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 April 2019 Flashcards

1
Q

Matthew 26:8 (KRV)

A

: 8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등잔 밑이 어둡다 하듯이, 우리가 이럴 수 있습니다. 여인의 행위는 무엇이었습니까. 가장 값비싼 향유를 깨뜨려 부어드렸다. 그 상징 속에 주님의 모습이 있는 것이죠. 소유를 비우시고, 생명을 비우셔서 죄인과도 같은 자들의 죄를 대속하시려는, 대신 지시려는 놀라운 사랑 아닙니까. 그 사랑을 알아보고 응답하였다. 이 여인의 행위는 그 사랑을 깨달은 행위, 그 사랑을 닮은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 주님의 사랑이 전파되는 곳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행위를 함께 전파하라.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다.

백마리 중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목자가, 아흔아홉마리를 들에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것이죠. 한 마리가 아흔아홉마리보다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데리고 있는 아흔 아홉마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더 관심이 간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 문제있는 한 마리가 아흔 아홉마리보다 중요합니까? 계산이 안됩니다. 탕자의 비유도 그렇습니다. 두 아들이 있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 밑에서 고생하고 수고하며 집안을 지켜 왔던 첫째 아들입니다. 누가 더 귀합니까? 이 비유를 보면 아버지의 가슴을 찢고 나가서 재산을 탕진한 둘째 아들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 묻지 않고 따지지 않고 입맞추고 잔치 벌려 퍼부어줍니다. 못난 자식에게 모든 것을 줍니다. 첫째에게는 염소 새끼 하나도 주지 않았습니다. 고생한 자에게. 탕자에게, 집안 살림을 다 말아먹고 돌아온 자에게는, 가락지를 끼우고, 새옷, 새신을 입히고 온 동네 사람 불러모아 잔치를 벌립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계산이 되지 않습니다. 이 사랑이 우리에게 임하고 있는 것이다. 자격없는 자에게, 퍼부는 사랑이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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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Matthew 26:15 (KRV)

A

: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예수를 판다, 팔아넘긴다는 말입니다. 노예 시장. 사람을 파는 일. 노예는 물건으로 취급되는 시대였죠. 얼마면 되냐고. 이런 시대에 주님이 노예처럼 팔리는 순간입니다. 얼마를 주려느냐. 얼마 짜리냐고. 대 제사장이, 달아서 은 삼십을 줍니다. 예수님의 가치가 은 삼십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대단한 돈이 아니죠. 뒤에 보면 마태복음 27:7 에 조그마한 밭 하나를 살 수 있는 돈. 나그네가 죽으면 묘지가 필요한데 요만한 밭. 작은 돈입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그 몇만원 될 까요. 손에 쥘 수 있는 작은 돈. 몇 만원 받고 예수님을 물건처럼 노예처럼 팔았다.

사랑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할 수 있고 굉장히 위험한 것입니다. 사랑을 낭비로 보게 됩니다. 왜 그리 비싼 향유를 쏟아붓느냐. 왜 이걸 칭찬하시지. 다 낭비하는데. 이 공동체는 미래가 없는 것이구나. 다 쏟아부으면 남는게 없는데 이것을 칭찬하시다니. 내 안의 유다의 마음. 내가 헌신하는 것, 헌금하는 것 다 낭비이구나. (!)

마르다 마리아의 이야기. 주님을 섬긴 두 여인의 모습. 주님을 위해 밥상을 차립니다. 살림을 합니다. 돈에 관해 물질에 관해. 우리가 먹고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신문에 온통 경제의 문제입니다. 왜 중요하지않겠습니까. 그러나 주의 발아래 앉아 주님 말씀을 듣는 마리아에게, 네가 더 좋은 것을 택하였다. 수고한 마리아를 다 아시면서 네가 더 좋은 것을 택하였다. 낭비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임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숨쉬고 우리가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 예배 드리는 일, 이 사순절 절기가 그래서중요합니다. 십자가를 붙들다 보면 건강해집니다. 우리 십자가를 놓치고 살거든요. 돈 보고 세상 근심으로 살았는데 이것이야말로 무익한 것이구나. 죽고 다시 살자. (!) 주님의 사정과 하나되어 새롭게빚어진, 거룩한 낭비의 기간. 정말 중요합니다. 소중히 여기는 자가 됩시다.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잘못된 유다와 같은 길로 가게 되는 것이죠. 멈춰야 하는데 멈추지 못하는. 돈궤를 다루는 사람이었다. 돈만 버는 사람이 위험한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을 세상적 지식으로 판단하고 하나님의 일을 낭비로 보고, 알량한 자기 지식으로 비판하는. 유다는 결국 그것으로 자신을 팔게 되고 파멸의 길까지 간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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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Matthew 27:3–4 (KRV)

Matthew 27:5 (KRV)

A

: 3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잘못되었던 거구나. 큰 죄를 저질렀구나. 마음이 정죄되어서. 괴로워서 뉘우쳤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팔려서 빌라도의 손에 넘어갑니다. 일은 끝납니다. 그래서 떨리는 손을 갖고, 자기가 팔아먹고 남은 은 삼십냥을 가지고 대제사장에게 가서 내가 큰 죄를 범하였다. 없었던 일로 하자. 그러자,

네가 당하라. 사단이 이런 것입니다. 안면을 싹 바꾸어서 네가 잘못한 거 아니냐. 니가 그랬으니 니 죄값을 받아라. 마귀인 것입니다. 속으면 안됩니다. 그 돈을, 유다가 이걸 다시가져가지 않습니다. 유다가 은을성소에 던져놓고,

: 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돈때문에 내가파괴되고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했구나. 돈 때문에 우리가 시험들지 않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부정하고 훼손하고 신앙을 저버리지 않기 원합니다. 이것이 예수님 팔아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신앙을 버리고 나면 괴로운 것이고 목매어 죽습니다. 그가 받은 사랑, 사랑의 능력, 사랑의 추억, 받은 게 있는 것.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받은 자는, 그 사랑 안에 거해야 살 수 있는데, 이 사랑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왜 유다는 사랑을 보지 못했는가. 우리는 그 사랑안에 거하는자, 그 사랑위에 서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약속을 굳게 믿고 그 사랑의 큰 능력을 따라서 그 주님가신 길을 따라 묵묵히 함께 가는 우리 신앙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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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John 18:1–2 (NLT)

A

: After saying these things, Jesus crossed the Kidron Valley with his disciples and entered a grove of olive trees. 2Judas, the betrayer, knew this place, because Jesus had often gone there with his disciples.

In American churches, they like to call it prayer closet. They say, did you spend some time in your prayer closet? (!Water closet) You go into your closet, close the door and pray. It can be anywhere. This is where I want to have some time to get away from things and seek God.

This is something that is needed and Jesus went to find. It is very interesting that the name of this place is Gesthmane. Place where fruit of olives are squeezed and pressed while olive oil is being produced. Strange place to rest. To squeeze out to press the precious oil. This is the place where Jesus chose to rest. (!)

What it means to be fruitful. We learnt that the fruit we produce is taken by God who uses that fruit for even better things. This is the place where Jesus chose to take rest. Fruit is crushed through difficult process in order to be truly valuable. Place where oil is taken out of those fruits, there is heavy labor to do that. Jesus is taking rest there. (Jesus, my food is to do the will of God. It is my workplace where I sweat. It is my 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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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Philippians 4:6–7 (NLT)

A

: 6 Don’t worry about anything; instead, pray about everything. Tell God what you need, and thank him for all he has done. 7 Then you will experience God’s peace, which exceeds anything we can understand. His peace will guard your hearts and minds as you live in Christ Jesus.

Not just by doing things you enjoy or by resting physically, in every situation, pray about everything. Talk to God about what you need and thank him for all he has done. It looks intense. Looks like tears, struggle, difficulties, can you surrender everything? Jesus found this place to rest. Jesus needed and continued to go there to find strength by praying. (!Maybe the reason I feel weakened)

Did you find yourself weakened so much, trying so hard that you cry? You can’t help but cry. Can’t take shower but cry. I was upset because are you questioning how much I am suffering and concerned about. Why are you asking me about crying? He was trying to come across that we often try to solve many things. We go through many things and find solutions. Answer is there and solution was there. But the way to find it was to pray. Peace and rest that is required to see things clearly is to go pour everything to God. (!) It’s a lot of works. It’s going to be messy, but it was necessary to find that answer and true peace.

This kind of quiet place, how often do you seek out? How often we go to our Gethesmane? We have to go there. I’m going to go there and pour myself out seeking rest. When you say I want to take rest and peace, I think about going out for dinner. Go spend time with family. Go read books. Go to this class. None of these are bad things to avoid. But when you need rest and you feel difficult, you need help from the Lord. It might become an issue to do something else. (!)

Trying to find God’s answer as father of two kids. Praying for my wife. He had to find time to do this. It was his priority. In the Bible, Jesus relaxed. Jesus took a nap. He went to dinner party stop thinking about all these and he was frustrated about all these. He did not take any rest. He surrendered continuously to God. (pouring out, like my download folder, continually, as I do that, just clean cut, live life that is transparent, not piling things up, both physically and spiritually.)

