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3 - February 2019 Flashcards

Genesis Daily memorization Weekly review

1
Q

Genesis 1:1 (KRV)

A

: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최인철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프레임이라는 강의. 우주에서 본 지구 그림. 왜 그렇게 아웅다웅 싸웠나. 검은 사람 흰 사람. 잘 사는 사람 잘 못 사는 사람. 나라의 국경도 없고. 종교적 경험을 한 것과 같다. 큰 그림을 한 번 보고 나면 그 전의 삶의 방식으로 살 수 없더라. 경천동지. 흔들림. 견고하게 믿고 있었던 것이 무너지는 것. 그런 경험이 필요합니다. 창세기는 그런 위험한 책입니다.

독자의 시각. 어떤 프레임을 가지고 있느냐. 본문만 집중하면 문자에 빠져요. 저자의 의도가 중요합니다. (!페이퍼에 16 가지 심리가 안들어가면 다 까먹을 것 같다…) 하나님. 모세. 정확히 표현하면 저자는 하나님이고 기록자는 모세입니다. 타자 받아서 찍었다는 게 아니에요,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할 때, 물론 저자는 성령님이시지만, 기록자는 기계적인 기록이 아니고, 그 사람의 성품, 학식의 유무, 인성, 이성의 이해력, 이런 모든 것을 다 종합해서 유기적 영감을 한 것입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저자는 하나님이시되 기록자는 모세에요.

지금 이 책을 썼던 시기는, 시내산 아래 이스라엘 공동체가 광야생활 중에 머물러 있던 기간이에요. 애굽에서 나왔죠? 애굽은 대 제국과 화려한 절정의 문명을 자랑하는 나라입니다. 거기에서 지배되었던 삶의 가치는 철저한 물질만능과 우상숭배에요. 히브리 노예는 비록 고달프지만 지독한 고생과 함께 그 문명을 세포하나하나에 다 쪄들도록 경험했던 사람들이에요. 애굽의 가치에 물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이 세운 모세를 따라 그냥 얼떨결에 따라나온 사람도 있겠지만, 약속의 실현으로 그들을 구출해 냅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의 산밑에 응집해있어요. 어떤 상황입니까.

처음 터져나온 소리가 떡과 물과 빵을 내라. 죽어서 묻힐 매장지도 없다. 불신앙으로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잠재울 수 있습니까? 모세의 지도력이요? 200만 명의 불신앙을? 이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에 불러 성령으로 책을 받아 적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모세 오경입니다. 토라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기초요, 뿌리가 됩니다. 이 때 이 책이 쓰여졌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

태초에, 하나님이. 엘로힘. 하나님의 눈높이에서 보기 시작할 때 인생의 목적과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요셉.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해 못했어요. 그러나 기근이 오고 양식을 구하러 온 형제들을 보자, 입에서 뛰쳐나온 말이. 하나님이. 하셨구나. 하나님이 주어가 되었어요. 역사의 주어. 하나님이. 내 입에서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어가 되어 터져나올 때까지 길고 긴 멀고 먼 시간이 걸려요. 이 문제만 해결이 되면 대기권을 벗어나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의 고백처럼, 더이상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되는 거에요.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어로, 주인으로 되어주시기 시작합니다. 삶과 인생에 대한 새로운 경이로움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한 절만 가만히 마음에 담고 묵상을 하면, 이건 고고학적인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고 하나님의 구원사를 실질적으로 선포하지 설명하지 않아요. 창조론이냐 아니냐 이것도 아닙니다. 막 13장에, 그 날들이 환란날들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 창조론자에요. 이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을 동의하고 증명해요. 여기에 누구도, 그렇게 얘기할 겁니다. 만든 사람이 있겠지. 영이 죽어서 그래요. 나무 끝에 달린 풀 잎사귀에 변해가는 색깔의 일정한 질서를 보면서도 우주보다 더 넓은 하나님의 경의가 담겨있어요. 어떻게 우연이 있어요. 말이 안되죠. 창조론은 그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게 아니에요. 과연 어디에 의도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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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Colossians 1:16 (KRV)

Isaiah 46:10 (KRV)

A

: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10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이 베레쉬트라는 말 속에는 사실, 누구의 그림이 감추어져 있냐면 그리스도. 레쉬트. 첫열매, 첫 시작. 골로새서 1:16 외우세요. 태초라는 말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 구원의 비밀이에요. 이사야 선지자의 말, 태초에 종말을 보이셨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시초부터 종말을 알렸다. 종말은 구원보다 앞서요. 나는 알파와 오메가니. 구원은 시간안에 펼쳐내는 거에요. 그러나 이미 창세기 1장 1절에 종말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로부터 시작하여 누구로 끝이 나느냐. 그리스도로 시작하여 그리스도로 끝날 것이다. 아직 이루지 않은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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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Q

John 2:4 (KRV)

A

: 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In Christ’s reply to his mother there was no disrespect. He used the same word when speaking to her with affection from the cross; yet it is a standing testimony against the idolatry of after-ages (!), in giving undue honours to his m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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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Q

John 2:9 (KRV)

A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the beginning of Christ’s miracles was turning water into wine; which may remind us of the difference between the law of Moses and the gospel of Christ. He showed that he improves creature-comforts to all true believers, and make them comforts inde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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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Q

John 2:10 (KRV)

A

: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And Christ’s works are all for use. Has he turned thy water into wine, given thee knowledge and grace? it is to profit withal; therefore draw out now, and use it. It was the best wine. Christ’s works commend themselves even to those who know not their Author. What was produced by miracles, always was the best in its k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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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Q

Philippians 2:17 (NLT)

A

: 17 But I will rejoice even if I lose my life, pouring it out like a liquid offering to God, just like your faithful service is an offering to God. And I want all of you to share that joy.

Paul is in the prison and is writing to believers who are somewhere else. Strong relationship is there between Paul and the people of the church. They have the same sense of love and caring not only for Jesus Christ but also for the people in the work of spreading the Gospel. (!pains and suffering to create a bowl where people can come… it is like construction and architecture, the stuffiness and seemingly no purpose and rough type of works.)

(Paul’s ministry is quite cool, when I think of it being performed in UPG countries… probably not in US but somewhere… BUT global cities like New York IS different, we can evangelize the whole world from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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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Q

Philippians 2:18 (NLT)

A

: 18 Yes, you should rejoice, and I will share your joy.

He is giving himself out and he rejoices with them. But it is not one-sided but together. Not only I am thankful for your faith, but also I wish that you could look at me and my life situation that you can be glad with me.

It would not be a stretch to think that Apostle Paul would want to rejoice with any believers in Jesus who is carrying out the work of the Gospel and testifying the love and grace of God. If you in your heart are alive in the Gospel of Jesus Christ and in the sharing of the Gospel, Paul will be rejoicing with you. Can we rejoice with what Paul is going through in the prison cell feeling grateful? Can we rejoice with other Christians who are spreading the Gospel in all of our churches and other churches around the world? Can we rejoice with them? (!how, why, rejoicing? You are in pain. You are being tested. Why? Why grateful? You fool. You sick. You crazy. WHY???????? IS it in PAIN that we meet Christ? IS it in darkness where I see the stars? IS it in MISERY where I find God’s mercy in my life?) Holy Spirit will extend its power into all of churches to come together before God and worship toge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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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Q

Philippians 1:7 (NLT)

A

: 7 So it is right that I should feel as I do about all of you, for you have a special place in my heart. You share with me the special favor of God, both in my imprisonment and in defending and confirming the truth of the Good News.

To know and to love is the same word in Hebrew. We should take interest and know what they are up to and what they are working on. (!) We should set Lord as our priority but once that is in place, we should start taking interest in others with love and ca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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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Q

Genesis 1:2 (KRV)

Deuteronomy 32:11 (KRV)

A

:2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엘로힘이 복수로 되어있어요. 성령님입니다. 가끔 혼란이, 창조는 성부 하나님만 하신 줄 알아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같이하신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영을 강조하십니다. 로하무, 프나마. 수면 위에 운행하셨대요. 운행하다. 문자적으로 무엇인가. 영적으로는 무슨 뜻인가. 운행은 정확히 히브리어로 새가 알을 품다 이런 말입니다.

부화되고 나오면, 둥지를 만들어서 키워요. 먹이를 계속 날라줍니다. 어느정도 어미 새가 계획한 기간이 지나면, 갑자기 어느날 보금자리를 흩어놓아요. 그러면 죽는다 비명 지르고 천길 아래로 떨어져요. 생존 본능에 의해 푸드덕 푸드덕 하겠죠. 그러나 쏜살같이 내려가서 큰 날개 위에 받아요. 그럼 또 떨어뜨려요. 경천 동지의 경험. 반복해보면 어느날 창공을 자유로이 날 수 있는 멋진 새가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런 본문을 주셨어요.

: 11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어떻게 광야를 걷게 하셨는가? 땅으로 곤두박질 칠 때 그것을 업습니다. (!) 이 과정을 보통 양육이라고 합니다. 사람도 열 두달을 품어요. 제일 더디게 자라는 건 인간인 듯 해요. 알에서 품는 과정부터 여기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의 핵심가치는 뭘까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수면에 운행하시느니라 이것은 사랑의 속성을 드러냅니다.

뜻밖에도 예수 믿는 분들중에 자존감이 낮은 분들이 많아요. 자존감이 높아야 합니다. 왜? 내 근거가 일반인들과 다를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천지를 창조하셨어요.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이야기가 그 얘기에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시기까지 그 값을 속량의 제물로 지불하셨어요. 저는 이해는 하는데 심정적으로 안 와닿아요. 병아리가 배고프다고 내 아들을 삶아서 먹인다. (!) 하나님이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확증하셨다면 우리가 얼마나 사랑받는 대상으로 그 재창조의 복음이 이 창조의 기사속에 빼곡하게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창조는 전부 복음, 전부 그리스도의 이야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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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Q

Genesis 1:3–4 (KRV)

Revelation 21:23 (KRV)

A

: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여기서도 그리스도를 빛으로 묘사해요. 내 개인에게도 매우 중요한 선언이 되어야 해요. (!) 수면 위에 운행하시느니라. 운행의 핵심가치는 사랑이에요. 사랑하셔서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자녀로 재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구원하실 건가 절절히 감추어 놓고 있는 거에요. 모두 그리스도를 향하여 성경은 쓰여집니다. 성경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사랑의 실체가 빛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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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Q

Genesis 2:1 (KRV)

A

: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어마어마 합니다. 모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들어있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단순히 피조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차바라는 말을 써요. 일반 피조물을 칭하는 게 아니라 군대라는 뜻입니다. 한국 남자는 군대와는 뗄레야 뗄 수 없죠. 공익이든 어쨌든 다 근무를 해야 합니다. 군대가 갖는 명징한 개념이 하나 있는데, 뭘까요? 통치와 명령, 복종입니다. 그런 의미 때문에 차바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인간은 피조물의 정점이죠. 언제 행복하도록, 유익되도록 창조하셨는가. 하나님의 통치와 명령체계 아래 복종할 때 가장 행복하도록 창조되었다는 말입니다.

놀랍게도 차바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명칭으로 사용됩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무교절을 지키라.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음이라. 이스라엘을 군대래요. 여호수아서에서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너희를 위하느냐, 여호와의 군대를 위함이니다. 또 군대에요. 인간의 하나님 설계의 특징은, 통치와 명령체계 속에 있을 때 행복하다는 거에요. 다 문제는 여기에서 이탈 되었기에 고생이 벌어집니다. (!)

가끔 휴가 나왔다가 탈영되는 경우 있어요. 가장 안전한 것은 빨리 잡혀야 되요. 벌을 받더라도 군 질서속에 자기 위치 속에 서있을 때 군인으로서 가장 안전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어요. 우리 일상을 돌아보십시요. 어디에서 문제가 생기는가. 간단해요. 더 중요한 걸 덜 중요하게 여기고, 덜 중요한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먼저할 것을 나중에하고 나중에 할 것을 먼저하고. 자기 자리에 있지 않기에 문제가 발생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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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Q

Genesis 2:2-3 (KRV)

Revelation 21:1–5 (KRV)

A

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안식의 가장 중요한 핵심가치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 일하심의 결과로 안식은 누가 누려요? 우리가 누려요. 인생의 긴 순례의 여정은 이 참된 안식을 찾아가는 싸움이에요. 흔들리고 폭력이 난무하고 착취와 억압이 난무한 이 세상에, 우리에게 안식이 없어요. 내 삶에 안식이 없어요. 저 사람만큼만 하면 좋겠다. 그 사람 안에도 안식이 없어요. 어떻게 찾아옵니까.

내 신앙의 명제속 가장 중요한 고백이 하나님의 일하심이에요. 그 선언이 이루어질 때 우리 삶은 다 뒤집어지고 달라질 수 밖에 없어요. 하나님 앞서 일하시고 더 지혜롭고 아무리 답답하고 우울하고 불확실한 일을 앞에 둘지라도 가슴앞에 웅장한 아들로서의 고백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아버지께서 일하신다. 안식의 중심주제에요. 아버지께서 일하신다. (!) 이 고백을 붙들 수 있을 때 세상이 떠밀어내지 못하는 그 안식이 찾아옵니다. 생명이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무엇이 덜 중요한지 그 때 보기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실 때, 내게 진정한 쉼이 찾아온다는 거에요. 아직 여호와 한 분만으로는 뭔가 불안해, 부족해, 그래서 자기가 바빠야 하는 거에요. 결과는 뭐에요, 손에 붙잡은 한줌의 물처럼 다 빠져나가요. (!)

제자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가 다시 그물을 잡았을 때, 텅빈 그물 처럼. 내 다시 하나님이 일하신다 라는 명제가 내안에 일어날 때, 그 때 진정한 안식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신실한 우리의 고백이 되기 바랍니다. 책상 앞에 써놓으세요.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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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Q

Genesis 3:1 (KRV)

Genesis 3:2–3 (KRV)

A

: 3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피조물이죠. 가장 지혜롭다. 후반절에, 여자에게 질문이라는 방식으로 의혹을 불어넣습니다. 아주 눈치채지 못하도록 방식을 사용합니다. 일반화 하는 방법으로.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 한절한절 꼼꼼히 지나갑니다.

사단이 속이는 방법은,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더냐. 일반화의 작업이에요. (!) 종교다원주의가 여기에 있어요. 왜 무서운가 하면, 불교면 어떻고 천주교, 기독교, 신천지면 어떠냐. 끝에 가면 진리는 하나인데, 문화와 역사 배경상 좀 다를 뿐이다. 지식적인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들려요. 그러니까, 종교간에 대화가 필요하고 진리는 정상에서 하나로만나는 것이 확인된다. 아니요,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에요. 죄송하지만, 생명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수 없다. 배타적일 수 밖에 없어요. 그러나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다 괜찮고 대화하자. 굉장히 위험한 짓입니다.

