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3 - February 2019 Flashcards
Genesis Daily memorization Weekly review
Genesis 1:1 (KRV)
: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최인철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프레임이라는 강의. 우주에서 본 지구 그림. 왜 그렇게 아웅다웅 싸웠나. 검은 사람 흰 사람. 잘 사는 사람 잘 못 사는 사람. 나라의 국경도 없고. 종교적 경험을 한 것과 같다. 큰 그림을 한 번 보고 나면 그 전의 삶의 방식으로 살 수 없더라. 경천동지. 흔들림. 견고하게 믿고 있었던 것이 무너지는 것. 그런 경험이 필요합니다. 창세기는 그런 위험한 책입니다.
독자의 시각. 어떤 프레임을 가지고 있느냐. 본문만 집중하면 문자에 빠져요. 저자의 의도가 중요합니다. (!페이퍼에 16 가지 심리가 안들어가면 다 까먹을 것 같다…) 하나님. 모세. 정확히 표현하면 저자는 하나님이고 기록자는 모세입니다. 타자 받아서 찍었다는 게 아니에요,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할 때, 물론 저자는 성령님이시지만, 기록자는 기계적인 기록이 아니고, 그 사람의 성품, 학식의 유무, 인성, 이성의 이해력, 이런 모든 것을 다 종합해서 유기적 영감을 한 것입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저자는 하나님이시되 기록자는 모세에요.
지금 이 책을 썼던 시기는, 시내산 아래 이스라엘 공동체가 광야생활 중에 머물러 있던 기간이에요. 애굽에서 나왔죠? 애굽은 대 제국과 화려한 절정의 문명을 자랑하는 나라입니다. 거기에서 지배되었던 삶의 가치는 철저한 물질만능과 우상숭배에요. 히브리 노예는 비록 고달프지만 지독한 고생과 함께 그 문명을 세포하나하나에 다 쪄들도록 경험했던 사람들이에요. 애굽의 가치에 물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하나님이 세운 모세를 따라 그냥 얼떨결에 따라나온 사람도 있겠지만, 약속의 실현으로 그들을 구출해 냅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의 산밑에 응집해있어요. 어떤 상황입니까.
처음 터져나온 소리가 떡과 물과 빵을 내라. 죽어서 묻힐 매장지도 없다. 불신앙으로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잠재울 수 있습니까? 모세의 지도력이요? 200만 명의 불신앙을? 이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에 불러 성령으로 책을 받아 적기 시작합니다. 창세기. 모세 오경입니다. 토라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기초요, 뿌리가 됩니다. 이 때 이 책이 쓰여졌다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
태초에, 하나님이. 엘로힘. 하나님의 눈높이에서 보기 시작할 때 인생의 목적과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요셉.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해 못했어요. 그러나 기근이 오고 양식을 구하러 온 형제들을 보자, 입에서 뛰쳐나온 말이. 하나님이. 하셨구나. 하나님이 주어가 되었어요. 역사의 주어. 하나님이. 내 입에서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어가 되어 터져나올 때까지 길고 긴 멀고 먼 시간이 걸려요. 이 문제만 해결이 되면 대기권을 벗어나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의 고백처럼, 더이상 같은 방식으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되는 거에요.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어로, 주인으로 되어주시기 시작합니다. 삶과 인생에 대한 새로운 경이로움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한 절만 가만히 마음에 담고 묵상을 하면, 이건 고고학적인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고 하나님의 구원사를 실질적으로 선포하지 설명하지 않아요. 창조론이냐 아니냐 이것도 아닙니다. 막 13장에, 그 날들이 환란날들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예수님이 하신 말씀. 창조론자에요. 이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을 동의하고 증명해요. 여기에 누구도, 그렇게 얘기할 겁니다. 만든 사람이 있겠지. 영이 죽어서 그래요. 나무 끝에 달린 풀 잎사귀에 변해가는 색깔의 일정한 질서를 보면서도 우주보다 더 넓은 하나님의 경의가 담겨있어요. 어떻게 우연이 있어요. 말이 안되죠. 창조론은 그 시시비비를 가리자는 게 아니에요. 과연 어디에 의도가 있을까.
Colossians 1:16 (KRV)
Isaiah 46:10 (KRV)
: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10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이 베레쉬트라는 말 속에는 사실, 누구의 그림이 감추어져 있냐면 그리스도. 레쉬트. 첫열매, 첫 시작. 골로새서 1:16 외우세요. 태초라는 말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 구원의 비밀이에요. 이사야 선지자의 말, 태초에 종말을 보이셨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시초부터 종말을 알렸다. 종말은 구원보다 앞서요. 나는 알파와 오메가니. 구원은 시간안에 펼쳐내는 거에요. 그러나 이미 창세기 1장 1절에 종말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로부터 시작하여 누구로 끝이 나느냐. 그리스도로 시작하여 그리스도로 끝날 것이다. 아직 이루지 않은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있어요. (!)
John 2:4 (KRV)
: 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In Christ’s reply to his mother there was no disrespect. He used the same word when speaking to her with affection from the cross; yet it is a standing testimony against the idolatry of after-ages (!), in giving undue honours to his mother.
John 2:9 (KRV)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the beginning of Christ’s miracles was turning water into wine; which may remind us of the difference between the law of Moses and the gospel of Christ. He showed that he improves creature-comforts to all true believers, and make them comforts indeed. (!)
John 2:10 (KRV)
: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And Christ’s works are all for use. Has he turned thy water into wine, given thee knowledge and grace? it is to profit withal; therefore draw out now, and use it. It was the best wine. Christ’s works commend themselves even to those who know not their Author. What was produced by miracles, always was the best in its kind.