I just need time to rest. She says can you do something productive? I get upset about this. I couldn’t really get it. What you are doing is ok but not going to help you a long run. You will have to face this issue, you still face tomorrow. Why not reading Bible, why not praying? Thank God for my wif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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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Q

Isaiah 56:7 (KRV)
Psalm 133:3 (KRV)
John 11:25–26 (KRV)

A

: 7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사진들 보면서, 하나님 역사는 어떠냐면요. 실수하지 않으세요. 사람이 실수하죠. 때로는 내려가는 것 같으나. 그것은 멀리 뛰기 위함이고. (!) 고난은 뭘 주냐면, 인내하게 하는 힘을 주고요. 연단을 시켜서 새로운 소망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14년 지나니까 정착의 땅을 주셨다 생각합니다. 작지만 소중한 땅. 잘 우리가 지키고. 잘 지키면,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시겠죠. 이번에 와보니까 벌써 다 차서, 좋은 징조이고. 아시아에서 많은 사람들 오니까 더 인터내셔널 한 센터가 되어서 좋고. 이번에 아프리카, 인디아 다녀왔는데, 영국이 한 일이 상당히 크다. 역사의 대로를 연 것이구나. 주욱 그렇게 왔어요.

교회가 뭐죠?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죠.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교회는 천국의 열쇠이다. 천국에 가자면 열쇠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늘, 교회 가깝게 살기 원합니다. 이 곳은 천국의 열쇠 같은 센터가 되어라.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는 거죠? 우리 신앙의 삶의, 훈련의 목적은요, 천국에 가기 위함이다. (?!) 신앙이 깊어지면 알게 됩니다.

우리 신앙의 길을 분명히 예수님이 말씀하신 곳이, 이것 외에 없어요. 우리 신앙의 가장 큰 문제는 뭐냐면, 세계관에 관한 거에요. (?!) 다른 말로 하면 종말론에 관한 거에요. 종말론 뭐가 있죠? 개인의 종말과 우주적인 종말이 있어요.

죽인 것을. 주욱 왔어요. 항상 우리가 얘기하는 것은 뭐냐면, 잘 보자. 로마서 1장. 이것 하나만 잘 풀어도. 변증이 많이 된 것이다. 왜 예수를 믿어야 하죠? 왜 구원을 받아야 하죠? 왜 이런 말들이 다 필요하냐고. 1장에 나와 있어요. 하나님은 그냥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 이 구약이, 바울에게 가르친 가장 큰 깨달음이에요. 이것 모르면 사랑의 하나님을 알 수 없어요. 로마서 1장의 진노의 하나님을 알 수 없으면. 다 이해가 안되요. 18절, 하나님의 진노. 죄 아래에 있는 인간 영혼에 관한 이해를 분명히 시켜야지, 예수 죽인 것을 진정 알아야 십자가가 보이듯이, 하나님 진노를 알아야. 왜 인간이 구원이 필요한가. (!개인적으로, 정말 너무 필요하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 사랑을 그 때 알게 된다.

복잡하게, 어렵게, 이상하게, 빌빌 꼬아 전하지 말고. 무슨 이론이 그렇게 학문이 논리가 필요한 것 처럼 하지 말고. 벧전 3:15 너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해 물어오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 예비할 게 없어요 사실. 롬 10. 하늘로 올라가겠느냐. 없다고. (!) 땅으로 음부로 내려가겠느냐고. 거기도 없다. 너희의 전할 말씀은 네 옆에, 네 입에 있다. 예전에는 성경을 읽었습니다. 입으로 전했습니다. 초점의 모든 것은 어딨습니까. 왜 예수를 믿어야 하죠? 물음 없이는 해답이 없는 것입니다.

구원론의 초점은 뭐냐면요,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는 것이에요. 그분의 사랑과 은혜 알 수 있어요. 다른 접근법, 다른 해석과 이해란 공허한 것이에요. 여러분 선배들이 잘 가르쳤죠. 우리 교회가 부흥한 것이에요. 잘못 전하면 다 죽이죠. (!) 다 망하죠. 잘못 이해하면 다 죽죠. 다 죽어요. 진리 안에 있는 사람은 절대 죽지 않죠. (!) 진리의 문제에요. 진리의 문제입니다. 왜 꼭 예수가 필요하고 하나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야 합니까. 로마서 1장에 있는 거에요. 진노의 근거는 뭐에요? 18-21 절이다. 다 이미 해답을 주었는데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는 것이죠. 알고도 믿지 않으면 화가 있다. 알고도 전하지 않으면 죄가 되는 것.

그 결론은 뭐에요? 우리 안에 알만한 것을 주시고 (!) 하나님께서 지으심을 다 앎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죄짓고, 우상을 만들고, 죄를 더 만들고, 성적 타락하고 이런 악한 세상을 만들어 놓은 것, 이 종국의 결말은 사형이다. 영벌이다.

사랑, 사랑 하면 가볍고 공허해요. 진노를 이해해야 해요.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 분노를 이해해야 한다. (!)

길. 우리 인생이 헤매이는 것은 이 진리를 알지 못하면 길을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헛된 것을 좇고, 모든 정열을 쏟아놓는 것. 돈에 미치고, 정욕의 노예가 되고, (money, sex and power) 인생은 간단한 것입니다. 세계관에 관한 문제, 종말론에 관한 문제이고, 개인의 종말에 관한 문제인 것. 죽음에 가는 그 세계에 있는 것이라고. (!)

아시아를 순회하면서 이 세계를 지으신 분이 있다고 하면 있다고 하는 게 답답합니까 없다고 하는게 답답합니까. 이 우주를 지으신 분. 뭐가 바보같은 대답입니까. 시 53편, 어리석은 자가 하나님 없다 한다. 그런 대답 할 수 있다는 거에요. 그 어리석은 대답은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이라고. 객관적 관념을 투영해서 만든 것이라고. 유령이 이리저리 배회하였죠. 그 분이 우리 삶을 심판하신다. 심판하지 않는다. 어떤 게 더 좋습니까? 심판해야죠. 그래야 정의가 드러나니까. 억울한 사람 없을 것이니까. 그죠? (그게 더 좋아서 사실 나도 믿었다!) 성경의 메세지는 시작서부터 끝까지 희망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는 것이 희망적입니까 없는 것이 희망적입니까? 있는 것이 희망적입니다. 문제는 뭐냐면, 그 세계를 준비하고 사느냐 살지 않느냐이고 천국으로 지옥으로 가는가가 문제이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개인의 종말이라는 분명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약속은 소망입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길이고. 그런데,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이것을 세상은 어렵게 가르칩니다. 말 못하는 엄마가 가르치니까 자식도 말을 못해. 핵심을 끄집어 내어 가르치지 않으니까. 엉뚱한 것으로 인간 영혼을 오도한다. 뭐라고. (이번 연도 나에게 주신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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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Q

John 13:19 (KRV)
John 13:28–29 (KRV)
John 13:30 (KRV)

A

: 19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이 말속에는 뭘 봅니까. 제자들이 아무도 몰랐다. 아무도 알지 못했다. 누가 배반할지. 옛날에 티비 예능프로그램 중에 이런 것, 엑스맨을 찾아라. 누군가의 지령을 받은 한 사람이 자신을 숨기고 지령을 수행하는 것.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을 찾아내야 합니다. 사단의 지령을 받은 한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을 찾아내야 하는데, 아무도 모르고 오직 주님만 아십니다. 배반의 끔찍한 일을 행할자 아무도 모른다. 오늘 날 교회 안에서도 이런 훼파, 무너뜨릴 자가 들어와 있는데 아무도 모르는 그런 상황과 같습니다.

주님이 아시는데, 끝까지 유다를 바꾸어 내시려는 것이죠. 몸소 보이시고 끝까지 가르치시고,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배반자까지도. (!)

: 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의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살림을 맡았던 유다. 할 일 그거 빨리 하라. 이렇게 들었다. 앉은 자중 아는 자가 없고. 요한의 복음, 요한 안에 있는 부끄러운 고백, 슬픈 고백일지 모릅니다. (!) 이순간 이게 무슨말인지 알았더라면, 그 비극이 일어났을까. 주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그 뜻을 잘 알기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하고, 늘 깨어있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유다처럼 강퍅하지 않고 가난해져서 주님의 말씀을 삼가 들어야 한다.

: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낮과 밤. 그게 아니라 유다는 주님의 그 사랑을 알지 못했고 마지막 최후의 권면까지 받지 않고 주님이 떼어주신 떡을 받고 주님을 팔러 나갔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유다는몰랐다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몰랐다. 주님은 그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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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Q

요한복음 13:30

고린도전서 10:12

A

그가 왜 그 사랑을 저버렸을까? 그는 주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주님이 하는 행위들이 조롱같고 엉터리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의 뒤틀린 야망과 욕심, 그리고 부정직함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던 것이다. 그래서 끝내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거부하여,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나갔다. 그러나 유다에게는 이것에 대해 변명이 있을 수 없다. 그는 그리스도가 제자로 선택하신 사람이었고, 그의 자유의지로 인하여 제자가 되었고, 또한 그의 자유로 배반자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서 있으나 우리 자신의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우리도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다. 우리도 주님 곁에 있어도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사랑을 모르면, 유다와 같이 헐값에 주님을 팔매, 자기를 팔 수 있다. 우리가 설 길은 단 하나지만 우리가 넘어지는 길은 수만가지이다.

: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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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Q

요한복음 13:31-32

A

31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왜 십자가가 영광일까?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에 반드시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지나갈 때 최고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다. 주님은 어두운 골짜기 너머 영광의 봉우리를 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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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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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34

A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께서는 동일한 말씀을 왜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시는가? 그것은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예수가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니 새 계명일 수밖에 없다. 죽음이 목전에 다가와도 자기의 사정에 빠지지 아니하고 제자들을 한결같이, 조건 없이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의 사랑을 닮아서 사랑해야 하니, 이것은 구 계명이지만 동시에 새 시대의 신선한 새 계명이다.