: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이미 여자는 이 대답으로 봐서 무너졌어요. 두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덧대었고, 과정과 왜곡이 일어납니다. 죽을까 하노라? 반드시 죽는다 했어요. 로를 붙여서 뒤집어요. 죽을 수 있다 보다 안죽을 수 있다에 초점을 맞추어요. 왜곡은 반대적인 경향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그런 말 안했어요. 과장과 덧붙임이 일어나요. (!) 타락과 부패는 하나님 말씀을 덧대고 덧붙일 때 일어나요. 내년이면 종교개혁 500년인데, 마틴 루터도 뭘 뒤집고 고치고 아니에요. 원래 말씀으로 돌아가자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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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Q

Genesis 3:4 (KRV)

Genesis 3:6 (KRV)

A

: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여자에게 사실상 새로운 관점을 집어넣어준 거에요. 내 안에, 하나님의 관점 말고, 어둠의 세력에 새로운 관점이 들어올 때 부패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짐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

죄, 하말티야. 하마르티야. 과녘에서 벗어나다. 과녘은 생명입니다. 그 과녘에 맞닿아져야 생명을 얻고 삶이 풍성함을 얻도록 창조되었어요. 그런데 과녘에서 벗어나면 자기 관점이 생기고 자기 규례가 생겨서, 이게 죄에요. (!) 여자에게 자기 관점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아니, 뱀이 넣어준 관점이요. (!) 뱀의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로잡아주어야 해요.

: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본즉. 관점이에요. (!) 여자가 그 나무를 봄의 관점은 누구의 관점입니까, 가까이는 나의 관점이지만 비틀려진, 이미 무너진 뱀의 관점이에요. 그 관점인즉슨,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여, 금단의 열매를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를 무시하고 시간을 뛰어넘어, 기다리지 못하고 먹어버립니다. 여기에서 죄가 본격적으로 들어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극복하셨죠? 예수님 유혹한 사탄도 말씀을 인용해요. 그런데 예수님도 뭘로 물리치십니까, 오리지널 말씀으로 물리쳐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성경에 이르기를. 이것이 예수님의 무기였어요. 자기가 할 수 있었지만 자기 뜻대로 하지 않았어요. (!) 자기 한계를 지킴으로, 첫사람이 무너졌던 이 의미를 완성하고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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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ohn 2:16–17 (KRV)

2 Kings 18:4 (KRV)

A

: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창세기의 유혹은 세상으로부터 왔어요. 사탄은 세상의 앞잡이에요. (!) 마지막 시대는 결국 진리 전쟁입니다. 주변에 유난히 신천지들이 진을 치고 미혹하는 그림이 있어 화가 났는데,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바른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착념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인간은 꼭 무슨 짓을 하냐면, 장대 위 놋뱀을 가지고 우상을 만들어 섬겼어요.

: 4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느후스단, 놋조각. 그 껍데기만 가지고 분향했다고 해요. 오늘날 그런 거 많습니다. 예배도 그래요. 예배 한 번 드려서 내 삶을 떼우는, 헌금 한 번 드린 것으로, 예배드렸다고 때우는, 십자가도 그럴 수 있어요. 카톨릭 사제들이 병을 물리칠 때 십자가를 들이대요.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는 사라진채 십자가가 부적이 되고 오늘날은 십자가 악세사리에요. 악세사리, 부적 아니에요. 무당집에도 십자가가 있더래요. 아무거나 올리면 되는 랜덤한 종교아니잖아요. 오늘 이 말씀이, 우리 신앙 생활 속에, 첫째는 하나님께 더욱 붙들리는 삶. 의미는 사라진채 형식만 남은 신앙이 없는가. 돌아보는 복된 시간 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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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Q

Genesis 4:3 (KRV)

A

: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세월이 지난 후에. 간과할 수 있어요. 도대체 무슨 세월이 지난 거냐. 1년이냐 30년이냐. 그런데 이 문장이, 정확히 해석되어야 제사의 전체 의미가 확연하게 들어옵니다. 세 토막으로 끊어 설명을 드릴게요. 세월은 욤 이라는 단어인데, 날입니다. 지난 은 캣츠 라는 단어인데, 심판과 종말에 연결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아주 엄중한 진리가 들어오는데, 예배를 설명하기 위해 쓰인 앞에 놓은 수식어. 어떤 날이 종말을 향해 끝을 향해 맞대어 있다구요. 정확히 이야기하기는, 농사를 지을 때 한 절기가 지난. 후에 라는 말은 결과가 나온다는 거에요. 양 치는 한 절기, 농사짓는 한 절기 후에 나오는 열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가장 중요한 아이덴티티가 예배자입니다. (!) 신자입니다. 성도입니다. 이것보다 더 본질적인 아이덴티티는 예배자입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제사로 보았어요. 딤후 4장에 보면, 전제와 같이 내가 부음이 되고. 길고 멀었던 제단에 드려지는 제물로 이해된 것입니다. 부음이 된 것은, 누구 죽었소, 통지 보내는 부임이 아니고, 전제라는 제사가 끝남을 알리는 혼주의 행위입니다. 붓다. 그러면 이 제사는 끝이 나요. 멀고 길었던 험했던 나의 인생을 하나로 제사로 보았을 때 그 제사가 끝이 난다 이말이죠. 느낌으로 바짝 바짝 숨통이 조여오는 것을 감옥에서 직감해요. 우리는 예배자로서, 가인과 아벨 처럼 중요한 정체성은 예배자에요. 창조의 목적도 동일합니다.

유형이든, 무형이든, 길고먼 예배자의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배의 끝이, 종말이 옵니다. 추수할 때가 온다고 성경에서 말합니다. 심판대에 섭니다. 부정적인 뜻 뿐 아니라 우리는 그 시간을 그리스도 앞에서 맞닥뜨리게 됩니다. 오늘 이 표현 속에는, 가인과 아벨의 예배가 단순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연결되는 드러난 한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들 각각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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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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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brews 11:4 (KRV)
Ephesians 2:8–9 (KRV)
1 John 3:12 (KRV)

A

: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아벨은 이런 믿음, 붙들리는 은혜가 있었어요. 더 자세히 보면,

: 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속지 말것은, 가인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살인자가 아니에요, 그가 악한 자에 속했기 때문에, 그 열매가 살인으로 드러난 것 뿐입니다. 이건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에요. (!) 신앙은 가장 중요한 기초가, 치성을 드리는 싸움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 이거에요. 과거에 우리는 다 가인에 속해있었어요. 그러나 그리스도안의 아벨. 아벨과 같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사망에서 생명의 자리로 우리를 옮기신 거에요. 그리스도로 접붙이신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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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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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4:8 (KRV)

A

: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매튜 헨리라는 학자가 설명하기를, 이 대목을 설명하기를,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위해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들로 데리고 나갔다 주석합니다. 정확히 맞습니다. 가인의 살인은 고의입니다. 과실이 아닙니다.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 고의적입니다. 더 무서운 것이, 쳐 죽인것입니다. 쳐 죽이니라. 이 문법이 놀랍게도 미완료형으로 되어있어요. 항상 무슨 시제를 내포합니까, 현재를 내포해요. 이 살인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거에요. 살인은 추억이 아니에요. 살인은 지금도 사망의 냄새를 뿜어내며 진행형이에요.

우리는 어떻게 아벨의 제사를 드릴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중보적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속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인의 자리에 있었어요. 사망의 냄새를 풍기는, 살인의 의도를 가진 가인의 자리에 있었어요.

혹시 감이 이상해서, 어느 교회 다니세요, 무슨무슨 교회. 조사를 해보니, 이단성이 있는 시비가 걸린 교회에요. 왜 이런 데를 다니세요? 두 가지를 얘기하세요. 그 교회 가면 너무 분위기가 좋대요. 그리구요? 또 그 교회 가면 밥을 맛있게 해준대요. 아하. 이 어른이, 그렇게 오랜 생활 예배당을 오셨지만, 십자가 앞에 가인으로 들통난 적이 없으시구나. 십자가에 제대로 못박히시지 못했구나. 연세가 있다고 되는 게 아니라 소속의 문제요, 생명의 문제입니다. 한번도 십자가 앞에서, 주님과 함께 내가 못박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들통난 적이 없어요. (!) 생명에 관한 싸움이에요, 교양과목이 아니에요. 가인의 역사와 셋의 역사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나중에 아벨 대신에 셋을 주십니다.

전혀 상관 없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리스도의 예표인 아벨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바 되었다구요. 지성과 정성을 다 해야겠지만, 예배 때 나와서 내가 다시 한 번 십자가에 쾅 쾅 쾅 못박히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한번, 새날 살게 하신 그 감격, 내가 어쩌다 택함을 받고, 구원받은 은혜받은 존재가 되었는가, 예배자가 되었다는 것,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가인의 걸음으로 왔다가 아벨로 나갈 수 있도록 복된 예배자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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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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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6:2 (KRV)

A

: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뭘 봤어요? 아름다움을 봤다. 토브. 긍정적으로 쓰여집니다. 보시기에 좋았다. 토브. 사람쪽에 쓰일 때는 부정적이 됩니다. 조금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매력을 보았다. 겉의 매력을 보았다.

요즘도 세상 안믿는 사람들은 사람만 건강하면 된다 하지만 뭔가 갖추었으면 좋겠고, 인상은 이랬으면 좋겠고, 믿는 쪽에 오면 어머니와 이구동성으로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들이대면, 좀 직장이 옳았으면 좋겠고, 키가 너무 작지 않아요? 사람이 살아서 존재했던 역사는 다 같습니다. 인생의 대사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것이 겉의 매력을 보았다는 거에요. 이 여인이 인격과 품격과 신앙의 성숙도가 되어있는가 를 보는 게 아니라, 그 겉의 매력을 보았다. (!후… 큰일날 뻔 했다)

(그래서 ff 가 참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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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Q

Genesis 6:8 (KRV)

A

: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을 한 절로 놀랍게 표현해냅니다. 은혜에요. (!)
우리는 그래서 은혜 입은 자들입니다. 이런 가사. 주 나의 모습 보네. 상한 나. 주사랑 나를 채우네. 그 은혜로 나를 세우나. 세상 소망 다 사라져가도 아깝다는 말이 아니에요. 이게 사라져야 은혜가 제대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아유. 이게 사라져야 십자가와 구속의 의미가 제대로 들어오게 된다 이말입니다. (!) 주의 사랑은 끝이 없으니. 그 주의 은혜임을 나는 믿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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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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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3:14-15

2 Corinthians 1:8–9 (NLT)

A

John 3 speaks of Nicodemus, Jesus says, just as Moses lifted up the snake in the desert, the Son of Man has to be lifted up, referring to his own cross. This was the life of suffering for Jesus. Unless you are born again, you cannot enter into the kingdom of God. This is basics of our faith. You die, you will live. Through the suffering and cross, we truly come to live. (!T T) It is foolishness to the world but we abide by.

: 8 We think you ought to know, dear brothers and sisters, about the trouble we went through in the province of Asia. We were crushed and overwhelmed beyond our ability to endure, and we thought we would never live through it. 9 In fact, we expected to die. But as a result, we stopped relying on ourselves and learned to rely only on God, who raises the dead.

From Apostle Paul, he’s describing intense situations. We felt the sentence of death every day. Tragic, full of suffering. Life of no peace, facing death every day. This kind of suffering really changes us. Time of suffering changes us in a good way or it can change us in a bad way. We can come closer to God or it hardens us. (!) There are so many sufferings that we cannot live like this and go on any longer. We close our hearts before God. We face crisis in our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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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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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aiah 50:1–2 (NLT)

A

: This is what the Lord says: “Was your mother sent away because I divorced her? Did I sell you as slaves to my creditors? No, you were sold because of your sins. And your mother, too, was taken because of your sins. 2 Why was no one there when I came? Why didn’t anyone answer when I called? Is it because I have no power to rescue? No, that is not the reason! For I can speak to the sea and make it dry up! I can turn rivers into deserts covered with dying fish.

One famous pastor says there are four levels of fellowships you can have with another person. First level of fellowship is fellowship of sharing. Sharing testimonies and reflections, you get to know about each other. Relationship gets deeper. (!) Another level according to the pastor is fellowship of serving. Not that you are speaking but serving together, you grow deeper together. While you serve, you have different experiences together. There is deeper and deepest level of fellowship is suffering together. Deepest intimacy you can have with another person. Deepest kind of bond is formed through suffering together. Like, going through a war with someone. You are going through battle, trying to live and survive. You might not like the person next to you but because of suffering time, bond gets deeper. Trying to get through all the battles you become close.

How much more with God, through suffering, there is unity and deeper intimacy you can grow through it. It is an opportunity for us. In the place of suffering, we want to think of the heart of God. What is God feeling as I am going through difficult season of my life? God doesn’t want to make us suffer alone. If you are parents, you suffer when you see your children suffer. You suffer more looking at them. (!) God suffers more when we are in the difficult situation. We should think, if this bitter cup and cross comes to me, there must be a reason and a season why this came to me. Understanding the heart of God is faith we can set up in our dark sea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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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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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rinthians 6:4–5 (NLT)

A

: 4 In everything we do, we show that we are true ministers of God. We patiently endure troubles and hardships and calamities of every kind. 5 We have been beaten, been put in prison, faced angry mobs, worked to exhaustion, endured sleepless nights, and gone without food.

This is Paul’s own experience. Who would want this kind of life? Where you are always chased and facing death always, hard pressed and experiencing difficulties? But this is just one side of Christians. There is the other side. It is the beautiful and noble side. Endurance. Keyword in Christian faith when it comes to faith. It is not simply that you let it pass or deal with it until it passes. True meaning of endurance is that you bear the situation to the point where situation changes you and situation changes. Even to the breaking point but you don’t break. You turn your pain into strength. Tribulation into power. It becomes your glory. That is what it means to have endurance. It turns us to God. This pain and situation bring us closer to Go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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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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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ke 14:26 (KRV)

A

: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부부가 신앙을 해요, 그 때 부딪히는 것이 있을 때 이 말씀이 온다. 나보다 주를 더 사랑하세요. 당신도 그렇게 하세요. 이게 이 가정은 놀라운 세계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잘못 가르치면 정말 오해받기 쉬워요.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과격하다? 파괴될 것은 파괴되어야지. 그걸 조금 해석해서 설명해 줘야 하지 않습니까. 더 큰 아름다운 것들을 만나기 위함이라. 지연 혈연을 떠나는 것. 버림은 얻음을 위함이다. 힘든 것이지만, 그것을 떠남이 더 큰 것을 얻기 위함이라.

미움이 어떤 경지냐. 극단적인 경지이죠. 그런 사람이, 가짜 중이 되었어. (!Weekly Review + Song record + Reading/ Film) 전력으로 헌신하지 못하고, 잇쇼 겟메이, 목숨을 다해서 살아가지 않아. 어떤 바둑의 천재가 쓴 책이 목숨을 두고 돌을 둔다. 어마어마한 사람이 되었어요. 기성. 세인트다. 이 수준이, 중이 나중에 유명한 스님이 되고 딸도 유명한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떠났어. 그런데 그것도 못 얻었어. 소금이 짠 맛을 잃었을 때 이렇죠. 우리 인생이 어떻게 살아야 하냐면, 축약적으로 여기 들어있습니다. 땡스기빙에 다 가. 근데 가지 않고 교회를 지키고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얻기 위해서 버리고 나왔는데 궁극적으로 얻지 못하도록 삶이 맞추어져 있다. 짠 맛을 잃은 거죠. 낭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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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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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ke 12:17 (NLT)

A

: 17 He said to himself, ‘What should I do? I don’t have room for all my crops.’

