같은 과거의 삶이었습니다. 마을은 그의 세계인데, 다시는 그곳으로 복귀하지 말라. 구별하여 데리고 나옵니다.

구원받고 처음 경고. 다시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 옛 세계로 들어가지 말라. 영적인 요요 현상이 오죠. 다시는 경험하지 말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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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 8:25 (KRV)

A

25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밝히 보는지라는 엠 블레토. 분명하게 보게 되다에요. 주님이 이 환자를 다루시는 방법이 급진적이지 않고 천천히, 당황하지 않게, 환자를 점진적으로 다루십니다. (!) 사물에 대한 인식이 한걸음씩 깊어갑니다. 예수님의 치유방식에는 재미있는 공통점. 다르지만 공통점입니다. 사람마다 치유와 접근 방식이 획일적이지 않고 다 달라요. 그 사람이 살았던 삶의 배경, 경험, 종류에 따라 치유의 방법을 획일적이 아니라 다 다르게 접근해요. 예수님의 철저한 성육신의 기초한 교육방법이요. 아이들한테는 아이들의 세계의 언어로, 인간의 내면을 가만히 검토해보면, 우리 속에 성장과정의 연령 때가 빼곡히 감추어져 있습니다. 60, 70이 되어도 그 내면에 세살 적 부터 형성된 어린아이들이 나이별마다 다 감추어져있어요. 삭 없어지지 않고 70먹은 나이만 남지 않고 다 감추어져 있어요. 제가 멀쩡히 보여도 초딩같은 짓을 할 적이 있어요. 내가 미쳤나, 왜 이런 짓을 하지. 그걸 잘 아는 사람이 제 아내에요. 30년 사는데 남편에 대해 서프라이즈 해요. 그래서 권태기가 없어요. 늘 놀래키기 때문에. 좋은 말이 아닌데.

수가성 우물 한 여인과의 대화. 딱 보셨어요. 고단한 인생을 살았구나. 네 남편을 데려오라. 다섯이나 있었는데 여섯번째도 자기 남편이 아니죠. 그러니 남편을 율법시대에, 계대 혼인법에 의해 도망가지도 못하고 그 집에서 우리식으로하면 그집 귀신이되어서 아이들을 생산해내야 하는 율법조항에 묶여서 굉장히 고단하고 억압된 삶을 살았어요. 아무 소리 않고 그 속 아픔을 아시고 물을 달라. 물로 대화가 시작해요. 일상에 매일 필요한 필요였습니다. 절실한 생의 문제요. 내게 물을 좀 달라. 당신은 어찌 정통 유대인으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 대화 가운데 여인의 눈이 점차 눈을 열어 보게 되는 것 처럼 메시야를 깨닫게 됩니다. 밝히 보게 되자, 그 일상의 늘 나를 묶고 있던 물동이를 안중에 내던져 버려두고, (!) 내가 오늘 메시야를 만났다, 그 자유를 그 뜨거운 팔레스타인의 마을에 소리칩니다. 내가 오늘 진리를 만났다. 오늘 맹인에게도 그 경험이 이루어집니다. 희미하다가 조금 더 밝히 보이다가 뚜렷하게 보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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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Mark 8:25 (KRV)

A

25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

다시 만져주시는 주님. 우리를 향해 최선을 다하시는 분이 아니라,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에요. (!) 네가 도망다니며 음부로 자리를 펼지라도. 내가 거기 있을 것이라. 다시 만져주시는 게 얼마나 위로인지 몰라요. 볼 것 못 보는, 들을 것 듣지 못하는, 말할 것 말하지 못하는 인생들이 너무 많습니다. 허드슨 강에 불시착. 한국 여인도 하나 타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간증을 테드 동영상을 통해 보는데. 강의 내용들이 집약되어있고 함축되어서, 미래시대를 살아가는데 건강한 인사이트 주는 내용이 많습니다. 그분은 미국 사람이지만 누가 고맙게 한글 자막을 깔아놓아요. 그 사고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내와도 관계가 안좋고 아이들하고도 안좋았대요. 비행기가 엔진을 딱 끄고, 갑자기 우웅 하고 굉음에 가까운 엔진이 멈추는 순간, 공중에 떠있는데 고요한 거에요. 운명에 맡기고 비행기가 안전하게 불시착 착륙하도록. 기장이 방송하면서 세 마디. 굉장한 충격이 있을 것입니다. 혹 우리 모두 잘 못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을 잘 준비하십시요. 기장의 세 마디는 자기 운명과 인생을 바꾸게 됩니다. 십분 오분 사이에 수많은 회안스러운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데, 이런 결심. 내가 좋은 아빠가 되지 못했던 것. 좋은 남편이 되지 못했던 것. 결국 남는 마지막 후회가 두 가지랍니다. 이것이 사실 내 인생의 가장 귀한 가치구나. 뇌리에 뼈아프게 남는 후회인데, 제일 소중한 인생의 가치였다는 거에요. 기적처럼 불시착하는데 한 명도 다치지 않고 다 구조됩니다. 엄청난 사고였죠. 비행기 안에서 나오죠. 거기에 많은 뒷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순간이 올 때, 가장 우리 인생에 중요한 게 뭘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져주시는 주님. 믿습니까. 다시 만져주신다는 말씀에. 저는 마음이 허물어졌어요. 아, 그래서 주님은, 나에게 생명이고, 말씀은 나에게 복음일 수밖에 없구나. 우리 의가, 어떠한 수준인지 알잖아요. 허물져서 다시 무너져도. 넘어져도. 주님은 다시 만져주세요. 완전히 밝히 볼 때까지 만져주시는 구속의 마지막 자리에까지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 한주간 내내, 여러분 일터에서 실수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고 포기하고 싶고 넘어질 수 있지만 그럴 때 뇌리를 땅 때리는 말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만져주시는, 주님께 붙들려 한주간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