제자들은 최후의 순간에도 서로 누가 크냐고 다툼을 하는 그런 죄적인 인간의 표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셨다. 그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실정도로 너무나 깊게 사랑하셨다.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자들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며 어렵지 않은 일이다. 세상도 이런 사랑을 한다. 그러나 예수가 제자들에게서 보기를 원하는 사랑은 이런 세상적인 사랑이 아니다. 예수는 제자들이 예수의 사랑으로 온전히 변화하여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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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Q

요한복음 13:36

A

36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결국 죽음의 그림자가 그를 사로잡은 최후의 순간에는 다른 제자들과 다름없이 주를 버리고 도망갔으며, 더 나아가 주를 저주하며 부인하였다. 베드로 자신이 자신을 아는 것보다 베드로를 더 잘 아셨던 주님은 베드로가 그날 밤 주를 부인할 것을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그 말씀에 너무나 놀랐으나, 결국은 그 말씀대로 되어버렸다.

예수를 따르는 것이 영웅적인 행위(a heroic act)라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은 베드로의 실수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예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고, 또한 그의 부르심과 나의 응답함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선물이지, 우리의 용기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의 인간적인 능력에 대한 낙관적인 추측이 우리를 인도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알고, 끊임없이 주님의 도움이 필요함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과 우리의 모습의 모든 것은 우리 주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한 것이다.71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믿을 수 없는 용기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겸손히 주님께 의지하여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해야 한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은 바로 하나님 사랑의 품 속(the bosom of the Father’s love)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보여주셨던 그 끝없는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지 않기에 예수를 따라갈 수 없다. 우리가 이 희생의 사랑을 알 때 주님이 가시는 곳, 하나님의 사랑의 품 속으로 우리도 갈 수 있다.

예수의 위대함은 비겁자(coward) 안에서조차 영웅의(heroic) 모습을 보시는 것이다;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시는 것뿐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실지를 보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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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Q

John 14:16

A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계명을 지키는 것은 한 마디로 순종이다. 요한에게 있어서 사랑의 시험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으며, 그 시험은 순종이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아무리 나쁜 환경 가운데 처하고 어떠한 어려움이 닥쳐오더라도 사랑하는 자의 뜻에 순종한다.

우리의 약함을 아시는 주님은 우리 홀로 이 어려운 길을 헤쳐나가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보혜사’를 보내신다고 약속하신다. 돕는 자, 격려자, 위로자 등의 의미이다. 진리의 영, 성령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지상사역을 마감하시고 아버지께로 가셨을 때, 이 성령은 제자들에게 보내져서 제자들과 함께 영원히 거하고, 제자들 안에 있게 된다.

“내가 너희에게 힘든 과제를 주지만, 너희가 무엇을 해야할지 안내해주고, 또 그것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주실 파라클레토스도 보낸다. 성령이 너희에게 진리를 가져다주고, 진리를 위한 싸움을 싸워나갈 수 있게 하실 것이다.” 사랑의 주님은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오늘도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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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4:22-23

A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순종하며 믿는 사랑하는 자에게 예수는 자기를 드러내신다. 하나님과의 교제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는 사랑에 달렸다. 우리가 하나님께 더 많이 순종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 많이 이해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그 어떤 높고 강한 것이나, 왕이나 대통령, 부자나 유명한 자, 학식 있고 위대한 자들에 감격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남자, 여자, 소년, 또는 소녀에게 저항할 수 없이 끌리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그 누구와 거처를 함께하시기를 원하신다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 중에서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거처를 함께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리하심으로 하나님은 그들을 온 우주의 귀족(aristocracy)으로 삼으신다.

우리 안에 너무나 큰 절망감과 공허감으로 우리의 마음이 어두워질 때, 곁에 주님이 계시지 아니한 것 같고 홀로 남겨진 것 같을 때, 오늘의 주님 약속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죽음의 현실 앞에 주님의 약속은 사랑의 약속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사랑의 끈으로 묶어 영원히 함께 하시며, 그 안에 거하시며, 거처를 함께하시기를 원하시는 나의 주님,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주님은 결코 그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성령을 주시고, 세상의 거짓된 평화가 아닌 주님의 참된 평화를 주신다. 그러므로 죽음의 현실이 눈앞에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우리 마음에 주님을 사랑하지 않음을 근심하지, 우리 앞의 죽음의 현실은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들을 때에 마음이 더욱더 겸손해져서 하늘의 이 귀한 생명의 진리를 놓치지 않고 마음속에 영영히 새기는 자들이 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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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19

마태복음 5:11-12

A

: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사실 그리스도를 제일 앞에 두는 자에게 핍박은 항상 찾아온다.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은 이처럼 말한다: “세상은 천사가 천사가 된다고 미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면 미워한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인격에 대해서 유감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평화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세상을 격분시킨다.”

우리가 예수를 따름으로 말미암아 멸시와 증오를 받는다면 우리 주님이 겪으신 멸시와 증오를 우리도 동일하게 겪는 것임을 알고 주님이 주신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할 때 위로와 용기를 얻고 그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다.

우리는 세상의 증오와 하나님의 사랑 사이에 서 있다. 세상은 미워하였으나 주님은 그 미움을 미움으로 갚지 아니하시고 세상에 가장 큰 사랑을 주셨습니다.

예수의 죽음이 당신의 죄를 어떻게 사해주는지를 당신은 이 세상에서 결코 알 수 없다.-아마 하늘에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믿어야 하고 흠모해야 할 신비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당신에게 바라보라고 하시는 것-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을 바라본다면, 왜 예수가 죽으셨는지 첫 눈에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사랑, 사랑 그 자체, 끝없는 사랑, 정복될 수 없고, 변하지 않는 사랑, 영원토록 거하는 사랑이셨기에 죽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인간의 그 어떤 죄나 반역으로 냉담해지거나 좌절할 수 없고, 인간을 여전히 사랑해야만 한다. 그들에게로 나아가 그들을 찾고 구해야만 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고통과, 수치와 죽음 그 자체도 그들을 위하여 고난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이 사랑은 단지 영원토록 거하는 절대적이고 완벽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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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5:24

로마서 1:28

A

: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 우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죄는 오직 예수를 미워하는 것, 결과적으로 예수를 보내신 아버지를 미워하는 것으로 정의되었다. 주님을 미워하는 것이 죄이다. 하나의 큰 계명이 사랑이라면, 하나의 큰 죄는 미움이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이것이 바로 죄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기 위해 오신 아들, 전 생애 동안 가장 낮은 자리에서 종의 형체를 쓰고 자기 부정의 사랑의 길을 걸으신 하나님의 아들, 이 주님에게 십자가로 보답한 것은 죄 중의 죄이다. 더욱이 이 죄는 같은믿음의형제들이하나님을섬기는예로믿어의심치않고행한일이다.

주를 십자가로 몰고 간 자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자부하는 시대의 종교인들이었다는 영적 진리를 잊지 않고, 행여 우리가 이러한 무서운 죄에 빠질까를 두려워하기 원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찾으시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우리의 사랑임을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 돌과 같이 굳어져 버린 완고하고 교만한 마음이 있다면, 주님의 말씀으로 새롭게 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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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7-8

A

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책망한다(reprove, convince, elegchein)’는 말은 증인의 반대 심문(cross-examination), 재판에 있는 사람 또는 토론의 상대를 위해 사용하는 단어로서, 상대가 잘못을 인식하거나 시인할 때까지, 혹은 알지 못했던 주장의 힘을 인정할 때까지 그를 반대 심문한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는 죄를 감지하지 않고는 구원자를 찾지 않으니, 우리에게는 죄의 감지가 필요하다. 의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없으면 죄인은 절망으로 죽게 될 터이니, 우리에게는 의에 관한 믿음이 필요하다. 죄는 결국 불행한 결말을 맺을 것이고 마침내는 정복될 것임을 알지 못한다면, 당황한 병사는 오랜 전투를 희망 없다고 포기할 것이므로 우리는 심판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와 사랑의 상징, 십자가가 서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어주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서 있다. 이 은혜의 신비를 거절하는 것보다 인간의 마음에 내재하는 악을 더욱 선명히 증명하는 것은 없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믿는 주님은 승리자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다. 복음서 전체가 우리 주님이 영원히 사단을 패배시키셨다는 싸움(duel)의 이야기이다. 그 싸움은 광야에서 외로운 유혹으로 시작되어서 주님의 지상 사역 가운데 만연했고 십자가로 극에 이르렀다. 십자가는 이 세상 역사의 위기였다: 이 세상 임금이 하나님의 아들과 마지막 싸움에 자신을 겨루었다. 만일 그가 이겼더라면 악이 지배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패배했기에 하늘에서부터 번개와 같이 떨어졌다. 성령은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시고 이미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다 심판하셨다.

주님의 놀라우신 희생은 우리 가운데 성령의 새 시대를 열어주셨다. 이 하나님의 영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 삶의 구석구석에서 우리를 주님께로 인도하신다.

이 모든 성령의 역사는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에게 내려온 하나님의 축복임을 기억하게 하시고, 오늘도 성령의 보이지 않는 손길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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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13

A

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계시하신다. 성령의 계시는 점진적으로 진행 (progressive process)된다. 주님은 이를 것이 많으셨으나 듣는 자들이 감당하지 못하여 다 말씀하실 수 없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적 수용력에 맞추어서 우리를 훈련시키신다. 진리는 듣는 자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선포된다.

성령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의 진리를 더 깊게 드러내신다. 성령이 드러내는 진리는 ‘예수 안에 있는 진리’에 추가된 진리가 아니라(엡 4:21), 예수 안에 있는 진리가 더 깊게 드러나는 것이다.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와 중요성의 계속적인 열림(opening)이다. 우리가 예수와 가까운 삶을 살수록, 더욱 예수를 잘 알게 된다. 우리가 예수를 닮을수록 예수는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말해주실 수 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를수록 더 많은 진리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진리는 조화롭게 간다.