Dilemma. I have nowhere to store my crops. Storing for myself. This is his aim. It can be our aim and our goal. I can store it for myself. He has blessings. For the farmer to have more. But what to do with it when blessings come? When blessings flip to curse, what is the problem? Why good becomes bad? It can be our thoughts that need to change. (!All these riches that were given as blessings, if my thoughts are wrong and don’t change, it will become the curse. Same for how I think about the child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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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ke 12:18–19 (NLT)

A

: 18Then he said, ‘I know! I’ll tear down my barns and build bigger ones. Then I’ll have room enough to store all my wheat and other goods. 19And I’ll sit back and say to myself, “My friend, you have enough stored away for years to come. Now take it easy! Eat, drink, and be merry!”’

Blessing will become even greater blessings. Why does it become something beneficial?

If he would transfer, he will get it. Even if the Lord asks his life tonight. You will go to where treasure is awaiting, isn’t it? Don’t you think so? (!) You still lack one thing. Give all your riches out to the poor. If you keep it for yourself, it is the end of all things, it is foolishness, it is not counting on God. We will be accounted after all.

There is a way to keep it in heaven. Keep it there. You are not transferring, you are going to lose it. Even yourself do not know who will get it.

There is another parable of heaven. You are the harvester and you who worked hard do not know who will be the harvest. Do you know who will get what you sowed and planted? You are fool if you think you can keep it. It is foolishness. You are so much focused on earth. You don’t think about eternity. We shall think we are on this pilgrimage. (!How foolish it is to build a mansion in White Plains? Just for little more gain for little mor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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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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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ke 12:21 (NLT)

A

: 21 “Yes, a person is a fool to store up earthly wealth but not have a rich relationship with God.”

Let us not store up things for ourselves. We suffered a lot, we are more and more encouraged to pile up more things in heaven. Nothing to be sorrowful, but joyful. Treasure will be for yourself, you will have it in heaven. Lord said it. He encouraged the rich man to remain as rich man in heaven. He gave the solution. That is what rich man is worried about, actually. They are shaken like that right? Will I be rich tomorrow? In 2008, many rich man lost things. Some committed suicide because they suddenly became poor. Their lives were in possession. When possession disappears, they could not live. Never lose your life. Lord gave you the solution. I wish we can be those who can follow these teachings. Anyone who stored up things for himself but not rich towards Go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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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sis 7:7 (KRV)
Deuteronomy 18:15 (KRV)
John 6:14 (KRV)

A

: 7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히브리어로 테바 입니다. 정확히 두 번 등장합니다. 창세기의 방주, 또 출애굽기에 등장합니다. 인용구절도 만나본적이 없는데. 모세의 어머니가 출산이후에 모든 히브리 남아를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집에 놓고 키우죠. 점점 성장하면서 울음소리가 더 나고 들켜서 살해될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결단합니다. 갈대상자를 만들어요. 정확하게 테바입니다.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역청을 바르죠. 강보에 싸서 그 갈대 상자에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일강에 띄워보내요.

우리도 절대 절명의 선택 앞에, 외통수에 걸릴 때, 방법이 없죠. 방법이 더이상 없을 때. 그 때는 나일 강에 던지는 거에요. 가끔 편지에 강물에 이 문제를 던졌다 이런 표현. 그럴 때가 많아요. 모세라는 의미는, 물에서 건짐을 입은 자 라는 뜻입니다.

: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찌어다. 먼 산 넘어 등장할 한 사람을 가리키는 지향점, 표지판입니다. 그 자는 나와 같은 선지자. 너희 형제 중에서.

: 14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모세가 지적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는 신약의 예수님을 묘사한 거에요. 종합해보면 이런 그림입니다. 방주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거에요. (!o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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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Q

Genesis 7:10 (KRV)

A

: 10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120년을 주시고. 설계도를 노아에게 주시고,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하는 일이 배 짓는 일이에요. 베드로사도가 훗날 이 광경을 이렇게 설명하네요.

: 그 일곱가족을 보호하시고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고

그 수많은 희롱과 모욕속에 손가락질 속에 뭘 만들고 있어요, 배를 만들고 있었어요. 의를 전파하는 행위입니다. (!하나의 단서, 왜 공동체 일이 필요하고 절실한 것인지.) 다 부정한 정결한 짐승들이 들어가고 문이 닫힙니다.

이제 홍수는 일주일 남았어요. 뚜껑은 닫혔어요. 노아와 노아 가족들이 앉아있고, 여전히 쨍쨍해요. 심판의 날을 기다리며. 너무 웃겨요 저는. 비 안오면 어떡하려고. 노아가, 이러려고 내가 방주를 만들었나. 여러분 120년을 매일 그거 했다고 생각해봐요. 뚝딱거리며 그거만 준비해요. 사람들이, 더위 단단히 먹었구나. 저 영감은 원래 그래. 예수 정말 제대로 믿으며 그런 손가락질 받았나요. 바울과 예수님은, 미치광이 소리 들었어요. 미쳤구나. 어머니와 형제들이.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숙명입니다.

베드로가 의를 전파했다는 의미는 띠두르고 나갔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상에서 방주를 만드는 일이었어요. 그 엄숙한 현실이 우리 앞에 한 주가 놓여져있죠. 의를 전파한다는 것은, 부름 받은 그 자리가 선교지가 될 때. 선교적 제자로의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선교지만 선교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일상으로 보냄을 받는 자리가 선교입니다. 무슨 직종이건, 여러분에게는 부름받는 자리. 여러분들이 이해받을 수 없어야 해요. 왜 갑갑하게 살까. 그게 정상이라구요. 기독교는 그런 의미에서 호의호택과 빵을 약속하거나 제공하는 기독교가 아니에요. 종교는 그렇게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붙들고 그분을 전파하며 산다는 것은, 본질의 이야기이고, 삶 전체를 걸어야 하는, 헌신이 결단되는 요구입니다.

30
Q

Genesis 7:2 (KRV)

Genesis 8:20 (KRV)

A

: 2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노아 방주 사건 읽다가 궁금했어요. 정결한 짐승만 들어간 게 아니라, 부정한 짐승도 데려갔어요. 이왕 세상 청소할 것, 부정한 것은 일소하고, 정결한 짐승과 노아의 가족만 데리고 가면 깔끔하게 정화가 완전히 될 것 같은데 부정한 것 까지 데리고 가요. 저와 같은 의문을 갖는 것이 인간의 착각이에요.

: 20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이 홍수의 심판을 제사로 마칩니다. 부정한 짐승입니까 정결한 짐승입니까. 정결한 짐승이 부정한 것들을 대신해서 죽은 것입니다. 그 안에 들어간 노아의 가족은 부정한 짐승과 함께 정결한 짐승을 통해 깨끗게 된 것입니다. 왜 부정한 것들을 데려가. 이게 우리에요. 원래 율법의 기준으로는 부정한 것에 손댄 자는 부정해 집니다. 역사적으로 예외가 있는데 예수님. 나인성 아들의 통곡 속에 그 관에 손을 대십니다. 정통 유대인으로 법을 깬 것이죠. 그러나 그럼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바뀝니다. 심판 받아 마땅할 우리가 정결함을 입는 거에요.

예수님께 손을 댄 혈류병 앓는 여인. 그러므로 예수님이 부정한 존재가 되었어요. 그것으로 여인은 정결케 됩니다. 평생 곤혹스럽게 인생을 탕진하며 슬픈 운명의 여인은 회복과 고침을 얻어요. 놀랍지 않습니까? 방주에 실어진 부정한 짐승, 우리에요. 우리가 그렇게 은혜를 입는 거에요. 정결한 짐승의 상징인 어린 양, 그 보혈의 공로로 우리는 나음을 얻게 되는 것이죠. (!)

31
Q

Genesis 9:22-23 (KRV)
Genesis 3:6 (KRV)
Leviticus 18:6–8 (KRV)

A

:22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여기 함의 실수가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 두 형제의 태도를 유심히 기록만 볼 때 강조점이 어딨냐면, 아버지 하체를 보지 않았다 에 강조점이 있어요. 얼마나 안보려고 했냐면, 옷을 매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다 할정도로 보지 않았다에 초점이 있어요.

정리를 하자면, 오늘 함의 저주의 아이콘이 되는 행동적 의식적 실수는 함은 보았고, 두 형제는 어떻게 해서든 보지 않으려고 했어요. 보았다 라는데 초점이 있어요. 여러분, 인류의 죄의 타락이 봄으로 왔습니다.

: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인류의 중요한 유혹이 들어오는 시점이죠? 탐스럽기도 하여 하나님이 설정해놓으신 경계선을 넘어가요. 그래서 그 여파가 아담에게로까지 끼치게 해서 아담도 무너집니다. 실낙원이되죠. 에덴의 상실을 가져오죠. 에덴의 회복을 향한 여정. 창세기의 결혼은 망가진 결혼이 되고 계시록에는 어린양과 몸된 교회의 결혼식 잔치로 에덴이 회복됩니다.

금단의 열매, 여기는 넘어가지 말라. 그러나 봄으로 타락합니다.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저주를 받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 노아가 벌거벗고 있었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 히브리말로. 원래 벗고 있는 것 부끄럽지 않았어요. 뼈중의 뼈, 살중의 살, 보니까 나에요. 첫죄가 들어오기 전에 인류는 부끄러움이 없었어요.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었어요. 히브리어로 벌거벗다는 사실은 부부관계를 뜻합니다. (!) 함이 보고.

: 6 너희는 골육지친을 가까이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7 네 어미의 하체는 곧 네 아비의 하체니 너는 범치 말라 그는 네 어미인즉 너는 그의 하체를 범치 말찌니라 8 너는 계모의 하체를 범치 말라 이는 네 아비의 하체니라

6 근친 상간을 말합니다. 7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다는 것은 누구의 하체를 본 것도 됩니까. 함이 부부관계가 끝난 이후의 잠들어 있던 어머니의 하체를 본 것입니다. 그것은 은유적으로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다고 되어있어요. 두 형제에게 말했다. 폭로했다는 게 아니라 이 말속에는 마치 그 하와가 하나님이 금지한 금단의 열매에 설정한 경계선을 넘어가서 타락하듯이, 함의 마음 속에는 그런 음모와 더러운 본성의 마음이 감추어진 것입니다. 두 형제는 이것을 거절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원리와 방법이 아니기 때문에.

32
Q

Genesis 9:24-25 (KRV)

A

: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실수는 누가 해요. 함이요. 그런데 가나안. 그 아들이 저주를 받게 되요. 죄는 유전이 되는 거에요? 가계에 도는 죄를 끊으라. 이런 책. 이 해석을 잘못해서 그래요. 죄는 유전되지 않습니다. (?)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뭘까요. 왜 가나안이 저주받아야 합니까? 창세기나 레위기서는 소위 모세 오경이라는 책입니다. 모세 오경은 누구를 위해 쓰여진 것입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히브리 공동체에 교회의 규범을 하나님께 받아적은 것입니다. 가나안은 진공 상태가 아닙니다. 텅비어있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축적된 오랜 악한 문화가 이미 가나안이 자리잡고 있어요. 그 문화의 가장 핵심적 가치는, 우상숭배를 빌미로 한 성적타락인데 근친 상간입니다. 아무 죄의식없이 가나안 문화의 명목으로 종교라는 이름을 씌워서 가나안을 꽉 채우고 있어요.

하나님의 걱정은 답습하고 따라하는 것입니다. 유전입니까 가치관의 전달입니까. 가치관의 전달입니다. 함의 이런 인식 세계가, 아들은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란다. 답습되는 것입니다. 그런 가나안의 토양과 문화적 배경때문에 모세는 이 글을 빌려 쓰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인은 독특한 문화가 있어요. 아버지가 제사장이기도 하고 족장이기도 합니다. 족장 선언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삭의 예. 죽기 얼마 전에, 에서와 야곱에게 예언적인 축복을 하죠. 그게 그대로 하나님의 경륜속에 베풀어지고 이루어집니다. 히브리인의 족장 선언. 노아의 선언도 그런 족장 선언의 카테고리에서 이해해야 해요. 함이 못된 짓을 해서 바로 저주했다는 게 아니에요. 함, 셈, 야벳, 긴 삶을 다 잘 이해하고, 하나님 앞에 부름 받기 전에 그 삶을 놓고 예언적 성격의 족장 선언을 한 내용이 이것이에요.

그쪽 지역의 속담 중에, 지푸라기 무게 하나라도 낙타의 등뼈를 부러뜨릴 수 있다. 낙타가 척박한 기후에 찌는 날씨에 작렬하는 태양 밑에 비등점에 이르는 짐을 지고 갑니다. 일본의 관용어를 빌리면 이빠이 실은 거에요. 더 이상 실을 수 없어요. 그 때 누가 지푸라기 무게만 얹어도 낙타의 뼈가 부러질 수 있다는 거에요. 지푸라기가 부러뜨린 것은 아니죠. 그러나 촉발과 동기가 된 것 뿐이지, 이미 그런 무게가 얹어져 있어요. 그게 함이 받은 저주에요. 이 사건도 중요하지만, 함의 일생은 하나님의 대척점에 서서 반역하는 인생을 살다가 결국 이 사건이 절정을 친 것입니다. (!)

우리 나라의 이 현실이 방금 터진 게 아니잖아요. 30-40년 동안 축적된 거잖아요. 이제라도 실체가 밝혀진 게 잘 된 거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이 가나안의 저주가 함의 저주의 유전이 아니라. 이제 곧 가나안에 들어갈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에 경고를 주시기 위해 노아의 족장 선언문을 인용하는 거에요. 가나안은 천국의 모형이 아닙니다. 그럼 전쟁이 없어야죠. 그런데 전쟁해요 들어가자마자. (!) 그 전쟁의 선봉에 여호수아가 서요. 호세아, 여호수아, 예수 같은 단어입니다. 가나안은 말하자면, 이 세속의 문화입니다. 함은 그 가나안의 뿌리가 된 인식세계와 가치관을 얘기해요. 우리는 그 가나안의 문화 안에서 매일 피를 흘리며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

이사야의 글에 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까. 왜 부르셨어요. 예배케 하기 위해서. 선교는 뭡니까. 예배가 없는 그 어둠의 땅에 예배자를 일으키고 예배를 하기 위한 선교는 하나의 방법이죠. 선교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땅끝에, 예배자 없는 그 곳에, 예배자를 찾으시고 일으키시기위해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교회를 마지막 시대에 허락하신 것입니다. (?!)

33
Q

Genesis 9:26–27 (KRV)
Genesis 11:10 (KRV)
Genesis 11:26 (KRV)

A

: 26 또 가로되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 10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 26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셈의 족보에서 아브라함이 나오고, 아브람은 100년에 이삭을 낳아요. 예수님은 이삭을 통해서 나오세요. 셈의 장막은 그리스도의 우산을 얘기해요. 결국 인류는, 셈의 장막 아래, 진정한 안정과 평화와 행복과 구원을 완성하도록 하나님은 이 창세기의 노아의 선언 속에 종말을, 역사의 끝을 미리 보이시고 감추어놓으신 사건이에요. (!)

우리는 함이었던 자리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죠? 표면적으로는 그리스도로 구원을 받죠.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정복당함으로써. 가나안은 회복되는 것이 이스라엘로부터 정복당함으로 회복되요. 가나안 처럼 살았던 그 문화에 취해 살았던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습니까? 대장되신 여호수아 그리스도. 그분께 정복됨으로써,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밟음으로서 정복됨으로서 구원되는 것입니다. (!)

첫째는 함은, 단순히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기 때문에 저주받은 게 아니에요. 이 땅을 새롭게 하시려는 그 질서에 정면으로 대적하는 불신앙의 삶으로 저주의 아이콘이 됩니다. 족장선언은 한 사건으로 하지 않아요.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그의 미래를 선언하고 설명하는 거죠. 그렇게 함은 저주의 아이콘이 됩니다. 마땅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 거에요. 함은 또다른 누가 아니라 그 속에 우리를 발견하게 되는 거죠.

근데 우리는, 여인의 후손인 그리스도께서 원수의 궤계를 밟음으로 승리하심으로써, 셈의 장막에 거하는 은총을 야벳처럼 입게 되었다. 결국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시기 위해 창조하셨고 선교라는 사명을 통해서 땅끝까지. 물리적이 아니라 예배자가 없는 곳이 땅끝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으로 복음을 가지고 떠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이 되어야 해요. 설레는 명제가 여러분들이 살아가야 할 일터에서 어둠을 밝히고 거기가 땅끝이 되는 결단과 순종이 있도록 기도합니다.

34
Q

Genesis 12:1 (KRV)

A

: 12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고향은 홈타운이 아니고 땅이라는 뜻입니다. 옛츠. 아브라함은 어느 땅을 떠나야 할까요, 물리적으로, 지금 그가 밟고 있는 하란의 땅입니다. 아브라함의 목적지가 아니에요. 아버지 데라의 죽음이 끝난 장소에요. 거기에 무슨 까닭인지는 소개하지 않지만 머물고 있었어요. 갈대아 우르 라는 말도 됩니다. 예렛츠. 고향의 흙내음. 익숙하고 만만하고 편안한 곳. 고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꿈을 위하여 떠나 보냅니다. (!) 야곱도 꿈을 심고 꿈을 내려놓게 하기 위하여 벧엘에서 떠나서 돌아오게 하셨어요. 둥지를 항상, 하나님은 흔들어버립니다. 우리 삶의 익숙한 둥지, 모든 게 준비되고. 그 둥지는 하나님의 꿈을 보는데 장애가 되고 방해만 됩니다. (!) 하나님의 꿈을 못보게 만들어요. 그래서 늘 머물렀던 둥지로 독수리가 새끼들의 비상을 위해 흔들어버리는 것 처럼, 신명기서에서 말합니다.

광야. 머무는 데가 아니에요. 늘 돌아다녀야 해요. 글로 40년이지, 땅 한 평도 내 공간이 없습니다. 오로지 하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훈련입니다. 인생길이 광야입니다. (!) 또 싸고 떠나야 합니다. 나그네와 같은. 나그네입니다.

소명, 또는 부르심이라고 말합니다. 소명에도 확정적 결정적 소명이 있어요. 내 안에서 확 열어질 때에도 그러기 위해 비일비재하게 역사라는 공간을 통해서 시간과 우여곡절의 방식이 있는 경우가 많아요. (!)

누군가는 뿌려야 해요. 당대가 잘해서 이 교회도 잘되는 것 아닙니다. 찬 마루에 앉아서 눈물로 씨를 뿌리던 기도하던 사람들이 있어요. 그분들은 기도만하고 지나가셨어요. 그 시대의 역할이었어요. 그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항상 성도님들은 신앙의 1세대가 되어야 합니다. 늘 개척자의 마음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뜨거운 금요일의 시간도 한 십년 해야.

좋은 팀이 만들어지는 것은, 3-4년? 아니요, 짧게 잡아서 10년 걸려요. 해보니까 그래요. 거쳐나가는 교역자들 가운데에는 천하도 감당치 못할 자도 있지만 정말 귀해요. 나름대로 자기 몫을 하고 지나가요. 그러면서 건강한 공동체와 건강한 팀이 만들어지죠.

35
Q

Genesis 12:2 (KRV)

A

: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숨이 콱 막힙니다. 내가. 하나님이 하시겠다구요. 하나님의 설득작업이지, 나의 어떤 컨빅션, 또는 확신이 아니에요. 의지적 결단도 아니에요. 뺀질거려보세요. 쟤는 안되겠다. 포기하시는 법이 있습니까. 저 바다를 건너, 태평양 건너, 지구 끝까지라도, 네가 음부에 자리를 펼지라도, 욥기처럼, 내가 너를 놓지 않겠다. (!!) 아브라함을 사실 놓고 천명하는 하나님의 자기 선언이에요. 믿음은 하나님의 자기 선언입니다. (!다시 그 큰 꿈으로.. 주여.. ) 복의 통로가 아니에요. 개역개정에 드디어 원문에 가깝게 해놓았어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사실 복이될지라 가 맞습니다. 여러분 자체가 복입니다.

내 인생의 주도권이 내게 있지 않고 아브라함처럼 하나님 손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내가. 내가 하겠다. 그 이후로 아브라함이 왠만한 남자로는 할 수 없는 못난 행동들을 하지만, 하나님이 계속 아브라함을 만지시고 설득하시고 믿음의 사람으로 이끌고 가시는 것을 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좋아서 믿음의 조상이 아니고, 은혜를 대표적으로 알 수 있기 때문에. 보면, 별거 없어. 아, 소망이 있구나. 성경을 그래서 읽을 때마다 감격인 거에요. 그 진흙탕에서 살려내시고 채워주시고 은혜로 덮어주셨는데, 내가 거기에서 제외되겠나. 대상에 관한 관계요 앎입니다. 천둥 벌거숭이 같은 아브라함을 어떻게 이끌어가시는가. 아브라함이 나에요.

36
Q

Genesis 12:4 (KRV)

A

: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말씀을 따라갔고. 말씀에 이끌려 갔고 에요. 순종적 차원보다 말씀의 능력에 이끌려 가는 거에요. (!)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아브라함의 일생을 핸들링 하기 시작한 거고 말씀의 굴레에 아브라함의 코가 꿰어져서 가는 것입니다. 이제 더이상 너의 인생을 너 맘대로 가게 하지 않겠다 이런 행보입니다. 히브리서 가면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믿음. 아버지가 다 사실 해주고 나서. 잘했다. 안 착한데, 착해 착해. 사실 모든 환경을 만들어주고 이끌어주는 것인데. 믿음의 장에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모세는. 물론 마지막의 경지에는 그렇죠, 요한 계시록에 스물 네 장로가 왕관을 벗어 면류관을 벗어 어린양께 돌려드린다는 거에요. 성경 전체의 이야기에요. 내가 한 게 아니구나. (!) 우리가 말씀에 이끌리고 순종하는 주님의 축복이 있기 원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앞에서 오는 게 아니라 위에서 옵니다. (!)

37
Q

Genesis 15:6 (KRV)

Romans 4:5 (KRV)

A

: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처음으로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이 믿음이 생기기까지, 사실은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계속 이끄시고, 상징도 보여주시고 (!) 보호도 해주시고, 느끼던 못 느끼던 손대시고, 설득해 오신 거에요. 이 믿음은 사실 아브라함이 깨달았다 믿었다 믿음이 아니라, 누가 심어주셨습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믿음이 좋아서 된 것이 아니라 믿음은 하나님의 설득이고 은혜임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아브라함이어서 그렇습니다. (!)

: 5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 나니

이 믿음은 이코르 은혜입니다. 믿음의 반대는 행위를 말해요. 일한 결과를 얻는 것. 하나님을 믿기까지 아브라함은 엉뚱한 짓만했지 행위가 없어요. 하나님이 설득하셨고 인내하셨고 인도하셨고 믿음을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제서야 아브라함이 눈을 열어 경탄하는 고백을 하는데, 우리도 그럴 때가 많아요. 처음엔 저희도 잘 몰라요. 이게 하나님 손길인지, 좀 희미해요. 그러다가 결정적인 어느 순간이 오고, 그 때서야 영적인 눈이 열리고 심령이 열려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그 희생제물로 죽으셨다는 것 앞에 소스라치게 놀라게 됩니다. 이게 다 주님의 섭리였고 그분이 여기까지, 내 고백이 나오기까지 설득해주셨구나 이것을 아는 것이 믿음이라 합니다. 이게 내것입니까, 하나님 넣어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이 넣어주신 것이죠.

38
Q

Genesis 15:4–5 (KRV)

Galatians 3:16 (KRV)

A

4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계시록에도 해달별은 히브리 인들의 문학적 이해로 자손을 상징한다고 말씀해드렸죠. 그 까만 하들에 총총 박혀있는 보석과 같은 별들을 보여주시며 네 자손이 이같이 될 것이다. 자손이라는 단어는, 성경 전체에 걸쳐 굉장히 중요한 중심 주제가 됩니다. 원래 자손은 복수로 쓰는 게 맞는데, 젤라 라는 말은 단수에요.

: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 자손이라는 말이 왜 단수일까. 정확하게 신약에서 어떻게 해석해주냐면 “네 씨”.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데리고 나가서 많은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면서 약속을 하십니다. 네 자손이 이와 같을 것이다. 네 자손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을 15장에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

39
Q

Genesis 22:10 (KRV)

A

: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아브라함의 상태는, 가나안 땅에 우여곡절 끝에 정착한 후 시간이 흘렀고 서서히 그 문화에 익숙해져있습니다. 여러 우상종교가 자리잡고 있는 가나안. 대부분이 종교 열광주의에 근거한 자기 열심주의 종교였어요. 대부분의 종교가 산 사람을 제단에 종교의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서슴없이 했습니다. 실제 문헌들에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종교적 광기. 이것 아브라함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서서히 혼란이 옵니다. 난 누구? 여기는 어디?

돌아보니까, 이삭이 태어나기까지 자기 신앙을 정직하게 돌아보면, 자기가 뭐 하나 떳떳하게 내세울 게 없어요. 늘 넘어지고 실패한 것 밖에는 없어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 앞에 면목이 없는 모습이죠. 이 때 시험이 와요. 면목없는 것을 보충하려다가 무리수를 두죠. 종교적 열심과 맞물리면 광기가 되요. (!)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 상식과 밸런스를 놓치면 안되요. 아브라함은 지금 신앙적 혼란이 있어요. (!) 내가 이정도로 충분할까. 뭔가 보답해야 겠는데.

옆에 종교를 보니까 산 인간을 서슴없이 바치는 이 가나안 땅에 머물러있어요. 자기 인생속에 개입해 들어오신 하나님은 알다가도 모를 분이에요. 실체는 알겠는데, 왜 무한히 인내하시고 참으실까. 뭘 바라시는 게 아닐까. 나는 연약하고 계속 넘어지는데. 좀 뭔가 보답해야할 텐데. 신학적인 질문과 신앙적인 영적인 상태는,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감추어져 있어요. 그런 의문들이 있어요. 항상, 내가 뭔가 부족하니까, 목이 마르니까, (!) 대상에 대한 열심과 종교적 광기를 통해 더 가까이 가려는, 잘못된 시도들이 가능하게 되죠. 그 극단의 현상들이 이미 가나안에 오랜 세월 자리잡고 있었다… (!) 그래서 시험하세요.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맞닿는 행동이었어요. 정말 행동으로 이 순종을 그 신학적 질문과 신앙적 혼란을 하나님의 가슴에, 머리를 엄마품에 대고 칭얼대며 비벼대듯, 괜히 코를 비벼대고 찡얼 거리죠. 그것은, 어떤 습관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 본능적인 거에요. 하나님의 가슴에 본능적인 맞닿는 순간이 온거에요. 얼마나 절체절명의 순간이에요. 아들은 묶여있어요. 자기는 칼을 들어 내리찍는 일만 남았어요. 제사지내듯 가능하겠어요 그게? 가능하다고 봐요? 불가능하다고 봐요. 그래서 제의적 용어를 쓰지 않아요. 문학적 표현을 써요. 이해할 수 없어요. 이게 뭡니까 하나님? 꼭 이래야만 됩니까? 이래야만 내가 주님 앞에 검증받는 것입니까? 이게 제사에요? 제사가 될 수 있어요 이게? 이제서야. 아브라함의 속살과 하나님의 가슴팍이 본질적으로 맞닿고 부비는 순간이 온거에요. 왜요? (!) 굉장히 중요해요.

10절. 손을 내밀어. 칼을 잡아요. 순종하기 위해. 100% 아브라함의 손이 하늘로 올려져 있어요. 실질적으로 이삭은 죽은 거에요. 이미. 제물이 되어. 제단에 누워있는 아들은 이미 죽은 거에요. 아브라함의 마음이 이미 결정된 거에요.

40
Q

Genesis 22:6 (KRV)
Genesis 22:7 (KRV)
Genesis 22:8–9 (KRV)

A

: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라는 말은 웃게 하신다. 5절을 보시면,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가서. 아이 라는 말은 테크놀 이라는 말. 주일 학교에서 애용되는 설교의 본문이다 보니까 어린아이 용어로 전환하니 초등학교 애들정도로 생각합니다. 시편 119편의 청년이 그 행실을 무엇으로 깨끗게 하리이까, 같은 말이에요. 이쯤 이삭은, 가파른 산에 나뭇단을 가지고 오를 정도로 신체 건강한 청년. 아브라함 앞에서는 아이이죠. 생물학적인 연령대가 아닙니다. 나무를 지고 모리아 땅을 오르고 있어요.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 나무를 지고 오르십니다. 정확히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아버지는 이아들을 잡을 연장도구를 지고 같이 오릅니다.

: 7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 아들의 질문만큼 아버지의 가슴에 대못을 치는 질문이 또 있을까요? 네가 제물인데 그 질문을 나에게 하면 내가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 8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산 위를. 나무를 지고 오를 정도의 건장한 청년이, 제단에 결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미 아브라함은, 생물학적인 나이가 어느정도인지 짐작하십니까. 아이를 생산할 수 없을정도로 나이가 많아요. 어떻게 이삭이 뉘어지고 결박을 당합니까. 가능한 일입니까? 상식적으로. 꽁꽁 묶이면서도, 어린양은 어디계세요? 그랬을까요? 저는 여기서 조심스럽게 이런 설명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여기에는 아들의 동의가 있었어요. 십자가의 사건은 (!) 아들의 순종이 있었기에 가능한 사건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구속의 계획에 기꺼이 아들이 순종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여기 이삭은, 순종하여 나뭇단 위에 뉘어집니다.

41
Q

Genesis 22:11–12 (KRV)
James 2:21-2 (KRV)
Genesis 22:16–17 (KRV)
Psalm 127:1–2 (KRV)

A

: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드디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항복을 받아냅니다. 야고보서 2장,

: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고, 야고보서는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 받았다고 합니다.

: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 행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그정도로 행해야한다는 차원이 아니에요. 모리아 한 땅에 아들을 내어놓기까지 하나님이 설득하신 거에요. (!함께 일하고!!)

아브라함아, 너는 내가 산 아들을 갖다 바치라는 가나안의 종교의 신들처럼, 내가 그렇게 무자비한 하나님인 줄 아느냐?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세요. 네 아들을 제물로 놓기까지 그런 헌신을 요구하는 무자비한 하나님인 줄 아느냐? 아직 결론에 못 다다른 거에요. 그런데, 나는 내 아들을 내어놓는다. 하나님의 파라독스에요. 역설이죠. 그런데 나는 내 독자를 너의 구원을 위해 내어놓는다. (!) 나는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다. 죽었던 아들을 돌려보내요. 그 예표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희들의 구원을 위해, 구속을 위해, 내 독자를 내어놓는다.