진리는 인간의 발견이 아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에게 진리를 밝혀주시는 성령은 예수가 그 피 값을 치르고 남겨진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성령은 그때의 예수의 제자들과 동일한 상황에 처해있는 수많은 이 시대의 제자들에게 용기와 위안을 준다. 성령이 교사이고, 예수가 교과서이며, 순종이 지식의 필수적인 조건인 이 하늘의 학교에서 우리가 참을성 있고 열렬한 학생이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 성령의 인도 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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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6:22

고전 13:12

A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종국에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고전 13:12) 주님을 볼 수 있게 되는 휴거(rapture)를 기다리게 한다. 오늘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그를 본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자의 고난은 근심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음의 눈을 열게 하여 부활의 주님을 보게 하고 기쁨이 가득하게 인도한다.

우리가 암흑 가운데 절망하지 않게 하시고, 조금 있으면 기쁨 가운데 주님을 보리라는 이 말씀이 우리의 고백이 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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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Q

요한복음 17:1

A

: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에게 삶은 극점의 삶이었고, 그 극점은 십자가였다. 예수의 삶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신 삶이었다. 그의 삶의 사명은 이 사랑을 전하는 것이었다. 십자가는 이 사명을 성취하는데 걸림돌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 보내진 자기의 사명을 성취하는 길이었다.

예수의 삶은 세상이 이해하는 영광의 방식에 비춰 볼 때는 영광스럽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수의 삶은 온 세상의 만인, 만물이 무릎 꿇고 경배해야 할 지극히 높임을 받으실 영광의 그리스도의 삶이었으며, 이 삶은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었다. (빌 2:9-11)

십자가는 진정한 영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볼 수 있는 자리이다. 진정한 영광은 낮아짐으로 높아지는 것, 섬기므로 섬김받는 것, 자기를 비우므로 채워지는 것이다. 주께서는 아들의 영광은 아버지의 영광과 다르지 않다고 하시고 진정 아버지의 영광이 되는 삶을 사셨습니다.

20
Q

요한복음 17:3

이사야서 11:9

A

: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영생은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영생이라는 단어의 eternal 은 헬라어로는 aionios 이다. 이것은 삶의 기간과는 큰 관련이 없고, 이것의 주요한 의미는 삶의 질이다. 영생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삶의 특징인 영광, 장엄, 기쁨, 평안, 그리고 거룩을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를 아는 지식 그 자체가 영생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지적인 지식을 넘어서 하나님과 개인적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인격을 우리의 삶 가운데 체험함으로 나오는 지식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 진실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변화의 체험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삶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기에 힘써 사망의 그늘에서 영생의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자들이 되기 원합니다.

21
Q

요한복음 17:10

A

: 내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의 것은 내것이온데 내가 저희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주님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으셨고, 그와 동일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제자들을 믿으신 것이다. 우리도 주님처럼 하나님을 믿고 사람을 믿는다면, 우리는 결코 비관적일 수 없다. 왜냐면 이 두 가지의 믿음을 가진다면 우리의 삶의 가능성은 무한하기 때문이다.

22
Q

John 19:8 (NLT)
John 19:9 (NLT)
John 19:10 (NLT)

A

: 8 When Pilate heard this, he was more frightened than ever.

Why? He was afraid from the beginning. When he saw the Jewish mobs, he was afraid of their hatred. But why should he be afraid? More than in Jews and high priests, who do no have any fear? Pilate has even more fear. He is afraid, went back inside the palace.

: 9 He took Jesus back into the headquarters again and asked him, “Where are you from?” But Jesus gave no answer.

Wisdom starts when we fear God. In Romans 3, it is repeated. When we lose the fear of God. Jews and high priests were fallen by losing the fear of God. He claimed to be the son of God. Pilate starts to tremble. Isn’t this a tragedy? This Gentile after hearing this has the fear of God. But inside the Jesus’ chosen generation there is a rage and no fear. Where are you from? Who should have asked this question? This is the question that high priests should ask Jesus. (!) John is recording it very clearly.

History that is written by God through Jesus Christ. They should have asked him. But Pilate asked. Jesus was silent.

: 10 “Why don’t you talk to me?” Pilate demanded. “Don’t you realize that I have the power to release you or crucify you?”

Who has the power? Pilate says he has the power. Where is the power? Here, Jesus could have avoided the trial before it even starts. This is an absolute chance. I can either free you or crucify. Speak, but the Lord he did not turn. So what is the path of the cross? Philippians 2:8

Can we become obedient? Can we obey to God’s will and go to the path without changing?

23
Q

John 19:12 (NLT)

A

: 12 Then Pilate tried to release him, but the Jewish leaders shouted, “If you release this man, you are no ‘friend of Caesar.’ Anyone who declares himself a king is a rebel against Caesar.”

Jews were cunning. They knew which button to press. This political trick. World is evil like this. Look at the Lord standing there as the only one who is real and righteous. Everything around him is dark and fallen and false. And that is why we cannot rely on other things. (!) They will all fail you one by one. World is on the trial. It appears that the trial is against Jesus. How Lord did not choose to deviate but to take away the sin from people.

24
Q

John 19:16 (NLT)

A

: 16 Then Pilate turned Jesus over to them to be crucified. So they took Jesus away.

Where is the power now? He is like a puppet. (!) We can be. It is something sad. We say we have strong faith and know what is right. But in this crucial moment, do we have power to carry out what is right? Is there a power in us to do what is right? Unless we do the Gethesmane prayer like the Lord, we do not. (!) Often we fail like Pilate. He has no power. He is used in this process. (!) Although he thinks he controls, he does not. He denies what is just and caved into what is malicious.

25
Q

Mark 14:3 (KRV)

A

: 3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나병 환자 시몬의 집. 고침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본인 집에 초대했던 것 같아요. 뭘하고 계셨냐면 식사를 하고 계셨어요. 그림이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시편 23편, 길고 험한 여정 끝에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장면. 시상식 하는 상이 아니고, 식탁을 얘기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식탁에 초대된다는 것은, 한 공동체로 묶어졌다는 개념이 되기도 하죠. (!) 한 상에 밥을 먹는 존재를 식구. 식탁에 초대되었다는 것은 적어도 한 가족으로 부름받았고 초대되었다는 거에요. (@자주 초대해야겠다. 나의 식구)

26
Q

Mark 14:6 (KRV)

A

: 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이 여자가 행한 일이 옳다. 하셨나요? 뭐라고 되어있죠? 내게 좋은 일을 했다. 이 말은 칼론 에르곤 이라고 되어있어요. 예레미야 라는 언어학자가 아주 멋있게, 이 의미에 가장 가깝게 번역했어요. 적절한 아름다움 이라는 뜻입니다. 적절함은 적당함과 달라요. 이 뜻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했던 그 원래의 자리. 적절한 아름다움. 딱 맞는 아름다움. 이렇게 된거죠.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적절한 자리는, 망가졌던 인간성과 영혼이 회복되어 하나님 앞에 경배드리는 그 자리가 가장 적절한 아름다움입니다. 믿습니까? 이것은, 이익이 되느냐 손해가 되느냐 맞냐 틀리냐의 프레임에 갇힌 유대인에게는 열어질 수 없는 시선이에요. 예수님은 여인의 회복된 모습, 회복된 헌신을 보시고 아름답다. (!)

27
Q

Mark 14:8-9 (KRV)

A

: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좀 이상하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마리아 얘기합니까? 저도 안하는데요. 복음 전할 때 이 얘기해요? 옥합 깨뜨린 여인 이야기. 이 이야기는, 이 여인의 행위 속에 담겨진 의미와 가치를 얘기합니다.

: 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나의 장례. 십자가 사건을 준비했다. 이 여인의 행위는 어디를 향했습니까? 십자가를 향했어요. 복음의 가장 핵심 가치는 뭡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것이 전파될 것을 얘기합니다. 오늘, 우리 모든 아름다운 헌신과 적절한 자리매김이 십자가에로까지 확대되지 않으면 그것은 율법적 레벨에 이르러 다툼만 옳고 그름만 따질 수 밖에 없어요. (!) 간절한 기도를 통해, 적절한 아름다움이 회복되도록 하시고, 길고 먼 순례의 길이 십자가를 향하는 복음 결말의 길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다. (!)

28
Q

Matthew 26:40–41 (KRV)

Matthew 26:43 (KRV)

A

: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툭하면 잘 듣는 말이죠. 마음은 마음인데, 육신은 뭘까요? 하루종일 많은 일 겪고 피곤하다는 말일까요?

: 43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일러라

피곤하대요. 육체의 어떤 격심한 노동과 과중된 생물학적인 상태를 얘기하는 걸까요? 히브리적 개념은 그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에는 슬픔을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실패의 첫째 원인은 기도의 실패가 사역의 실패를 가져왔어요. 기도의 자리. (!) 그리고 끊임없는 나락으로의 추락입니다. 도망가고 흩어지고 스승의 등에 비수를 꽂고. 한 제자는 마지막까지 찾아가서 스승을 부인해요.

오랜 시간 청년들 데리고 새벽기도를 해보면, 고시생들 데리고 하잖아요, 그럼 고시생들이 시험 앞두고 보통 몇시간 잡니까? 평균 2-3시간 자요. 그리고도 새벽기도 나오던데요? 여러분 그것 보고 놀란 것이, 사람들은 잠의 시간이 중요하지않더라구요. (!) 절실하고 절박하면 한시간 도 자고 일어나서 나와요. 맞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생물학적인 피곤이나 육체적 약함을 이야기하지 않아요.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이야기해요.

어느샌가 왜 저렇게 불안한 말씀을 하시지? 우리가 꿈꾸던 이상과 왕국의 꿈은 이게 아니잖아. 유다도 들락날락하며 이상한 짓하고. 예수님은 자꾸 죽으러 간다고 하고. 뭔가 좀 이상하단말이에요. 우리가 꿈꾸던 나라가 회복하고자 하던 왕국의 모습은 이런 게 아닌데.

제가 놀랬던 게, 교회들마다 이렇게 보면, 교회가 만들어놓은 하나님이 따로있더라구요. (!) 복음도 자기가 만든 복음이 있어서 오복음서라해요, 내가복음. 신앙 생활의 내면에, 내가 그리고 교회가 만들어놓은 하나님이 따로 있더라구요. 말하자면, 제자들의 의식 한복판에서 그게 자꾸 무너져가고 있는거에요. 갑자기 예수님 붙잡히니까 도망가자 했을까요? 그러지 않죠. 결국 이거였구나. 무기력하게 체포되어 불법 재판에 끌려나가는 선생을 보고 다 도망갔어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배반이 아니에요. 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을 향해 육신이 약하다, 눈이 피곤하구나, 슬픔을 인하여 왜 썼을까요? 이미 그들의 의식 한복판에서 이게 우리가 꿈꾸던 나라가 아니잖아. 이러려고 이 선생님 좇아다닌 건 아닌데. 어쨌든 겟세마네 까지는 기도하러 왔어요. 그러나 영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역사에 집중이 안되는 거죠.

유다가 등장하죠. 열두 제자 중 세상 기준으로 볼 때 나름 쓸 만한 제자였습니다. 배움도 그랬고 배경도 그랬고. 그러나 늘 우리의 기대는 깨지죠. 세상적으로 볼 때 깨집니다. 제일 먼저 배반의 칼을 뽑은 자가 유다입니다.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떨어뜨리고 누가복음에는 만지셔서 회복시켜주십니다. 그 이후의 일들이 궁금하지 않으세요? 말고는 대제사장의 종으로 쫓아왔다가 기적을 체험한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님 쪽으로 옮겨서 따랐나? 많은 문헌과 기록들을 보면, 말고는 그냥 자기길을 갔어요. 대제사장의 종으로서 그 길을 그냥 갔습니다. 뭘 얘기하냐면, 사람이 기적을 겪는다고 달라지지는 않아요. 영적인 문제이기 떄문에. 은사주의가 허무한 것이 나중에 그런 결과를 쥐어들기 때문입니다. (!)

29
Q

Matthew 26:56 (KRV)

Daniel 7:13–14 (KRV)

A

: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선지자들의 말씀을 이루려 하십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평생을 죽음의 순간까지 성경을 이루려 하십니다. 예수님 삶의 방식이셨어요. 내가 원함도 아니요, 내 열망도 아니라 성경을 이루려 하심이라. (!)

: 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이것이 주님이 꿈꾸시던 나라입니다. 이것이 인자가 오셔서 이루실 영적인 나라에요. 그런데, 제자들은 첫째 이 나라의 의미에 대해 말귀를 못알아듣고 기도의 자리에서 실패하니 자기 신념 종교가 무너진 거에요. (!) 일순간 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어요. 심지어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도 다 떠나고 고향으로 돌아가 보려요. 언제, 그 사도들이 제자들이 뒤집어지나요. 엠마오로 가던 언덕에서 예수님에 의해, 가슴이 뜨거워질 정도로 선지자의 글이 풀어질 때. 이게 그 얘기였구나. 그제서야 하나님 말씀의 실체가, 예수님의 말씀이 뭔지 들어오면서 전부를 거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

결국 고난 주간을 통해 자리매김해야 할 기도제목은 두가지에요. 이 고난 주간, 주님 걸으신 한 주간 묵상을 통해, 얼마나 아팠을까. 물론 아프셨죠. 중요한 것은, 나와 교회 공동체가 본질이 아닌 것을 계속 거두어내고, 개혁의 정말 정의는 뭐만 남는다구요, 예수만 남는 거요. 거품이 빠지고. 성경적 가치관이 우리의 통치원리가 되고, 내 삶의 중요한 근거가 되는 본질이 되는, 집중할 수 있는 마지막 한 주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룩없는 떡으로 예수님 만나게 하여주소서. 우리가 만든 복음 안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총신대, 학교사태 맞아서 어려운데, 신기한 현상이 나타나더라. 본질만 남더라. 거품이 빠지고, 비본질 적인 것이 다 사라져버리더라. 고난 주간은, 주님의 고난 받으신 한 주간의 행적을 더듬어 기억하고 붙드는 것도 의미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여기 제자들의 실패를 통해 진짜 가짜가 구분되는 거에요. 매년, 고난 u주간 맞이할 때마다, 마지막 붙들어야 하는 진리는, 비본질적인 것들을 자꾸 걷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에 집중하였나. 우리가 좇았던 이상과 추구했던 가치가 성경과 멀지는 않았나. (!)

30
Q

Psalm 22:1–8 (KRV)
Psalm 22:11–13 (KRV)
Psalm 22:18–20 (KRV)
Psalm 22:27 (KRV)

A

: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5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시인의 예언. 고난의 종의 노래. 메시야의 노래 라는 제목이 붙습니다.

: 11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13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바산의 황소는 로마 군인을 말합니다.

: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19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 27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얼마나 구체적으로 예언되었는지. 십자가의 주님의 죽음에 관하여. 이 장면을 십자가의 비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일관된 방식입니다. 자기를 찢어 나누어 주시고, 자기 몸을 직접 제단에 드리셔서 우리를 살리시고 (!) 돌아오게 하시고 예배자로 삼으십니다. 이 비젼이 재현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23장으로 이어집니다. 누구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까? 고난의 십자가를 통과한 자만이. 1절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나에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31
Q

Luke 23:48 (KRV)

A

: 48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가고

지금 긴 순례의 끝에 서있어요. 일찍이 제자들과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는 길의 막바지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기억하시나요? 땅에 옷을 깔고 나뭇가지를 흔들어대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에게 호산나,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 열렬하게 나뭇가지를 흔들며 환호했던 사람들도 무리입니다. 그들은, 이 분이야말로 우리가 꿈꾸던 나라, 우리의 눈물, 우리의 허기, 경제적 정치적인 면에서 해결해줄 메시아다. 정확한 오해이죠. 주님의 꿈꾸던 나라는 아니에요. 그 무리들이,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하나님과 종교, 이상과 신념이 무너지자, 저를 못박으소서, 바라바를 놓으소서. 별도의 사람들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에요. 무리는 늘 변합니다. (!) 목회 해봐도 그래요. 변하더라구요. 그러나 이들은, 또다른 일면을 나타내주고 있죠.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들도 가슴을 다 치며 돌아가고.

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가. 우리가 미쳤었나보다. 우리가 무슨 짓을 했지. 가슴 치며 말없이 현장을 떠납니다. 또 한 무리를 봅니다.

32
Q

Luke 23:50–51 (KRV)

John 19:38 (KRV)

A

: 50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 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러니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의 죽임에 참여하지 않고 반대 표를 낸 사람.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 신앙적으로 그 나라의 철학과 예수의 고백을 수용한 자입니다. 이분에 대해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정치적 종교적 상황 중, 허름한 나사렛 예수의 제자라 하면 잃어버릴 것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숨겼다. 죽으신 후에는 커밍아웃을 해버립니다. 또 한 사람이 붙어있네요.

십자가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사연으로 둘러싸여있었습니다. 정작 주님의 죽음 앞에 자기 고백을 드러냈던 자, 가슴을 치며 돌아갔던 자, 저 멀리서 쫓아온 여인내도, 그러나 새벽에는 다 흩어지는 제자들의 모습도 만났습니다. 이 즈음에서 우리의 신앙의 주소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가 꿈꾸던 십자가, 주의 나라는 내가 만든 종교는 아닐까. 돌아보면서, 다시 한 번 십자가의 바른 가치와 정신과 의미 앞에 세워주시고, 특별히 어느때보다도 국가적, 개인적, 교회적으로 기도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습니다. 기도 없이 이루어질 일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기 원합니다.

33
Q

Matthew 25:31–40 (KRV)

A

: 31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이스라엘의 풍습을 염두한 한 유비. 양과 염소의 비유. 섞어서 나갑니다. 돌아다니며 풀을 뜯어먹게 해요. 해가 질무렵, 이들을 우리로 구분을 해 놓습니다. 왼쪽에는 염소, 오른쪽에는 양. 이유는 여러분들이 낮에는 뒤섞여서 먹이를 잘 뜯어먹지만, 기온이 떨어지는 밤에는 생리적 반응이 달라요. 절대 뒤섞여서 잠을 못잡니다. 기온과 밤. 생리적 반응이 다르기 때문에. 고대 이스라엘의 목자들의 풍습을 이용해서 구원을 이렇게 설명해요.

내 아버지께, 오른편에 이야기합니다, 복받을 자들이여 창세로부터 예비한 나라를 상속받으라. 헤토이마지, 이미 완료된, 작정된, 견고히 완성된. 완료형 동사에요. 내가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헐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돌보았다. 오른 편의 이 사람들이 뜬금없다는 표정으로 물론 그런 글은 없지만, 그런 반응을 합니다.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구원받은 자들이, 주여, 언제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마시게 했습니까. 임금이 대답하되, 예수님을 상징하죠, 너희가 지극한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피상적으로 이 글을 잘못 이해하면, 왜 우리가 배운 교리와 다르네. 이웃을 돌보라는 것인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사람들 반응 속에 놀라야 합니다. 자기들이 그런 섬김과 이웃 돌봄을 한 인식을 알고 있어요 모르고 있어요. 모르고 한 거에요. 인식을 모르고 했어요. (!) 이 사람들은, 이거 하면 구원받지 했습니까, 당연히 했습니까. 이게 중요한 거에요. 당연히 한 게.