: 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이렇게 끝납니다. 네 씨는 단수에요. 장차 태어날 그리스도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단수로 썼어요.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구약에는 성의 문을 차지하면 다 빼앗은 거에요. 성문이 관건이에요. 한군데만 보면,

: 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2 너희가 일찌기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성, 집, 다 같은 표현입니다. 헛되다가 삼중적으로 등장합니다. 세우는 자의 수고, 파숫군의 경성함이 헛되고, 떡을 먹음이 헛됩니다. 인간의 모든 경영과 수고가 헛될수밖에 없다는 거에요. 여호와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2절 끝에, 뚱딴지 같은 말씀이 나오죠. 사랑하는 자에게는 잠을 주신다. 뭔얘기에요? 헛되기 때문에 잠을주신다? 매끄럽지 않죠. 이 말은,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 여디디아 입니다. 솔로몬의 또다른 이름이에요. 똑같이 불리워졌던 유일한 한 분,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부르심이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여디디아. 잠은 뭡니까? 죽음을 얘기합니다. 성도의 죽음을 잠이라고 합니다. 쉐나. 죽음입니다. 앞뒤가 이어놓으면 뭡니까? 인간의 모든 경영은 하나님 빠지면 헛되어요. 사람은 그래서 그리스도의 구속과 은혜가 필요하다는 거에요.

42
Q

Genesis 24:17–19 (KRV)

A

17 종이 마주 달려가서 가로되 청컨대 네 물 항아리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우라 18 그가 가로되 주여 마시소서 하며 급히 그 물 항아리를 손에 내려 마시게 하고 19 마시우기를 다하고 가로되 당신의 약대도 위하여 물을 길어 그것들로 배불리 마시게 하리이다 하고

이 종의 기도대로 그대로 소녀 리브가가 따라옵니다. 근데 이 낙타는 어마어마한 물을 들이킵니다. 죽음의 사막을 걸어가기 때문에 많은 수분이 필요해요. 이 가녀린 소녀가, 사람 마실 물 긷기도 힘들 텐데, 나그네에게 멈추지 않고 이 짐승에게도, 미물에게도 물을 먹이겠다는 이야기를 시켜서 한 게 아니고 자청해서 합니다. 사실은 시켰죠, 하나님이. 물론 오늘 모양새는 자청해서 하는 것 처럼 되지만, 그 어질고, 미물같은 생명조차 사랑하는 (어질 인!) 그 마음을 하나님이 만드셨어요. (!제시카) 열국의 어머니로서의 생산능력을 갖추어 낼 이 여인을 점지하시고 예정하신 것이죠. 모든 각본이 사람이 짜고 사람이 만든 게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셔서 하나님이 진행하시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거에요. 그렇게 흘러가고 있구나.

43
Q

Genesis 24:21 (KRV)

A

: 21 그 사람이 그를 묵묵히 주목하며 여호와께서 과연 평탄한 길을 주신 여부를 알고자 하더니

아까 제가 이 본문을 읽다가 번뜩이는 은혜를 경험했어요. 충실한 순종의 모습 뿐 아니라 뻔한 것도 기도하는, 기도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구나. 어떻게 이런 평탄한 길을 주셨나. 매 과정, 매 순간마다 너무 섬세하리만치 지금 기도하고 있어요. 하나님, 여기까지 정말 기가막히네요. 그다음 뭘 보여주실 것입니까? 이렇게 하다보면 아침이 와요. 열두시가 안되었네? 친구와 대화하듯. 기도는 대화에요. 하나님 앞에 자꾸 떼쓰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만 기도의 의미가 굳어져있어요. 달라고 하는 영역을 넘어서서 하나님 앞에 다 넉넉한 마음으로 기도의 복락을 누리세요.

태풍의 눈처럼 핵심 점이 있는데 엘리에셀의 태도에요. 지금 계속 누구에게 눈을 맞춰요. 하나님께. 이래서 죽겠고 저래서 죽겠고 어지러운 세상속에 던져진 우리인데, 하나님의 백성은, 버티고 앉아서 끝까지 주님만 주목하는 이 힘이에요. 이게 우리 여러분께 있기 원합니다. 상황이 이쪽 벌쩍 뛰고, 난리를 치다가 나는 간곳 없고. 그냥 쓰레기 더미만 남는.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아요. 지금 잘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도 거기에 흥분하지 않고 이 일의 결말을 끝까지, 하나님께 눈 떼지 않고 기도하며 주목합니다. 뻔한데 기도해요. (!)

44
Q

Genesis 24:11–12 (KRV)

A

: 11 그 약대를 성 밖 우물 곁에 꿇렸으니 저녁때라 여인들이 물을 길러 나올 때이었더라 12 그가 가로되 우리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오늘날 나로 순적히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이 종이 아브라함을 위해 기도합니다. 12절 하반절에,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사 나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뻔한 것도 기도하자. 보통 우린 뻔한 것 기도 안하죠. 확실한 거고 되어진 건데, 뒤집어 얘기하면 우리 기도의 인식의 단면을 볼 수 있어요. 기도는 뭔가 얻어내는 것의 방편이라고. 아니요, 정말 깊어갈 수록, 뻔한 것도 기도할 수 있어야 해요. 왜냐하면 기도는 고백이기 때문에, 은혜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내려놓을 수 있는 순종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불사하고 먼길을 와서 드디어 나홀 성에 왔어요. 조용히 우물가에 앉아서 하나님의 인도를 감사하며,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주인을 위한 기도에요.

종의 정형을 만납니다. 자기가 없어야 해요. 철저히 시키신 이에 순종하는 것.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맹종과 순종은 차별해야 합니다. (?어떻게 다른가) 모리아 땅 한 산에서 자기의 전 존재를 내어놓았다 기막힌 순종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순종이 이 늙은 종에게 발견됩니다.

45
Q

Genesis 25:8 (KRV)

A

: 8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말씀하세요. 빨리 하나님 앞에 평안히 가는 게 소원이라고. 그렇게. 진짜이시겠죠. 그런데 한 가지 더 깊게 생각해야 할 것은, 앓지 않고 아프지 않고 죽는 게 다는 아니에요.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수명 안에, 달려갈 길 속에 하나님께서 설정한 모든 계획을 이루었는가. 아브라함에게 사용된 표현은 후자 쪽입니다. 얼마나 복된 죽음인지 모릅니다. 허락하신 그 모든 그림을 드러내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 열조로 돌아갑니다.

사도바울의 생사관. 신약 서신 중 유작이라고 불리는 마지막 글이 디모데 후서입니다. 아주 명 문장 하나가 잘 알려져 있어요.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그런데 그 앞에, 전제와 같이 내가 부음이 되었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다. 딤후 3:6 절이에요. 바울의 죽음을 묘사. 죽음을 암시하지 않고 떠나다. 아놀로 세우스는 뜻밖에 죽음의 묘사가 아니에요. 종말, 끝장, 소멸, 사망 이라는 다양한 수식어가 가능한 상황인데도, 일체 생물학 죽음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놀로세우스. 로마군인들이 병영 속에서 사용하는 군대 작전용 언어입니다.

1년에 6개월 가량을 역내 밖에서 임시 천막을 치고 거기에서 피비린내나는 생사의 전쟁을 치룹니다. 고향도 가족도 떠난채. 팔다리가 잘리고 눈이 뽑히는. 한 장막 아래서 부대끼며 살아요. 출정한 동료가 돌아오지 않아요. 때로는 다리가 끊기고 팔이 잘리고, 이런 생활이 로마 군인의 일상입니다. 하루하루가 핏발이 서고 긴박한 날이에요. 소풍이 아니에요. (!) 그러다가, 그 전쟁이 종료되었다는 나팔 소리와 함께, 승리의 선언이 지휘관에 의해 던져집니다. 지난 삼년간 청파동 평야에서 대단히 수고많았다. 오늘 아홉시 부로 아군의 승리로 전쟁은 종료되었다. 그 순간 아군은 어떻게 변할까요? 처절한 울부짖음이 섞인 환호성, 칼이 철모가 던져지며 뜨거운 눈물로 생사를 함께한 동료들을 껴안겠죠. 함께, 이 전투에서 삶을 살다가 죽음이 떠난 동료들이 머리에 스쳐지나가겠죠. 임시로 묵었던 텐트로 달려갑니다. 짐 싸기 위해서. 그런데 짐 싸기 위해 먼저 하는 것이 텐트를 걷어야 해요. 텐트 칠 때와 거둘 때 순서가 역순입니다. 그러면 텐트를 허물기 위해서는 뽈대라고 일컫어지는 줄이 있습니다. 이 줄은 양쪽 땅에다가 페그로 망치로 고정시켜 놓습니다. 그래야 텐트의 공간이 확보되어요.

짐을 싸야 하는데 이 텐트를 줄을 풉니다. 줄을 풀면 텐트가 폭삭 무너집니다. 고린도 전서에 육신 장막이 무너지면 새것이 덧입는다. 모든 텐트는 육신을 가리켜요. 무너지게 되어있어요. 전쟁 끝났다고 발로 걷어차는 게 아니라 줄을 풀리고 폭삭 무너져요. 줄이 풀릴 때 그 상황을 떠난다. 아날로세우스 라는 단어를 써요.

이제 고향 집에 병사들은 기다리는 어머니와 아내를 향해 달려가는 마음으로 줄을 풀 때, 무슨 심정으로 풀까요? 1. 죽지 못해 푼다, 2, 마지못해 푼다 . 3. 소풍을 앞둔 소년의 심정으로 푼다.

나는 이제 고단한 육신의 삶을 끝내고 아버지의 집으로 간다. 아버지의 집의 설레임. 신자의 현주소입니다. 살면 살아서 할일이있고 죽으면 죽어서 갈 곳을 가진 자가 신자입니다. (!) 자주 하는 말인데.

군생활 할 때 제일 부러운 사람이 작대기 네 개 달고 전역하는 사람. 안됐다, 전역하는 구나. 전역 신고하고 나가다가 간첩 나와서 며칠 더 근무한 친구 있어요. 시대가 험할 때에는. 우리에게 죽음은 적어도 풍성한 것입니다. 이 세계관이 극복된 사람은 사실, 어떤 일 앞에서 사람 앞에서 두려울 것이 없어요. 뭐가 무섭고 뭐가 두려워요. 그래봐야 죽는 것 밖에 더 있어요? (!) 죽음은 우리가 통과하는 관문에 불과합니다. 거기에 겁먹지 마세요.

46
Q

Genesis 25:11

A

11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하였더라

이삭에게 하나님 복을 주셨다고 되어있어요. 성경 전후 문맥을 보면 안주신 것 같거든요. 여기서 언급하신 복의 정체는 우리가 이해하는 복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두라라는 후처를 데리고 이어서 자식을 생산합니다. 게다가, 이복 형님이긴 하지만 이스마엘은 더 많은 자손들을 계속 낳습니다. 그 당시 부의 중요한 가치는 자손인데, 그리고 땅인데, 복을 주셨다는데 이삭이 아이가 없어요. 무려 마흔살에 장가갔는데, 60살까지 없어요. 결혼한지 20년동안. 고 사이에, 아브라함은 새 장가를 들어서 자녀를 생산하고, 그두라의 자손들이 태어나고, 이스마엘 또한 그렇습니다. 그 사이에 낀 이삭은, 복 그림자도 못찾고있어요. 이것이 신자의 운명이에요. 사실은. 경영방식이 언제나 독특하세요. 애를 끓이고 바짝바짝 속을 태워서, 나에게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처절히 확인 시키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몰아가신다는 데 우리의 속상함이 있는 거에요. 너무 느끼는 분위기에요. 너무 공감하는 분위기에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가 예표되는 씨가 나와야 해요.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경영 속에 이루어지려면 인간의 가능한 여지나 조건속에 만들어지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하나님이 홀로 하시는 역사임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성도의 인생을 끌고 가지 않으세요.

건강한 신자, 선하고 착하게 사는 성도들, 한 번 질끈 눈을 감아주시지, 왜 그리 혹독하게 이끄시나. 하나님은 늘 바닥을 보이세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그분의 온전한 은혜를 드러내는 데 집중케 하십니다. 어쩔 수 없어요. 신자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어요. 혹여, 우리가 다른 쪽으로 눈돌리지 않도록, 몰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전문가이십니다. 못 피합니다. 외상이 없더라구요. 반드시 값을 받아내시고, 하나님께 집중케 하십니다. (!)

범생이들. 말잘듣는 애들은 부모와 깊은 정이 없어요. 근데 늘 도망가고, 지갑 열어서 돈 빼가고, 전화오면 경찰서 가 있고, 엄마의 가슴한 복판에 비를 내리게 한 자녀들. 그런 자녀들이 정말 부모를 알아요. 그리고, 부모하고 히스토리가 있잖아요. 아들과 엄마만이 아는 히스토리. 하나님과 그거 만들어가는 거거든요. (!) 야곱이 나중에 그게 복인 줄 알아요.

여러분 삶이 흔들거리고 삐걱거리고, 하나님이 여러분과 뭘 만들어가시죠, 히스토리 만들어가고 계세요. 영혼들을 보석처럼 정하게 하시려고. 인간의 모든 불순물들을 다 뽑아내시고 나중에 단련한 정금처럼, 복의 개념이 달라집니다. 그의 고백처럼. (!) 매주 만나는 밤에는 어둠에서 하나님 만나는 기적의 밤, 홍해가 갈라지는 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47
Q

Genesis 25:33–34 (KRV)

Hebrews 12:16 (KRV)

A

: 33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에서의 망할 행동에 대해 신약기자는 어떻게 기록하는가.

: 16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망령된 자. 영혼을 망하는 데에 둔 자와 같다. 어쨌든 발 뒷굼치를 잡을 정도로 태어날 때부터 장난 아니게 태어났어요. 여기서 그 장자의 명분을 사겠다는 의도를 아셔야 해요. 신약식으로 보면, 나는 어쨌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나는 어쨌든 주님의 구원하심이 필요합니다. 그 사람의 허물 못남 잘남 필요없어요. 나는 예수로 구주를 삼겠습니다. 에서는 그게 대수냐, 팔아넘기는 것. 망하는 거죠. (!)

그리스도인은, 정말 내가 뭘 중요하게 여기느냐가 정해져있어야 해요. 항상 생명 쪽에 운명을 거는가. 내가 선택 한다구요? 천만에요.