34
Q

James 2:17 (KRV)

A

: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저도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사람의 성도로서 고민은, 말씀 설교 공부하고 연구하고, 이런 저런, 해석의 고민을 하죠. 그런데, 이번 고난 주간은, 좀 들을 말씀을 실천하고 행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으면 좋겠어요. 산상수훈 후에 좁은 문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이 산위에서 설교한 이야기는 참 지키기 어렵다. 그러나 거기에생명의 길이 있으니 거기로 들어가기에 힘쓰라는 거에요. 얼마나 많이 말씀 듣고 성경 공부 듣습니까? 필요하죠. 안하는 것보다 낫지만 (!) 축적하고 굳어져서 바리새인되고 율법주의자 되는 거에요. (!)

주님이 오르셨던 십자가를 향한 예루살렘 길을 향해 이 한 주간, 어렵지만, 찾는 이가 없지만, 오르기를 힘써야 해요. 내 삶에 가장 부담스러워하고 가장 힘겨워하는 그것들부터 풀어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순종합니다. 제가 내려놓습니다. 좁은 길로 들어가는 거에요. 그러나 이미, 여러분들은 이 길에 들어선 자들이기 때문에, 모든 삶에서 그것이 무의식 가운데 나오기까지 삶을 순종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얘기입니다. (!)

35
Q

Romans 12:15 (KRV)

소를 웃긴 꽃

A

: 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여기에 묵상하기에는 기독교가 복음적 온기를 잃고 있었다 라는 반성과 성찰 때문입니다. 주변에 잘 들리지 않는 너무나 큰 소리가 많습니다. (!) 이거 아십니까? 진짜 큰 소리는 잘 안들려요. 예를 들면 지구 돌아가는 소리가 얼마나 커요? 안들리죠. 겨우 내내 땅에 죽어있던 생물이 숨구멍을 티우고 생명을 피어내는 소리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소리인줄 압니까? 누군가 물었다죠, 봄 오는 소리가 들립니까. 큰 소리는 잘 안들립니다. 이 땅에 수많은 비명들이 있는데 잘 못듣죠. (!)

소를 웃긴 꽃 - 윤희상

나주 들판에 정말 소가 웃더라니까 
꽃이 소를 웃긴 것이지 
풀을 뜯는 소 밑에서 꽃이 핀거야 
소는 간지러웠던 것이지 
피는 꽃이 소를 살짝 들어올린 거야 
그래서 소가 꽃 위에 잔깐 뜬 셈이지 
하마트면 소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 한 것이지 

이 시가 뭘 얘기할까요? 후평을 보니까 소는 아무래도 꽃을 사랑한 모양이다. 피는 꽃이 소를 들어올렸다니 꽃 또한 소를 사랑했나보다. 들어올려져도 니탓 내탓 없는 것 같다. 잠깐 뜬 소도 핀 꽃도 참 부럽다. 사랑의 수난 고리. 그 소 발 밑에 잡풀같은 풀과 꽃들이 소를 들어올렸다는 것. 그것은, 피차 이런 미물들도 서로 어울려져 함께 하면서 그 소 발밑에 꽃을 피워내고, 따뜻한 작가 에게는 소를 들어올린 것 처럼 느껴진 거에요. 대단한 것이 아니라 소 발밑의 꽃처럼 조그마한 몸짓으로도 위대한 사랑의 수난 고리를 만들 수 있다는 거에요. (!) 그 생명력을 잃은 것이 우리 교회가 참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 꽃이 되어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증거해내는 사랑의 수난 고리를 만들어내는 위대한 삶 되기를 축복합니다.

36
Q

Mark 3:13 (KRV)

A

어릴 적 기억에, 형인지 동생인지 친형제와 어두컴컴한 창문 달린 지하에서 놀다가 문 고장으로 갇힌 거에요. 어린애가, 얼마나 무서워요. 울고 불고 난리 났는데, 한 두살 차이인 자기도 어찌 할 수 없는 거죠. 그 때, 무서운 비명을 지르는 형제를 위해 같이 울며 비명을 지르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에요. (!) 그거라도 같이 하면서 울고 비명지르며 갇혔어요 도와줘요, 이웃이 듣고 깜짝 놀라 구해준 기억. 삶에서 굉장히 강렬했다는 거죠. 평생 그렇게 약자들을 위해 (!) 짓눌린 자들을 위해 자기가 하는 조그마한 몸짓은 같이 울어주고 비명을 질러주는 조그만 행위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겸손한 고백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위대하고 대단한 걸 요구하는 게 아니죠. (!) 사랑하기에는 너무 서툴러요. 어떻게 하는지도,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 한주간 만이라도, 어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주제로. 문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했어요. 우리가 문을 넓게 좁게 할 수 없어요. 좁은 문을 향한 길에 관한 싸움이라 했습니다. 좁고 협착해서 찾는 이가 적다 했어요. 사랑도 그런 것 같아요.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지 않으면, 생내적으로 사랑이 터져나오는 썩 괜찮은 존재들이 아닙니다.

: 13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누구는 어디에 필요하고 누구는 여기에 필요하고 자격과 조건과 구비되어서 부른 게 아니에요. (!) 자격이 조건이 그냥 예수님이 원했던 사람들이에요.

하루에 하나씩이라도 실천하는 의미에서, 우리 주변에 위로가 필요한 사람. 홍수처럼 눈물을 쓸어내리며 슬픔에 잠겨있는 사람에게. 돈을 가져다 주는 게 아니라, 따뜻한 위로의 한 마디. 방문이나 문자를 통해서 힘들겠지만, 어색하겠지만.

종이에다가 먹으로 한자를 쓰는데, 한지에 쓰면 한자는 한번에 써야지 덧쓰고 하면 거꾸로 햇볕에 비치면 다 나타나요. 그 쪽 세계 사람들은 부정행위라고 합니다. 일필휘지의 세계입니다. 그림의 세계는 반대이죠. 붓칠 위에 붓칠 해요. 우리의 사랑은 그렇습니다. 안되면 또 하고 또 해서 완성합니다.

37
Q

Philippians 1:27 (KRV)

A

: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한 마음. 한 뜻. 협력하는 것. 뉘앙스를 제대로 살려낼 수 없는데, 풀어 설명하자면, 전부 병역 문화의 군사용어입니다. 로마는 천년의 제국을 국하했죠.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분량이 참 많은데, 로마에서 배울 점이 여러가지있어요. 그 중 가장 뛰어난 것이 수용성입니다. 예를 들어서 로마와 어떤 나라가 전쟁했어요. 그랬는데 적이지만 적이 쓰던 병법이 탁월해요, 이기긴 했지만. 그다음 전쟁때까지 반드시 적의 병법을 받아들여요. 그것을 자기것으로 소화합니다. 철저히 자기것이 되도록 훈련하는 거에요. (!) 그런 표현들을 왜 썼을까.

한 마음으로 서서. 기마전 할 때 쓰던 개념이에요. 우리 운동회나 군의 경험이 있을 겁니다. 기마전 한 번씩은 해봤어요. 한 팀에 몇명입니까? 다섯명입니다. 떡대가 좋은 친구가 중앙에 섭니다. 양쪽에 완력이 좋은 친구들이 깍지를 끼고 어깨에 걸죠. 뒤에는 앞으로의 전진과 밀리지 않도록 푸쉬맨. 위에는 경량급이 타야합니다. 저같은 사이즈가 딱 좋아요. 아무나가 아니라 전투력이 좋아야 합니다. 가벼우면 태운 사람들이 기동력에서 훨씬 우월해지겠죠. 다섯명입니다. 싸우겠죠. 다섯명이 한 팀을 만들었습니다. 조직이라고 하죠. 한마음으로 서서. 한뜻으로. 별로 차이 없을 것 같은데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적과 대치하면서 싸우는데, 양쪽 깍지 낀 둘이가 자기 사정 때문에 마음이 안맞아서 삐그덕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유기적 조직이 아니라 그냥 조직이에요. 한 마음으로 한 뜻이 되려면 유기적 조직이에요. 무너지지 않고 이겨야 되겠다라는 철저한 전쟁에 대한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고 서로를 잘 견뎌줄 수 있는 합일된 마음이 있어야 견고해져요. 유기적 관계라고 합니다.

협력하는 건 뭐에요? 단순히 도와주고 이런 게 아니에요. 이 개념 또한 로마의 전쟁 속에 생성된 개념인데, 로마는 주로 넓은 평야에서 전쟁하면 삼렬 진법을 씁니다. 제일 앞열은 예비군 정도 배치, 둘째 는 중간, 마지막은 최 정예, 최강부대를 쫙 세웁니다. 앞 열이 맨 먼저 싸워요. 어느정도 허물어집니다. 분기점이 판단될 때 이 열을 교체합니다. 다음 열이 일사분란하게 나가야 되고 앞열을 쫙 빠집니다. 제일 틈새가 생기고 혼란이 일어나고 위기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진 개편 할 때 문제 발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삼렬 진법은 다른 나라의 진법을 수용해서 자기화시켰습니다. 이 삼렬 진법으로 어마어마한 대승을 거둔 것이 많이 기록되어있어요. 이것을 자기화 하기까지, 로마 군인들이 얼마나 독하게 연습했냐면, 마치 기계처럼 전환이 되록 연습했어요. 절대 열과 열 교체할 때 진영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거의 기계적으로 연습해요. 물론 승리를 위해서지만, 동료를 위해섭니다. 내가 준비되지 않고 훈련되지 않으면 당장 폐해가 공동체와 동료에게 피해가 가요. 아주 독한 훈련을 하는데, 한보씩 나가지 않고, 병법의 기록을 보면 반보씩 나가도록 되어있어요. 착, 착, 착, 기계적으로 가능하도록 혹독히 연습했습니다. 동료와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서. 협력입니다. 한마음, 한뜻, 협력.

거류민과 나그네들의 굉장한 과제입니다. 교회에서 개인 신앙 훈련도 시키지만 공동의 과제가 있을 때 있어요. 그 때 같이 움직여줘야 해요. 나를 위해서, 동료를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입니다. 무슨 감내놔라 배내놔라 간섭이 많은가. 이것은 우리의 교회론이 아니죠. (!)

38
Q

Philippians 1:28-30 (KRV)

A

: 28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넓은 길 쉬운길 편한 길 아닙니다. 그래서 그 길이 좁고 협착한 길이라면. 두려운 일들이 있겠죠. 가끔이 아니라 매일 그 두려움이 업박질러요. 초조하게 하고, 낙심하게 하고 그래요. 그런데 이 두려움이라는 것이 뭔가요? 말 타보셨나요? 말은 이렇게 보는 것보다 올라타 앉으면 생각보다 높아요. 한 두 번 타봤는데, 제주도, 몽골, 굉장히 몽골말이 빨라요. 작은데. 말들이 달리다가 보면 반드시 조그마한 천이나 장애물이 나와요. 그 앞에서 끽 쓰면서 앞발을 듭니다. 그 때 기수는 어떻게 될까요 움찔하는 거죠. 겁이 나는 거죠. 겁나지 않겠어요? 전 속력으로 달리다가 갑자기 앞발을 드는 현장. 장애물에 의해서. 강제적으로 멈추어지는 움찔한 그 때, 두려워할 필요가 있다 없다.

: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그러니 두려움이 올 수 밖에 없겠죠

: 30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이런 일들로 우리에게는 가끔가다가 우리 길이 제어당하고 멈추어져서 끽 하고 얹어진 우리가 움찔 할 때 있어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니. 이미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원수의 머리를 깨부셨어요. 결정적 승리는 이미 십자가에서 끝난 것입니다. 이미 이루어지고 죽어가면서 마지막 최후의 비명과 광란과 발악을 할 때 그 모습을 보고 이겨놓은 승리를 움찔하고 두려워한단 말이에요. (!)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등에 업혀있다는 것, 잊으면 안되요. (!) 해변가의 유명한 발자국 이야기 아시죠? 항상 같이 있었는데 어느날 보니 발자국 하나밖에 없어요. 왜 이 때는 나랑 동행하지 않았습니까. 그 때는 네가 너무 힘들어해서 내가 너를 등에 업고 걸었단다.

여러분, 매일매일, 주님과 동행하는 정도가 아니라, 힘에 겨워 쓰러질 때 업고 간다는 것 기억하시고 이 땅에서 거류민과 나그네로서 좁은 길을 끝까지 완주하여 승리의 면류관을 손에 드는 복이 있기를 축워합니다.

39
Q

1 Peter 1:3 (KRV)
1 Peter 1:13 (KRV)
1 Peter 1:19 (KRV)

A

: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이 산 소망 때문에 우리가 모든 것 견디고 참고 걸어갈 수 있는 것이죠. 산에 올라가는데 다리에 힘이 없어서 먼저 올라갔다와. 한 사람이 갔다와서 “죽여,” 바로 일어나서 올라갔다는 이야기.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히브리서 11장의 허다한 증인들이 있기 때문에 그 증거삼아, 산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좁은 길을 향해 걸어갈 수 있는 것이죠. (!내가 거듭날 수 있었다, 얼마나 큰 힘인가. 생명인가. 소망인가.)

: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

첫번째로 은혜를 온전히 바라라. 바라다 가 일관성을 가지라는 뜻이에요. 햇빛날 떄 좋아하고 비가 올 때 슬픈 게 아니라 비가오나 눈이 오나 일관성을 가지다는 뜻이에요. 무슨 소망 때문에, 산 소망 때문에. 어떻게 확신을 갖게 합니까? 19절에,

: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피의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산 소망을 가지고 걸어갈 떄 일관성을 가지고 비바람도 칠텐데 장애물도 있을 텐데 움찔하지 말고 흔들리지 말라, 왜? 그 앞에는 분명 산 소망이 있는데, 그 소망은 취소되거나 변개되거나, 인간의 여부로 움직일 수 있는 소망이 아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마음의 허리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출애굽기 14장에 있죠. 이스라엘 백성이 어린양의 흘린 보혈의 피로, 유월절이라는 은혜를 입고, 첫 식사를 어떻게 하냐고 제언받냐면, 첫째 허리에 띠를 띠고, 둘째 손에 지팡이를 잡고, 세번째 발에 신을 신고, 서서 급히 먹으라. 딱 무슨 그림이에요? 어딘 가를 향하는 출발의 모습이에요. 길을 걸어가야 하는 나그네의 모습. 원래 유대인의 식사는,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천천히 식사합니다. 그러나 유월절 식사만은 허리에 띠를 띠고, 진리의 띠,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해요. 흔들릴 때마다, 이 길을 가는데, 계속 뭘 확인하며 가죠? 언약의 맵, 지도를 계속 읽고 다시 마음을 추스리고, 다시한 번 용기를 가지고 가는 거에요. (!) 진리로 허리를 묶으라.

40
Q

1 Peter 1:15-16 (KRV)

A

: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거룩이라는 개념. 한 걸음 더 들어가는 시각에서 보면, 이 베드로 사도가 한 얘기가 아니에요.

: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어디 얘기죠? 이 이야기는 사실상 구약의 성경을 인용한 베드로 사도의 기록입니다. 거룩이라는 개념 자체만 보면 구별하다. 그래서 드려지다. 구별하여 드려진 상태를 거룩이라고 해요. 좀 이상하잖아요? 하나님이 내가 거룩하다고 하세요. 자존하시고 전지 전능하시고 스스로 존재하시는데 따로 구별할 이유도 드릴 이유도 없는 매우 자유로운 분이, 틀림없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거룩의 개념이 넓은데. 상대개념으로 좁혀놓았어요. 그러니, 너희도 거룩하라. 우리에게 자신을 전부 주었다는 말이에요. 거룩은 상태와 관계 개념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거룩하다는 얘기에요. 자신을 전부 주셨다는 말이에요. (!) 가장 실증할 수 있는 증거가 있죠. 어딥니까? 십자가. 아들을 내어주신 이가 어찌 이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거룩을 더 설명할 길이 있을까요?

이 거룩은, 나는 너희밖에 모른다.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으면 독생자, 외아들의 개념이 아니에요, 특별하고 독특한 아들이라는 뜻인데, 그 분을 십자가 대속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내어놓으셨다는 게 이해가 되어요? 믿어는 지는데 잘 이해가 안되요. 주님 앞에가서나 풀릴 것 같아요. 나같은 걸 뭘 그렇게 사랑하시나, 눈뜰 때마다 고개를 못들겠어요. 부담되요. 어쩔 줄 모르잖아요 우리도 대접을 너무 많이 받으면. 뭐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매일. 나같은 이 잡동사니같은 인생들에게 뭐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그러니 너희도, 거룩하라. (!후, 부담돼, 이런 부담되는 사랑, 촉구되는 사랑)

율법적인 명령이 아니라 강력한 사랑의 촉구에요. (!)

41
Q

1 Peter 1:17 (KRV)

A

: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첫째는 그리스도이신 산소망을 일관성있게 바라라. 둘째는 모든 행실이 거룩하라. 세번째는 두려움으로 지내라. 뭔가 유령을 보고 공포 이 개념이 아니에요. 이렇게 설명드린 적 있어요. 왕이, 부탁을 했어요. 저기 가면 내가 가져다 놓은 중요한 그릇이 하나 있는데, 근데 그 그릇을 나에게 가져와야 하는데, 한 방울도 흘리지 말고 손상시키면 안된다. 엄밀하고 엄중한 부탁을 하셨어요. 그래서 이 그릇을 가지고 명령받은 자가 부들부들 떨며 혹 흘릴 새라, 혹 변질될 새라, 조심조심 옵니다. 엄청나게 고생을 하고 땀이 비오듯 옷젖는 줄 모르고 왔어요. 착하고 순종한 종아, 이마에 땀을 닦아 주시더니, 얘, 너 오다가 개나리 핀 것 봤니? 벚꽃은? 계절이 바뀐 것도 몰랐지? 여러분, 이걸 들고 오느라고 그거 볼 겨를이 어딨어요?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 8장에, 믿음을 지켰으니,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이, 믿습니다 믿음이 아니고, 정확히 원문에는 유일한 의탁물이라는 뜻이에요. 그것을 의역해서 믿음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이 바울에게 맡긴 유일한 의탁물이 뭘까요? 복음이에요. 이게 변질 될새라, 쏟아질새라 조심조심 오느라고, 바람부는 것도 몰랐고, 옷이 옆에 철망에 찢겨나가는 것도 모르고, 도착해보니 사람 꼴은 만신창이가 되었어요. 근데 이건 지켜냈어요. 오느라고 아무것도 못봤고 정신 쏟을 겨를이 없었어요.

예수 믿고 살아 걷는 길이, 세상적으로 재미없을 수 있죠. 그러나,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과 영광이 저 언덕 너머에 있다는 거죠. 그 허다한 증인들이 성경에 열거되어있지 않습니까? (!증인들 보고 싶다.) 오늘 우리에게 큰 붙들림과 격려와 힘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42
Q

Matthew 28:4 (KRV)
Matthew 28:5 (KRV)
Matthew 28:8 (KRV)

A

: 4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지키는 자와 찾는 자.