48
Q

Genesis 28:13 (KRV)

A

: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처음으로 언급하신 것,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언급합니다. 왜요, 직접 찾아오시면 되지, 중간에 조상의 조상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을 강조할까요. 이 모든 과정이 우연과 모름 속에 벌어지는 일 같지만,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자신에 대해 성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철저히 그 약속을 이행하시는 분이에요. 야곱의 주관적 시각에서는 모름과 우연이지만, 등 떠밀렸지만, 하나님의 의미적 시각에서는 이 알지못하는 깜깜한 시간 마저도 언약의 진행과정의 한 맥락이라는 것을 이렇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

최소한 5년 동안 요셉이 가두어져있었어요. 성경 역사 말고 일반 역사를 보면, 그 시간에 힉소소 왕조가 혁명을 일으켜요. 셈족 계통입니다. 요셉 셈족 계통이에요. 애굽의 정권을 잡습니다. 그 이후에 꿈 꾸는 사건이 일어나고 요셉이 석방이 됩니다. 요셉이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피의 숙청을 통해 절단났을 거에요. 보디발은 역사에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피의 혁명 가운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아요. 셈족 계통의 왕이 바로로 등극하면서 요셉은 총리의 자리까지 오르는 거에요. 그럼 적어도 요셉은 우연이고 모르는 깜깜한 시간이지만 감옥에서는 요셉에게는 적어도 감추어진 시간이었어요. 요셉의 히든 타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히든 타임이에요. 생명 싸개로 그를 보호하시고 덮은 거에요. 내전이 궁궐에 날 때 감옥만큼 그를 잘 지켜줄 수 있는 곳이 어디에요. (!)

어떤 청년은 그런 시간을 통과하고 있을지 몰라요. 어머니가 묻거든,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히든 타임이에요. 뭐라고 짜증내실 때 믿음의 대답을 증거할 수 있어야해요. 교회 다니는 청년 답게, 기개가 있고 신앙의 용기를 가진 내용을 담은 믿음의 답을 항상 준비해야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은 하나님의 히든 타임이에요.

49
Q

Genesis 27:15 (KRV)

A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저는 잘 이해가 안됩니다 여기. 자손이 퍼져나가는 게 일차적인 관심사가 아니에요. 15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돌아오게 하려면 왜 떠나보낼까. 아니 지켜주고 함께 하겠다고 했는데, 안떠나게 하면 제일 확실하잖아요. 더 좋잖아요. 돌아오게 하신다면 뭐하러 돌리냐. 남자분들은 아실거에요. 군대에서 뺑뺑이 돈다하죠. 오늘도, 뺑뺑이 돈다. 이 어감이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데 무의미하듯 보이고 반복되는 시간이 반복되어요. 계속 연병장 도는 것 뺑뺑이 돈다해요. 20킬로 완전군장 둘르고 때로는 달밤에 팬티만 있고 뛰어요. 왜 뛰는지도 잘 몰라요. 허파가 나왔다 들어갔다 할정도로 뛰어요. 그런데 그 무의미한 시간인줄 알았는데, 실전이 벌어지고, 산악을 탈 때 그것을 감당하는 실력이 붙어있더라구요. 내게. 바로 야곱의 이 뺑뺑이 도는 듯한 인생길의 의미가 여기 있습니다. (!)

여기 뽑아내야할 것 고쳐내야 할 것 을 위해 뺑뺑이를 돌아야해요. 떠나보내고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몇년 걸리죠? 이십년이지만, 우리에게는 평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평생 걸리는 싸움입니다. 이십년만에 돌아오는 길목도 얼마나 너저분 합니까. 야곱 참. 절대 항복 안하죠. 얍복강가에서. 서원했던 벧엘로 올라가야 하는데 세겜을 살고 눌러앉습니다. 야곱은, 은혜를 입고도 그 은혜를 또 까먹고 그런데 야곱보다 더 질긴 분이 계시죠. 하나님이 더 질기세요. 요 싸움이 붙으면, 누가이기냐면요, 고집 센 사람이 이겨요. 야곱은 고집부려봐야 백몇년.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에요. 말로 할 때 항복하는 게 지혜로운 방법이에요.

50
Q

Genesis 28:20-22 (KRV)

A

20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21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22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유치찬란한 기도입니다. 첫번째, 먹을 떡, 두번째 기둥이 하나님의 전이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에 갇히시지 않습니다), 세번째 십일조 드리겠습니다. 기도의 예증이 많이 등장하지만, 기도의 예증이라고 해서 다 정당하고 옳은 게 아닙니다. 굉장히 유치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안에 놀라운 은혜가 있어요. 말도 안되는 조건절 기도를 야곱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주권적 시간으로 다 성취하시고 바꾸어 놓으십니다.

너무 예의로운 기도하지마세요. 철딱서니 없는 기도일지라도 하나님 주권적 시각으로 다 성취해나가시는 고집스러운 하나님이심을 아십시요. (!)

51
Q

Genesis 28:11 (KRV)

A

: 11 한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바이브카 바막콤. 막콤은 노변, 길거리에요. 가다가 노숙했다는 거에요. 의도했던 장소가 아니에요. 바이브카. 의도된 장소가 아니다. 두가지 장소. 우연과 모름이라는 단어를 떠올립니다.

야곱은 엄마의 등에 밀려서 어쩔 수 없이 원치 않는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염없이 홀로, 처음으로, 고독한 순간을 맞이하는 인생길에 들이밀어졌습니다. 한적한 곳에 이르렀다. 우연과 모름. 늘 우리 인생길을 인도하실 때 이 두 가지 상황속에 밀어넣는 경우가 많아요. 우리는 전혀 모르고 갔지만. 이럴 때 많죠. (!) 성경에 오묘 막측한 하나님의 경륜이 솜씨가 드러나는지 몰라요. 예를 들면,

사도행전에 어디도 팀짜고 계획짜고 교회 설립한 대목이 없어요. 항상 교회가 세워진 곳에 일관된 패턴은, 좀 있다 도망가다가 머문 곳이 교회가 되는 거에요. (!) 우연인듯, 모르고 간듯 갔는데 그 우연과 모름이라는 텅빈 깜깜한 속에 하나님의 의미로 모든 것을 채워놓고 있었어요. 이 주권적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

아덴에서 사고치고 쫓겨서 도달한 곳이 고린도. 우연인듯 아굴라와 프리실라 를 만났는데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 쫓겨온 것. 쫓겨오면서 여기까진가보다… 여기가 끝인가보다… 어쩔 수 없이, 쫓겨서. 그들의 절망 끝에, 하나님 피로 값주고 산 고린도 교회를 감추어 놓으신 거에요. 우리는 몰랐는데. 그 우연과 모름 속에, 하나님의 경륜으로 가득 채워놓았다는 거죠. 기도는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거다)

이게 눈떠지면 기도하가다도, 감히 기도의 문장을 읊어내지 못하고 허, 헉, 헉, 깨닫다가 숨넘어가는 게 기도에요. 내가 막 쏟아내는 것도 기도일 수 있지만, 진짜 기도는 하나님의 비밀을, 눈으로, 심령으로, 열어서 자꾸 확확 보고 경험하는 거에요. (!)

야곱은 그 인생의 밤을 만납니다. 한적한 곳에 이르러. 여러분에게는 그곳이 어딥니까? 몰라야 그곳입니다. 젊은 날에 이해도 설득도 안되는 한적한 곳이 있어요. 왜 나를 그 곳으로 떠밀으실까? (!파리) 우연과 모름이 교차되는 그 곳.

해 진 때는 유대인에게 하루가 시작하는 때입니다. 해가 졌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새 날이 시작되겠구나. 생각하세요. 믿습니까. 유대인에게는 적어도 시작되는 때입니다. 물리적으로 해가 져요. 어둠이 찾아오고 캄캄함이 밀려옵니다. 바닷가 갯바위 같은데에서 하염없이 10분만 앉아 묵상해보세요. 자연을 묵상해도 놀라운 은혜가 많습니다. (!)

52
Q

Genesis 28:13–15 (KRV)

Matthew 28:20 (KRV)

A

: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하네. 마하나임. 하나님은 사실상, 야곱의 백성들과 가족들을 떠난적이 없다는 얘기에요. 언제나 나는 결합되어있었고 하나되어있었고 연합되어 있었고, 돌아오는 길목에 20년만에 나타나신게 아니라 그동안 함께 하셨다는 거에요. 이것이 지명이 됩니다.

여기 이상한 게 있어요. 마치, 이렇게 밖에 설명이 안되네요. 무심코 슬쩍 지나가며 보는 느낌이 들어요. 얼마나 많은 위기를 만나야 하고 모든 정황이 불안하고 아슬아슬할까요. 바짝 달라붙어어야 할 것 같은데 야곱은 아직 보긴 봤어요. (!) 머뭇거리는 신앙의 수준이에요. 우리가 자라는 과정과 비스슷해요. ㅁ못들은 거 아니에요. 신앙을 흘낏봐요. 안본 거 아니에요. 곳곳에서 암시를 합니까 안합니까. 암시를 합니다. 야곱아, 너 외롭지. 두려렵지지. 왜 두려웠을까요요. 가진게 많으니까. 가진게 없으면 두렵지 않아요. 빼앗길 게 있으면 두렵지, 없으면 두렵지 않아요. 지금 다 엉켜있어요. 안심하라고, 두 무리의 군대를 보이시면서 너와 나는 언제나, 벧엘의 그 날부터 나는 연결되어있었고 하나였고 함께 있었다. 그런데도, 야곱은, 흘낏하고 지나갑니다. 아무 대꾸나 매달리거나 이런 게 없어요. 여러분들과 같아요, 반응이 없어요. (!)

53
Q

Genesis 31:3 (KRV)

A

: 3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분명 이 귀향길은 하나님의 명백한 지시였어요요. 이 순간은 야곱이 어쩔 수 없이 떠밀려 나갈 수 바밖에 없는 위기를 만낫났났을 때 그것을 빌미미로 내린 귀향 명령이에요요. 우리 인생의 위기는 하나님의 계획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일하는 방식. 내가 이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니. 근데 다 싸워서 이겨야 해요. 손안대로 코풀게 해주시지지. 아버지가, 내가 너 생일 선물로 차 뽑았다. 월부는 네가 갚아라. 거기에 은혜가 있다구요요. 피하고 싶은 일 속에 하나님의 섭리를 감추신다는 것을 놓놓치면 안됩니다. (!) 야곱의 인생이 같아요. 궁극적인 목적은 가나안 땅, 아버지집으로 돌아가는 거에요. 왜 다 엉키키게 되었습니까. 에서의 분노를 푸는 일. 상대적으로 작은 일일 수 있어요. 그런데 이게 정말 작은 일일까요요? 안아니요. 이것 무시하고 온전한 아버지집의 귀환이 가능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54
Q

Genesis 32:8–11 (KRV)

A

: 8 가로되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하고 9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11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

이 두려움 속에는, 손에 가진진 게 있어서 두려웠고, 근본적으로는 전적으로 자기 인인생을 맡기지 않았던 까닭에 두려웠어요. 진정한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두려움 앞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 두려움이란 하나님의 엄위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 이미 쌍수의 군대를 통해 얼마나 내가 결합되어있었는는가를 보여주셨어요. 그런데도 그는, 아직도, 인생의 추가 그쪽으로 넘어와있지 않아요. (!) 자기가 다 지켜내야하고 책임져야하고, 자기가 자기 인생을 보호해야해요. 그러니, 그런 인생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어요. (!) 우리가 기도할 때 놓치지 말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문제를 해결받는 사람이 되라. (!) 내가 주도해서 해결하려는 이런 본성이 우리 안에 웅크리고 있어요. (!그래야 하는 거 아냐?) 팔자가 세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근데 문제를 해결 받는 인생이 있어요. 그 삶을 가만히 조명해보면, 아주 지혜로워요. 그냥 하나님께 던져 놓아요. 너희 염려를 맡겨. 원어로 던져놓다에요요. 붙들고 있으면 내 문제가 되고 하나님께 던져놓으면 하나님이 인상쓰고 짜증내시면서도 자기 일로 여기시는 분입니다. (!)

야곱에게는 아직 인생의 추추가 빼곡곡히 자기에게 있어요요. 이러다가 결정의 밤밤을 만납니다.

55
Q

Genesis 32:25-28 (KRV)

A

: 25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이 때부터 절게 됩니다. 절뚝 절뚝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야곱 평생의 은혜의 가시가 되어요. 그 절뚝 거릴 때마다 얍복강에서 악착같이 물어늘고 씨름했던 그 질긴 모습을 떠올렸을 거에요. 그의 뜻과 고집을 막을 수 없없음을 보고, 허벅지 관절을 치는데, 그것은 생식기 근처를 말해요. 너는 육체적으로 죽었다. 야곱 내면에 곤고히 웅크리고 있던 육체적인 모든 것들을 심판해버리는 겁니다.

: 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붙들고 늘어집니다. 이 사람이 하여간 붙들고 늘어지지는 게 선수에요. 평생 이 삶의 속성을 놓치지 않아요. 태어날 때부터. 움켜쥐고 붙들고. 심판하시고 떠나려는데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살려주세요. 여기에서 최초로 그는 우리식으로 얘기하면, 주님이 나의 구주가 되십니다. (!) 내가 죄인입니다. 이 고백 하게 됩니다. 이상한 대화화가 결론 겸 이어집니다.

: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몰라서 묻나요? 모를 리리 없으시죠. 모르는데 질기게 좇아다니실까요? 체질까지 알아요. 붙들고 늘어지는 야곱에게 네 이름이 뭐냐. 야곱. 움켜쥐고 발 뒷굼치 물고 늘어지는 사람입니다. 자기 실체를 직면하게 하는 질문이었어요. 지금까지 네 인생을 어떻게 살았냐. 네, 야곱으로 살았습니다. 홀로 밤 지새울 때 찾아오는 은총이에요. 어떤 것도 나를 도울 수 없을 때 만나게 되는 은혜의 실체. 네 이름이 무엇이냐,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세요. (!)

: 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원래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어떤 뜻이냐면 하나님이 룰러, 하나님이 네 인생을 통치하기 시작하신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통치하기 시작하신다. (!) 믿습니까. 이름이 바뀝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 어디에도도, 야곱아 야곱아 그러지 이스라엘아 이스라엘아 그렇지 않습니다. 당연하죠. 이스라엘은 선언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 내 안에 야곱이 너무 많아요. (!) 가시나무 노래처럼 내 안에내가 너무 많아요. 점점점점 이것이 이스라엘이 되어가는 거죠. 창세기 끝날 무렵 야곱은 이스라엘로로 인생을 마치고 그것이나라가 되죠. 믿습니까.

오늘 이 뜨거운 여름밤에 만난 것은 야곱의 얍복강의 만남이 되기 바랍니다. 그 강을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한다.

56
Q

Genesis 33:1–3 (KRV)

A

: 33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2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두여종과 그 자식들 그룹은 앞에, 레아와 그자식들 그 다음 그룹, 라헬과 요셉셉은 가장 눈에 넣어도 아프질 않을 사랑하는 그들은 제일 뒤에 둬요요. 야곱은 아직도 계속 머리를 굴려요. 꾀를 부려려요요. 이름이 바뀌고 나서도도 형을, 아니 가나안의 길목에 인간의 수단을 포기하지 못함을 봅니다. (!)

: 3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이게 얍복복강 후후 달라진 점입니다. 한번에는 안바뀌는데 조금씩은 바뀌어요. 제일 앞에 서요. 종들한테 너희들이 좀 화해해라. 엄밀밀하게는 어쩔 수 없이이 앞에 선 거에요. 그래도 야곱같은 간교한 기질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많이 바뀐 것이죠. 그나마도 안건너고 혼자 있었습니다. 희한한 씨름을 했죠.