: 5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 두 구도를 가지고 본문을 읽어보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잊지 못하는 무덤을 지키는 자들에 비해,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자들이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두려움을 원동력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둘 다 공통점은 두려워합니다. 상징적으로 예수 잘 믿는다고 두렵지 않아요. 무디게 태어난 거지 믿음과 상관 없습니다. 거짓말장이에요. 목사가 되어 보니까요, 여전히 두렵고 더 두려워요. 영적인 전쟁을 더 잘 알기 때문에. 그러나 주님의 기쁜 소식을 들은 자들은 어떱니까?

: 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쌔

옛날 어른들 부르던 찬양.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제 눈으로 보니까 이 노래 부르면서도 근심해요. 위선인가? 3절의 가사.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 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노래가 참 근심이 되시죠? 전날까지, 바로직전까지 염려했습니다. 찾는 자들 여인처럼 두려움을 덮으시는 능력자 예수 그리스도. 순간순간 뒤덮는 기쁨. 이것 주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둘째,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Matthew 28:7 (KRV): 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사명이 주어집니다. 여전히 절망하는 자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거에요. N virus. 를 퍼뜨려야 하는 사람. 6절이었다면 빨리 7절로 가서, 하나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43
Q

Genesis 35:1 (KRV)

Genesis 28:15 (KRV)

A

: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통곡하세요. 그 분은 지금 영적인 벧엘을 경험하고 있는 거에요. 하나님 만나주신 장소. 벧엘이에요. 35장으로 와서 또 야곱에게 절망적인 순간이 찾아왔을 때 벧엘로 올라가라. 그 고독했던 절망적인 밤에, 젊은 시절에 벧엘에서 함께 했던 것 처럼, 이 위기의 순간, 네가 벧엘로 돌아가라. 여러분의 벧엘은 어디십니까?

지난주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야곱에게 벧엘로 가라. 제가 돌아갈 벧엘, 기억해야 할 갈릴리는 어디일까. 하나님은 정말 친절한 분이세요. 손봉호 장로님 말씀해주셨는데 마음이 뜨거워 너무나 우연히 강의 하나가 들려졌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는 벧엘인가보다. 강의 제목이, 한국 교회를 살리기 위한 세 가지. 제가 다 옮겨 적었습니다. 오늘날 분당 우리교회가 돌아가야 할, 한국 교회가 다시 살기 위해 해야 할 세 가지.

정치 집단 다음 두 번째로 못믿을 집단이 교회 집단이래요. 이건 세계적으로 흔하지 않은 것입니다. 개신교를 신뢰합니다 답한 사람이 17.6%. 교회 다니는 사람도 교회를 못믿는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와 계시는 분. 조시는 분들 보면 다 평화롭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그 얼굴이 천사같아요. 제가 그 통계를 보면서 마음이 아픈게, 가톨릭은 신뢰한다. 43% 불교 45%.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라 하는데, 일반 상식을 뛰어넘는, 초 상식, 초 과학을 전하는 게 복음 아닙니까. 1 더하기 1 은 2 하면 사기꾼이 말해도 믿어져요. 전과 몇범이 와서 1 더하기 1은 2 하면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1 더하기 1 은 3 해요.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다. 그 전하는 사람이 신뢰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거에요. (!)

중고등학교에 신앙의 회의가 왔을 때 정말 믿을 수 있는 그 선생님, 진짜인가보다. 극복이 되더라구요. 목사가 되고 바라본 분은 옥한흠 목사님 아닙니까. 사기치는 분은 아닌 것 같은데, 진짜인가보다. 따라했더니 되더라구요. 제가 우리 젊은이들에게 눈물로 소원하는 것, 이찬수 목사를 보니까 사기치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만약 남의 여자를 건든다든지, 교회 돈을 떼먹는다던지, 그러면 정말 큰 일 내는 거에요. (!) 가슴아파요. 도전되지 않습니까. 여러분을 보고, 우리 엄마가 진짜 하나님 만났다 하면 속일 분 아니다. 우리 도전이 되어야 하는데, 불행히 한국교회는 여기에서 실패했다는 거에요.

두번째는 한국교회가 돈, 명예, 권력의 우상을 제거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목회하실 때 얼마나 가난하셨는지. 제가 호의호식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오빠가 목회할 때는, 맨날 와서 배고프다, 노래래요. 기숙사 가면 밥이 부실하고. 울면서 고모가. 니는 너무 부하게 산다고. 뭐라고 하시냐면 우리 오빠가 아버지가, 촌수가 그래야 맞지 않습니까, 내가 기숙사에서 숭늉 건데기를 많이 건지는 법을 알았다. 그릇을 넣고 휘저으면 숭늉 건데기가 요동칠 때 반대 방향으로 잡으면 다 잡힌다. 울면서. 너는 어찌 부하냐, 부럽다.

훨씬 순수했습니까. 누가 가짜되려고 목사한다고 해요. 그런데 왜, 이사방에 이상한 목사가 많습니까? 사기성은 좀 있고. 편하게 하면 잘 살 수 있겠다. 그래서 신학교 가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가 회개해야 합니다. 그 강의를 들으며 참 아팠습니다.

44
Q

Genesis 28:20–22 (KRV)

A

세번째 우상은 우리 교회가 우상이래요. 분당 우리 교회 이름이 너무 좋지만 위험할 수 있겠구나. 깜짝 놀랐어요. 성도들이 모여서, 찬양하는 우리 인데. 교회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 하나님 섬겨야 하는데, 교회를 더 소중히 여기는 우를 범하게 되었다는 거에요. 많은 생각을 합니다. (!) 한국 교회 어쩌든, 우리 교회 많이 오든, 헌금 많이 하면 되지, 이게 너무나 위험한 생각이라는 거에요. 손봉호 교수님의 강의 새기기 원합니다. 이게 내가 돌아가야 할 벧엘, 갈릴리이구나.

: 20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21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이 서원이 떠오르지 않았을까요? (!) 화장실 갈 때와 나갈 때가 다르듯이. 서원한 이것을 다시 상기하며 갈릴리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복된 주일 부활절 되기 원합니다.

45
Q

Psalm 30:4 (KRV)

A

: 4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찌어다

첫째, 그 하나님을 찬송하며. 둘째, 그 거룩함을 기억하며. 셋째, 그 거룩한 이름을 감사하라. 주의 성도들, 복수입니다. 자기가 누린 은혜, 예배 공동체와 이웃 공동체에 증언합니다. 주의 성도들아, 그분을 찬송하고 그분의 이름에 감사하라. 자기가 은혜입고 개인적으로 회복된 것을 노래한 것인데. 매우 중요한 본질이 담아져 있어요. 감사는, 우물에 고인 물처럼, (!) 개인적인 삶에서만 고여있어서는 안된다는 거에요. 예배 공동체로 이웃 공동체로 확대되어 증언되어야 한다는 거에요.

이번 추수감사 헌금은, 거처지가 없는, 노숙인들을 위해 전액 사용하기로 결정했어요. 무슨 전략도, 목적도 없어요. 왜냐하면, 어떻게 될지 몰라요. 이거 뭐 한 번 해준다고 완전히 해결되는 것 아니에요. 눈앞에 당장 우리 주변에, 찬바람 불어오는데 거처할 곳 없는 사람들이 눈에 걸리고 뛰어요. 뭔 전략과 비젼이 필요해요. 배고픈 사람에게 당장 국밥 한 그릇 먹이는 것이지. 손붙들고 기도합시다.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사실 좀 짜증나요. 배고프지, 가서 밥 한 그릇 먹자. 허기진 사람 손붙들고 기도합시다?

나눔으로써, 함께 함으로써, 결국엔 예배 공동체로 함께 하는 거에요. 인간을 만든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기 때문에. (!!) 한 구퉁이에서 오늘 예배를 드렸어요. 그런 거죠. 감사의 본질은, 내 개인적인 경험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웃 공동체에 증언되어야 하고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룩함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자리로 나오도록, 예배 공동체로 확대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삼일 교회의 시대적 소명이요 사명이라 믿습니다 . (!)

46
Q

Psalm 30:9 (KRV)

A

: 9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 음부로 진토로 돌아가는 경험을 하고서야, 자기 존재가 하나님 앞에 흙덩어리, 진토 같은 존재일 수 밖에 없는 것을 깨달았어요. 하나님께서 떠나시면. 그런데 그 진토를 건져 올리셨어요. 어떤 모습으로 대하시는가.

47
Q

Psalm 30:11-12 (KRV)

A

: 11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오해하시면 안되요. 고침받고 삶이 회복되고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고, 베옷을 벗기고 재 대신 화관을 씌우고 이런 고백이 아니에요. 결론이 이거에요.

: 12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이 무슨 얘기입니까. 이제는 그의 감사의 본질이 달라졌어요. 과거에는, 누리고 만지고 깔고 앉는 것 만 있으면 그게 감사였어요. 그런데, 오늘 11절의 희열은 그 기쁨의 표현이 아니고, 흔들면 없어질, 진동하면 없어질, 물질적 만족과 기쁨이 아니라 그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다는 하나님 자체로 그 분이 복이라는 사실 앞에 눈을 열게 된 것입니다. 깊은 절망의 나락 끝에 진짜 얻었던 복은, 하나님 얼굴을 보는 복이었어요. 이복이면 전부구나.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시면 그것이 전부이구나.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내가 여호와로 즐거워할 수 있었겠구나. 이고백으로 이 시인이 돌아온 것입니다. (!) 진짜 감사가 뭐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