일곱번 땅에 굽혀요. 이건 사실 어디 풍습이냐면 가나안 풍습입니니다. 오늘 전체 줄거리에서 이미 야곱이 가나안 문화에 익숙해져있다는 힌트가 하나하나 드러납니다. 무엇무엇이 어떤 언어어와 행동이 가나안 문화의 관습인지 볼 것입니다. 주종관계를 맺을 때 정확히 이 태도를 취합니다. 누구의 종으로 서겠다는 거에요. 목숨만 부지된다면 에서의 종으로도 평생 살겠다는 거에요. 그 고백을 형님한테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진심이었을 것 같아요. 에서가 달려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 화해의 제스쳐에요. 고대근동의의 문화. 에서 입장에서는 실질적인 화해에요.

57
Q

Genesis 33:12–20 (KRV)

Genesis 34:30 (KRV)

A

: 12 에서가 가로되 우리가 떠나가자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 13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14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동행 같이 안하겠다는거에요. 길이 험하고 애를 배서, 죽거나 병 날 수 있으니, 형님 뒤에 따라서 천천히 세일로 가가겠습니다. 세일은 당시 거주지에요. 거짓말이었어요. 세겜으로 갔어요. 세짜만 같아요. 벧엘 비슷한 곳도 원치않아요. 벧엘 가까운 곳 원치않아요. 벧엘을 원하세요. 늘 우리는 벧엘 비슷한 거 벧엘 근처 이것 좋아해요. 이게 바로의 속성이에요. 멀리 갈것 없다 예배? 여기 가까이서 해라. (!) 핑계를 대고 아직도 그 마음에 에서의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님 먼저 가십쇼. 세상사람이 더 순수해요. 이 거친 광야에서 자녀들 데리고고, 군대 데리고 온 거 있으니 같이 가자. 됐으니, 따라서 천천히 도착하겠습니다. 이렇게 된 거에요.

계속 그는 거짓말하고 야곱스러움을 내려놓지 못해요. (!)

: 16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회정하고 17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 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앞에 그 장막을 치고 19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개로 사고

17절. 숙곳에 이르러. 우릿간이라는 뜻이에요. 처음은 자기를 위해 집지어요. 그 다음 짐승을 위해 우릿간 지어요. 숙곳은 우릿간의 뜻. 평안히. 하나님이 원래 평안히 인도하셨어요. 근데 누가 널뛰었어요, 야곱이 혼자 겁먹었다가 두떼 나눴다 세 떼 나눴다 혼자 브루스, 혼자 난리를 친 거에요. 궁극적인 큰 약속을 못보고 평안히 가나안 땅에 돌아왔더라. 이 돌아오는 여정에, 야곱은 혼자 생쇼를 한 거에요. 밤새 주판 놓고, 세 떼, 두 떼, 환장을 한거죠. 그런데, 이렇게 되어있어요. (!)

Genesis 33:20 (KRV): 20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종교적 언어. 제단을 쌓았다. 하나님을 불렀다. 하니까, 돌아온 것에 감사하고 영광을 돌렸다고 홀딱 속습니다. 우리도 늘 야곱 같거거든요. 그래서 속아요. (!) 정확히 얘기해서 가나안 사람들이 종교적 행사를 쓸 때 패턴의 서문이에요. 엘이라는 말, 하나님님, 엘로헤, 는 하나님의 복수에요. 이스라엘은 자기에요. 야곱의 이름이 지난 장에서 이스라엘로 바뀌었잖아요. 엘 엘로헤 이스라엘은 자기를 가리켜요. 나를 언제든지 도와주시는 하나님. 가나안들이 통상상적으로 쓰던 종교 언어에요. 늘 제단은, 그들의 예배를 드릴 때 내가 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시는 나의 신이여. 내가 필요한 것을 모두 들어주시는 모든 신들이여. 우리는 하나님이지만 엘이 우리만 쓰는 표현이 아니에요. 이미 가나안에도 엘이라고 불러요.

야곱은 어렴풋이 들어와있는 하나님이라는 신에 대해서 이제 천천히 의식화되고 눈이 열어져가는 단계에요. 그는, 이름이 바뀐 상황에서도 아직 그의 신앙의 내용은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었어요. 자기가 주인이었어요. 두가지가 없어요. 엘이 하나님의 칭호였다면 반드시 두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주권이 고백되고 거룩이 전제되어야합니다. 이 제단 쌓는 야곱의 실지 벧엘 사건 이후, 여기에서 어떤 그런 표현이 소개되질 않습니다. 거룩해졌다던지, 아니면 하나님의 주권과 그의 통치를 고백했다던지 어떤 언급도 없어요. 아직도 이스라엘 속에 야곱스러러움이 옹골차게 지독하게 녹아져 있는 거죠. 이 표현들을 신앙적 행위로 이해해서든 안되고 절대 아니라는 것이 다음 장에 바로 들통이 나요. (!)

: 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나나나 송. 애기 송이에요. 나줘. 내꺼. 내꺼. 아주 유아적인. 이런 고백해서는 안되죠. 누가 몹쓸짓 당했어요. 머물지 말아야 할 땅 세겜에서 경을 칠 일을 겪고 나서, 복수극을 펴요. 누구를 걱정해야 해요. 딸을 걱정해야지, 나와 내게, 나나, 이게 무려, 일곱번 등장해요. 완전하게 자기 세계에 빠져있는. 일곱수가 등장합니다. 이게 엘 엘로헤 이스라엘입니다. (!)

오늘 이 밤, 우리의 기도속에 아직도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옹골차게 녹아져있는 야곱스러움을 털어내는 밤. 에서는 결국 뭐에요, 이건 시청각 자료에 불과해요. 누구를 고쳐내기 위한. 야곱을 고쳐내기 위한. 이 다음에는 에서가 나오지도 안와요. 진면목을 드러내고 그냥 사라져요. 크고 작은 모든 문제들은, 누구를 고치는 하나님의 재료들입니까. 나를 고치는 하나님의 재료들이에요. 어떤 일들도 하나님 없이 되어지는 일은 없어요. 그래서 더 안심이 되어요. 어떤 일들도 그것이 나에게 유익이 되던 아프게 하던 어떤 일도 하나님 허락 없이 되는 일이 없어요. 주권이 하나님께 있어요. 하나님께 우리가 달려들면 (!) 문제될 게 없어요.

58
Q

출애굽기, 열 두 명의 정탐꾼

A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보고를 할래 간증을 할래. 열 두 정탐꾼. 열명은 보고를 했어요. 중무장하고, 메뚜기 같고, 그 땅은 어떠어떠하고. 본대로 보고만 했어요. 근데,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던 두명은, 간증을 했습니다. 이 땅은 틀림없는 젖과 꿀이 흘르더이다. 아무리 장대한 민족이 살지라도 우리 땅이 넉넉히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하고 왔습니다. 이건 간증입니다. 간증은 보고와 다른 점은 하나님과 나와의 스토리가 만들어지는 거에요. 성경 한절한절이 내 안에 꿈틀거리듯 살아져 나오고 믿음을 통해 역사가 일어난다면 보고가 아니고 간증이 되는 것이이죠. (!)

59
Q

Isaiah 40:6–8 (KRV)

A

: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꽃은 시들고 잎은 지나 하나님 말씀은 영원하다. 여러분 일 하죠. 말씀에서 멀어지면, 말씀에서 말라지게 되면 바로 이상한 사람 되요. 인간에 대한 신뢰는 헛된 것입니다. (!) 우리 눈이 주를 향해야 하고, 우리 신앙이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으면 변질되고 썩고, 주여 우리는 먼지같이 분토처럼 사라져 죽나이다. 이사야 35장이지.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주님이 우리의 만족되십니다. 하나님에서 우리를 빼면 100에서 빼기 0. 그냥 100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서 하나님 빼면, 낫띵. 0. (정말 그럴까? 조직과 기관과, 너무 많은데. 너무 해놓은 게 많아서 하나님을 잊고 인간과 인간의 일들을 믿으면 어떻게 하지?) 비극입니까 희극입니까? 희극일 수도 비극일수도있죠.

사람이 지치게 된다. 지치지 않은 사람 가만 보세요. 사람에 실망하고, 뭐에 지치고, 꼴갑하고. 누가 하래냐, 너가 안하면 더 잘 된다. 그렇죠. 더 잘 되고 하나님이 망할 것은 망하게 해요. 망할 것 망하는데 뭐가 슬픈가. 슬픕니까. 망할 것 망하고. 뭐가 걱정인가.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있는가 가 문제잖아. 쓸데없는 걱정과 근심. 문제는 은혜를 잃어버린 나라는 것, 이 권면이죠. (!) 너무 과다하게 자기를 걱정하고, 신앙의 근본을 흔들지 말고. 전능하신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뭘 못하시겠냐고. 죽은 자를, 살리시지 않았아요?

Sola Fide and Sola Gratia, 이틀을 더 유하시고. 예수님이 우시느니라. 서럽다. 죽어도 다시 살 것을, 너희가 믿느냐? (!annual verse) 이 권면의 마지막. 마음이 조그마해졌어요. 답답해졌구나. 결론이 뭡니까.

60
Q

2 Corinthians 6:7–13 (KRV)

A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어 의의 병기로 좌우하고
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사도의 해석이 여러분의 삶과 같습니까? (Crazy life)

11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환경에 싸이지 말구요. 몇 달 못 만나겠네. 점점 더 못만나겠지. 우리의 삶 안에, 비극을 넘어서. 아름답게 삽시다. 고난 가운데 있으니까? 이제 렌트 되어가는데. 렌트 사십일. 고난의 그런 것 생각하고 깊게 느끼고 어려움도 더 자신을 깊이 있게 하고, 자신을 멋있는 사람으로 자라서 주께 더 가까이 가는 사람 되기를 원합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이 곤경에 빠뜨리셨나.)

61
Q

2 Corinthians 4:16 (NLT)

A

: 16 That is why we never give up. Though our bodies are dying, our spirits are being renewed every day.

We sometimes feels like we are being wasted away. (!and I don’t want that) But Paul was not discouraged. What is important is not whether we reveal this glory outwardly. What is important he’s saying is that inwardly we are renewed day by day. (!!) Whether you live well or live in difficulties, but all situations and circumstances, we need to seek the inward renewal. (!) Paul in riches or poverty, knew the secret of being content, how did he learn? He experienced both splendor and greatest suffering and poverty.

We are not always in need or want. We are glorious and splendid as well. It is important to learn both. On this day what is important is to be able to preach and testify about our faith. (!) Paul said he is not shamed of the Gospel. Preach the Gospel and speak it.

62
Q

Genesis 35:1 (KRV)

A

: 35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왜 벧엘이어야 하는가. (!) 벧엘에 도착했을 때가 28장이에요. 에서의 낯을 피해 도망다니며 노숙했어요. 세상 천지에 아무도 돌봐줄 수 없는 철저한 외로움입니다. 나그네 환대법이 있어서 길 가는 나그네에게 숙소를 제공할 의무가 있었는데 얼마나 외로운 처지인지 잘 말해줍니다. 벧엘이야? 아니죠, 루스죠. 그 이름을 벧엘로 바꾸었을 때에는 문제가 있었을 거에요. 고대 언어들의 그 당시 뿌리를 보면, 루스라는 말은, 황폐 절망, 카오스의 현장. 혼돈. 이 세상이 만들어졌을 때 처음이 카오스의 상태였어요. 하나님의 영이 작용하기 시작하면서 전 우주의 질서가 잡히기 시작합니다. 해가 만들어지고 달이 만들어지고 별들이 만들어지면서, 그 카오스가 정리가 되죠. 이 카오스의 의미를 가진 루스가 벧엘로. 오늘은 엘 벧엘로 나와요. 벧엘의 하나님. 물론 이 당시에 장소 말하는 것은 맞습니다. 오늘 엘 벧엘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하나님께 돌아가는 상태를 말합니다.

거기 거주하며. 올라가라, 거주하라, 제단을 쌓으라. 이 용어가 놀랍게도 군대적 표현을 인용했어요. 하나님은 본격적으로 야곱의 인생에 전쟁을 선포하세요. 나는 나를 이끌어왔고 은혜로 기다려왔지만, 네가 진정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이스라엘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제부터 내가 본격적으로 개입해서 네 인생에 전쟁을 선포할 것이다. (!)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부터 사실 우리의 대적, 원수에게 전쟁을 선포한 게 아니에요, 나에게 전쟁을 선포한 거에요. 이제부터 여러분의 손발을 묶는 작업을 하세요. 이기시려면 버둥거리지 못하도록, 그래야 잡아요. 제물에 제단을 올려놓을 때, 마지막에 숨통을 따요. 그래야, 축 늘어져서 온전히 드려집니다. 그 작업을 선포하십니다. 거주하라는 말은 하나님이 거기서 드디어 통치를 시작하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에서 답답해요. 아는 건 아는데 애매하고. 결국 말귀 못알아듣는 야곱을 향해, 벧엘로 올라가라. 거주하라. 제단을 쌓으라. 완전한 정복을 말해요. 벧엘은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지일 수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지에요. 우리 자체가 카오스 같은 인생, 혼란스러운 인생이었잖아요. 어느 날 하나님이, 언약으로 나를 찾아오셔서, 명제적으로 벧엘이라 칭해주셨어요. 진짜 야곱이 이스라엘 되는 것 처럼 루스가 벧엘이 되기까지.

63
Q

Genesis 35:4 (KRV)

A

: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지금 야곱은, 하나님에게 이미 붙들린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권속들 안에 우상들이 버글버글해요. 이것이 사실은, 야곱의 모습을 넘어서서 우리 속에 투영할 수 있는 모습이에요. 우리 안에 이런 우상, 있습니다. 나일 수도 있어요. 이런 우상 많아요. 이스라엘 공동체를, 430년이라는 애굽 종살이 의 생활을 끝내고 출애굽 시킨다음, 제일 먼저 하신 작업이 뭐에요, 아말렉과의 전쟁이요. 그것은 상대적 개념이 아니에요. 실질적 군대가 나오지만 그 아말렉 군대 안에 우리 모습이 있어요. 그 전쟁은 모세가 기도했더니 이겼더라, 기도에만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아말렉은 구원받은 이후, 홍해 건넌 이후에 부딪힌 최초의 전쟁이라는 거에요. 애굽에서 주는 밥 먹고 종살이 하고 있었으면 만나지도 않을 전쟁이에요. 구원받은 백성에게 만난 아말렉. 여호수아가 이겼어요. 근데 끝내지 않아요 그 전쟁을. 분명히 이겼는데, 출애굽기 17장에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라. 영적인 의미가 이렇습니다. 예수 피로 구원받았지만 내 안에 아직 남아있는 옛사람의 희미한 그림자들을 하나님의 통치로 칼날로 진멸하고자 하는 것이 아말렉 전투의 영적인 의미에요. 늘 분기 팽천 일어나는 혈기, 음란, 이런 것들. 신랑 외에는, 신부 외에는 한 눈 팔면 안돼.

64
Q

Genesis 35:7–8 (KRV)

A

: 7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야곱의 유모 드보라. 엘 벧엘이라. 전반부가 끝을 맺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청년들과 몇년 정도 신앙생활을 같이 해야 스토리가 좀 만들어질까. 엘 벧엘이란 말은, 우리가 신앙 생활을 같이 20-30년 해도, 거기서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아무 스토리가 없다면, 이렇게 이름 붙일 수 없어요. 예를 들어, 저는 먼 훗날, 20-30년 후에, 청파동에서 만난 하나님. 수많은 이야기들이 차곡차곡 쌓여져 있을 거에요. 7월 1일, 청파동에 부름 받아서 청년들과 세상 곳곳을 누비며. 그들과 같이 아파하며 공감했던 가슴앓이. 20-30년 후에 삼일 교회를 생각하면 제가 그렇게 이름 붙일 것 같아요. 청파동에서 만난 하나님. 놀랍게 눈금 하나가 쓰여진 것입니다. 겨우 이제 야곱은 사연 하나가 만들어진 거에요. (!) 제일 염려된 것이, 세겜의 잔혹사 때문에 벌떼처럼 일어나서 한 줌밖에 안되는 가족을 죽이는 거에요. 그런데 다 두렵게 만드셔서 다 닫으셨고 하나님 목적지 의도인 벧엘에 올라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게 됩니다.

창세기 35장은, 다음 주 나오지만, 너무 예고편이지만, 라헬이 길에서 죽는데 죽음으로 벤야민이 태어나요. 열두 지파. 이스라엘 나라의 한 축이 태어나며 나라가 완성됩니다. 야곱의 허리에서. 일관되게 홀로 시작하신 전쟁 속에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 벧엘로 이끄신. 회개도, 우리의 의지나, 몸부림으로 이루어지지 않아요. 나를 강권하셔서 부르짖게 하셔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회개할 능력 자체가 아니에요. 그정도 인것만 깨달아도 괜찮은 사람입니다.

65
Q

Genesis 37:1 (KRV)

A

: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땅에 거하였으니

거류하던 땅, 우거하던 그 땅에. 거주와 같은 개념일까요? 원어를 봐도 다른 개념입니다. 거류는 나그네 개념이에요. 거주는 원주민으로서의 본격적인 정착을 말해요. 아버지 때는 나그네였다는 거에요. 그런데 야곱이 오면서 원주민으로서 자리잡는 것입니다. 암시하는 것이 하나님의 신실성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공고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혹시 집 짓는 전과정 본 적이 있습니까. 성전 짓는 것 2년 동안 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오묘 막측해요. 신기한 게 많아요.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왜 저걸 저기에 놓지? 그 사람은 설계자에 의해서 배치하는 거에요. 당장 표면적으로는 왜 저기에? 그런데 설계한 사람은 전체의 한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완성이 시간의 질서와 공간이라는 역사의 개념 아래 진행되고 있있습니다. 우리는 부분 밖에 볼 수 없고 불안과 혼란이 초래됩니다. 믿음의 시각에서 하나님의 전체 그림을 포착하는 눈이 굉장히 필요합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힘써 여호와를 알자. 하나님의 전체 그림을 봐야해요. 시간이라는 역사공간에서 지나가는 것은. 잘 몰라해요. 골인 지점에 미리 가서 이 전 공정과정을 보며, 아 저게 있었어야 했구나. 괜히 신경질 부렸네. 다행스럽게도 우리 손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요. 완성된 그림이 있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와 말씀의 깨달음을 통해 만지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가진 자에게 꿈을 주세요.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만져보고도 안변했어요. 심지어 다 고향 땅으로 낙향했어요. 그 능력의 부활을 보고도. 그런데 그들이 어디서 확 뒤집어집니까? 엠마오로 가다가, 선지자의 글을 풀어주실 때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그 부활이 이 의미였구나! 십자가의 바른 이해와 맞닿아지니까 그 부활이 무엇인지 깨달았다구요. 부활을 목격하고도, 그래서? 무기력하게 죽어가던 그 분이 부활한듯 내 고단하고 사연 많은 삶에 무슨 영향력을 줄 텐데데? (!) 그 부활 사건이 십자가의 바른 이해와 맞닿아지니까 경천동지할 지각의 지진이 일어난 거에요. 그래서 그 십자가에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죽으실 수 밖에 없구나. 하나님 말씀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달아간다는 것. 가장 우선적 삶의 첫자리여야 합니다. (!)

66
Q

Genesis 37:8 (KRV)

A

: 8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이 꿈이 결국은 형들로 하여금 요셉을 미워하게 하는 빌미를 제공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문제에요. 육으로 머물고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개인이나 집단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지간에 하나님의 섭리를 미워하게 되어있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겠으나. 70일 전도대를 파송할 때 그 직전의 마가복음의 구조를 보면, 제자들을 데리고 어디를 방문하십니까까? 고향을 방방문하십니다. 거기가서 플랭카드 펼치고 성대한 환영을 받았나요 망신을 당했나요. 거의 내쫓기듯 망신 당하셨습니니다. 그것을 모르고 가셨을까 알고 가셨을까. 모르실리 없죠. 한 행보 하나가 온 인류를 향한 구원의 역사의 메세지가 될 텐데. 그럼 더 이해가 안 가죠. 고향 찾을 때는 으시대고 싶을 때 내려가요. 옷도 차도 거닐고 데리고 위세를 떱니다.

고향 땅에서 어떤 수모를 겪을지 예수님이 모를리 없죠. 제자들 다 보는 앞에서, 존경받고 사랑받는 스승인데 동네 사람들에게 개망신 당하고 쫓겨나요. 도대체 그려내고자 하는 메세지의 핵심은 뭘까요. 그 후, 70인을 선정해서 파송합니다. 너희가 가야 할 세상에에는, 방금 내가 고향땅에서 배척된 것 처럼, 너희들을 지독스럽게 미워할 것이다. (!)

67
Q

Genesis 37:2 (KRV)

A

: 2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지금부터 누구 족보 얘기한다구요? 야곱의 톨레돗. 그런데 실제 이야기는 누구에요요? 요셉의 이야기기입니다. 여러장을 걸쳐서. 야곱의 족보를 이야기 한다는데.

이 대목에서 이렇게 단정적으로 결론 짓습니다. 요셉의 길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야곱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야곱을 하나님이 구속하셔서 그를 어떻게 사랑하시고 구속하시며 완성해가시는가 전체 얼개에요. 삽입절로 요셉의 이야기가 장대하게 기록됩니다. 누구의 예표에요? 예수님. 그러면 창세기가 전체그림이 들어옵니까?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어떻게 야곱을 이스라엘 만들어가는가, 우리를 이스라엘 만들어가는 가, 야곱의 톨레돗, 그리고 요셉의 이야기를 말합니다. 결국 누구의 이야기로 써내려갑니까. 예수 그리스도의의 이야기를 써내려가야 합니다. 여러분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이야기로 되어가고 있습니까.

열두 정탐꾼이 가나안에 들어가요. 결론은 10 대 2로 갈라집니다. 두명은 하나님의 언약을 강조해요. 이땅을 허락하셨으니. 우리가 들어가면 얻고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열명은 리포트를 해요. 지형과, 팩트와, 군인들 신장, 중무장. 우리는 메뚜기
같습니다. 우리가 한 생을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성경의 메뉴얼을 가지고 자기 눈으로 보면 그런 보고밖에 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40년 후에 2명을 보냅니다. 그런데 그건 또 정탐도 하기 전에 들통나요. 라합의 집에 숨어들어가요. 거기에서 무슨 얘기를 듣냐면, 자기 조상들이 홍해 건널 때, 어떻게 하나님이 구원하셨고 원수세력을 어떻게 물리치셨나 듣고 이미 약속을 기다리고 있는 자가 거기 있더라. 왜 정탐꾼을 들여보냈을까요. 하나님의 스토리를 가진 그 여인을 만나게 한 거에요. (!나의 스토리는 뭔가, 하나님과의 나의 스토리는 뭘까.) 간증과 가슴에 가진 그 주의 백성들을 만나기 원합니다.

요셉이 팔려가는 것은 가나안 땅의 구원을 위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전체 그림으로 그렇지만 부분적으로는 팔려가는 것 때문에 소리를 지릅니다.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십니다. 단 한 번도 사랑에 흔들리지 않았어요요. 너 그것 때문에 겁먹고 있지. 속상해해하고 있지. 괜찮아. 두고봐. 잠잠히 사랑하세요. 우리 안에는 지구가 열두번 더 뒤집혀져 있는데. 잠잠히.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 그분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 손을 놓아도 그분은 우리 손을 한 번도 놓지 않으세요. (!)

68
Q

Genesis 39:2 (KRV)

A

: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이 형통의 근거는 환경입니까?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형통의 기초에요. 찰라흐 는 네 가지 문장으로 설명이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나를 통해서 진행되고 완성되는 것. 요셉의 가장 기억되는 그림은 꿈이었습니다. 다시 상기시켜보면, 그 꿈의 의미를 알았다 몰랐다, 몰랐어요. 요셉과 요셉의 꿈은 그의 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꿈이에요. 요셉은 아직 몰라요. 인간적인 요소들을 깨부수어가면서 전 인생을 통해 드러나죠.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남다른 장점이 있습니다. 남의 나라에 가서 주인에게 전권을 부여받을 정도로 성실한 것. 인간적인 성실을 부추기지 않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라,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러니까, 사람의 성실함도 인간의 끈기와 인내로 이루어질 수 없어요. (!) 누가 맡은 일에 꾸준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내게 하나님이 맡긴 일이라는 것 근본 인식이 있을 때만 버틸 수 있어요. 그거 알아먹는 게 은혜에요. (!)

나에게 닥쳐지는 이 곤고함. 해석도 설득도 안되지만, 지금 겪어야 해요.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한 거에요. 우리 어머니들이 가장 풍파에 힘겨울 때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그 분 믿고 질질 끌려서라도 가는 거에요. (?!)

69
Q

Genesis 39:4–5 (KRV)

A

: 4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두 가지 이해가 잘 안된다 했어요. 첫째, 이상하게 요셉의 인생은 자기가 잘못해서 당하는 고난보다 남때문에 겪는 고난이 전부에요. 애굽에 팔려온 것도 쪼잔한 형들 때문에. 감옥에 들어간것도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홀딱 뒤집어 쓰고. 여자들 참 무서워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첫째 이해모를 내용들입니다. (데보라, 이 ㅆㅆ) 남때문에 걸린 고난. 예수님이 저 때문에 달리셨잖아요. 요셉의 일생은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억울함과 어려움과 고난을 받습니다. 주님 십자가를 생각하면, 억울할 것 없다… 보편적으로 억울하게 생긴 사람 많아요. 다 이해가 안되서 그래요.

또 하나 이상한 것 있어요, 요셉에게 떨어지는 콩고물은 아무것도 없어요. 요셉 때문에 전부다 남이 다 잘먹고 잘 살아요. 이게 무슨 그림이죠. 예수님의 그림이죠. 주님이 자기를 찢어 생명의 떡이 되어주심으로 우리가 먹고 살잖아요. 매일 그 양식 먹고 사는 거잖아요. (!) 이 두가지에서 어떤 삶으로 초대되어야 하는가, 감이 잡힙니다. 어느 목사님이, 공부해서 남주냐, 남줘야죠. 청년들, 가끔 결혼 주례를 할 때 꼭 확인하는 질문이, 5천명을 먹고 살래 5천명을 먹여살릴래. 5천명만 먹여살리면 되겠어요, 최소한 십만 단위는 넘어가야지. 오십만명을 먹여살려라. 세상의 구조가 정말 그래요, 누군가는 먹여살려야 해요. 누군가는 그 시대의 평균이 되어서 함께 들어오지 못하는 자들을 먹여살릴 책임이 있어요.

뉴욕에 유엔 본부 있어요. 거기에 글을 읽다가 미셸린 근육, 별 받은 콤비비오 식당. 단테의 글 중 “향연” 이라는 말이에요. 잔치. 함께 먹고 살자는 말이 콤비비오 에요. 그리스도인은 항상 그 정신. 함께 먹고 사는. 곤고한 자들과 항상 식탁에 앉아계셨어요. 우리에게 상을 차리시고 함께 먹자. 가족으로 식구로 초대한다. 가격이 근데 좀 세다고 해요. 교회 공동체, 그리스도 공동체는 남을 위하고 남을 먹여 살리는 직책이에요. 왜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합니까? 이 직분의 함의가 내가 드려지고 죽어짐으로 남에게 유익이 되는 존재. 이것이 제사장의 삶 아닙니까. 우리가 제물이에요. (!) 교회는 그 시대의 눈물이 되어주고 제물이 되어주어야 해요. 그런데 더이상 한국 교회는 은과 금이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이 구호를 못 외치게 되었어요. 맨파워와 재물이 있다보니까 은혜가 간절하지 않아요. (!) 절실함도 사라졌어요. 그러다가 무서운 현상이 벌어졌죠. 함께 모아야 한 곤고함 절실함을 더이상 할 수 없게 되었어요.

격렬하게 항의 전화 하는 사람들이 교회 중직자 분들. 그분들이 왜 빨갱이에요? 오래 살면 욕본다. 별 희한한 소리. 그 사람들이 왜 빨갱이? 차디찬 바다에 애들 묻은 것 밖에 없는데. 교회가 이미 사회에 대한 공감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일관적으로 당부한 것, 주님의 애통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곳에, 낮은 곳에 함께 먹고 함께 살자. (!) 콤비비오. 그길로 가야 합니다. (!) 무슨 개혁, 500주년 개혁, 사람뜯어고치고, 진짜 개혁은 예수만 남겨지는 게 개혁 아니에요? 두 가지 중요한 원리. 이상하게 요셉의 인생, 남때문에 남 잘못으로 애매히 고난을 받습니다. 뿐 아니라, 사회에 책임을 크게 맡을 수록 자기에게 축적되는 것 없고 전부 남을 먹여 살리게 됩니다. 형들과 커밍하웃 할 때,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당신들보다 나를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 하나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구원의 전체그림이 그 때 요셉에게 기억되게 하시고 회복되게 하십니다.

70
Q

Genesis 39:7–10 (KRV)

A

: 7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8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최소한 이십대 초반. 불같은 피끓는 나이에 유혹이 날마다 와요. 요셉이 이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원인. 신전 의식을 가지고 있었어요.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 (!) 어디에든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집안에서도, 교양있는집은, 어른 눈치를 봐요. 어른 버젓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애들이 맘대로 하면 콩가루 집안이라 합니다. (!) 성령님이 모셔져 있죠. 누구를 인식해야하죠? 주인을 인식해야죠. 못된 짓 하려고 해도 주인이 계신데. 눈치 보는 게 신앙이에요. 눈치 보고 살자. 눈치 보는게 신앙인 줄 믿읍시다. 신전의식이에요.

10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정욕의 죄는 맞서 싸우면 천하장사도 이기지 못합니다. 정욕은 피하는 싸움입니다. 맞서 싸워요. 자기가 센 줄 아는 모양이야. 천하 누구도 세지 않습니다. 그냥 척하고 사는 거지. 특별히 정욕에 관해서는 피해야 하는 죄인줄 알기 바랍니다. 하나님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은혜인지.

세번째로 신전의식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채색옷의 의미를 말씀드렸죠? 상속자에게. 누구에게 상속합니까? 토라를 잘 배우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 119편의 말씀처럼, 어떻게 청년의 행실을 깨끗게 하리이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인생을 주도해야 (!) 죄와 세상의 더러움으로 부터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밤 늦게까지, 말씀듣는 것, 얼마나 이쁜지 몰라요. 계속 집어넣으세요. 어디선가 그 말씀이 튀어나오고 날선 검 같이 제어하고 생각납니다. 운동력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