Philippians 2:17 (NLT)
: 17 But I will rejoice even if I lose my life, pouring it out like a liquid offering to God, just like your faithful service is an offering to God. And I want all of you to share that joy.
Paul is in the prison and is writing to believers who are somewhere else. Strong relationship is there between Paul and the people of the church. They have the same sense of love and caring not only for Jesus Christ but also for the people in the work of spreading the Gospel. (!pains and suffering to create a bowl where people can come… it is like construction and architecture, the stuffiness and seemingly no purpose and rough type of works.)
(Paul’s ministry is quite cool, when I think of it being performed in UPG countries… probably not in US but somewhere… BUT global cities like New York IS different, we can evangelize the whole world from here.)
Philippians 2:18 (NLT)
: 18 Yes, you should rejoice, and I will share your joy.
He is giving himself out and he rejoices with them. But it is not one-sided but together. Not only I am thankful for your faith, but also I wish that you could look at me and my life situation that you can be glad with me.
It would not be a stretch to think that Apostle Paul would want to rejoice with any believers in Jesus who is carrying out the work of the Gospel and testifying the love and grace of God. If you in your heart are alive in the Gospel of Jesus Christ and in the sharing of the Gospel, Paul will be rejoicing with you. Can we rejoice with what Paul is going through in the prison cell feeling grateful? Can we rejoice with other Christians who are spreading the Gospel in all of our churches and other churches around the world? Can we rejoice with them? (!how, why, rejoicing? You are in pain. You are being tested. Why? Why grateful? You fool. You sick. You crazy. WHY???????? IS it in PAIN that we meet Christ? IS it in darkness where I see the stars? IS it in MISERY where I find God’s mercy in my life?) Holy Spirit will extend its power into all of churches to come together before God and worship together.
Philippians 1:7 (NLT)
: 7 So it is right that I should feel as I do about all of you, for you have a special place in my heart. You share with me the special favor of God, both in my imprisonment and in defending and confirming the truth of the Good News.
To know and to love is the same word in Hebrew. We should take interest and know what they are up to and what they are working on. (!) We should set Lord as our priority but once that is in place, we should start taking interest in others with love and care. (!)
Genesis 1:2 (KRV)
Deuteronomy 32:11 (KRV)
:2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엘로힘이 복수로 되어있어요. 성령님입니다. 가끔 혼란이, 창조는 성부 하나님만 하신 줄 알아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같이하신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영을 강조하십니다. 로하무, 프나마. 수면 위에 운행하셨대요. 운행하다. 문자적으로 무엇인가. 영적으로는 무슨 뜻인가. 운행은 정확히 히브리어로 새가 알을 품다 이런 말입니다.
부화되고 나오면, 둥지를 만들어서 키워요. 먹이를 계속 날라줍니다. 어느정도 어미 새가 계획한 기간이 지나면, 갑자기 어느날 보금자리를 흩어놓아요. 그러면 죽는다 비명 지르고 천길 아래로 떨어져요. 생존 본능에 의해 푸드덕 푸드덕 하겠죠. 그러나 쏜살같이 내려가서 큰 날개 위에 받아요. 그럼 또 떨어뜨려요. 경천 동지의 경험. 반복해보면 어느날 창공을 자유로이 날 수 있는 멋진 새가 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런 본문을 주셨어요.
: 11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어떻게 광야를 걷게 하셨는가? 땅으로 곤두박질 칠 때 그것을 업습니다. (!) 이 과정을 보통 양육이라고 합니다. 사람도 열 두달을 품어요. 제일 더디게 자라는 건 인간인 듯 해요. 알에서 품는 과정부터 여기에 이르기 까지. 하나님의 핵심가치는 뭘까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수면에 운행하시느니라 이것은 사랑의 속성을 드러냅니다.
뜻밖에도 예수 믿는 분들중에 자존감이 낮은 분들이 많아요. 자존감이 높아야 합니다. 왜? 내 근거가 일반인들과 다를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천지를 창조하셨어요.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이야기가 그 얘기에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시기까지 그 값을 속량의 제물로 지불하셨어요. 저는 이해는 하는데 심정적으로 안 와닿아요. 병아리가 배고프다고 내 아들을 삶아서 먹인다. (!) 하나님이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확증하셨다면 우리가 얼마나 사랑받는 대상으로 그 재창조의 복음이 이 창조의 기사속에 빼곡하게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창조는 전부 복음, 전부 그리스도의 이야기에요.
Genesis 1:3–4 (KRV)
Revelation 21:23 (KRV)
: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여기서도 그리스도를 빛으로 묘사해요. 내 개인에게도 매우 중요한 선언이 되어야 해요. (!) 수면 위에 운행하시느니라. 운행의 핵심가치는 사랑이에요. 사랑하셔서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자녀로 재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구원하실 건가 절절히 감추어 놓고 있는 거에요. 모두 그리스도를 향하여 성경은 쓰여집니다. 성경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 사랑의 실체가 빛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Genesis 2:1 (KRV)
: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어마어마 합니다. 모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들어있습니다. 천지와 만물이. 단순히 피조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차바라는 말을 써요. 일반 피조물을 칭하는 게 아니라 군대라는 뜻입니다. 한국 남자는 군대와는 뗄레야 뗄 수 없죠. 공익이든 어쨌든 다 근무를 해야 합니다. 군대가 갖는 명징한 개념이 하나 있는데, 뭘까요? 통치와 명령, 복종입니다. 그런 의미 때문에 차바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인간은 피조물의 정점이죠. 언제 행복하도록, 유익되도록 창조하셨는가. 하나님의 통치와 명령체계 아래 복종할 때 가장 행복하도록 창조되었다는 말입니다.
놀랍게도 차바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명칭으로 사용됩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무교절을 지키라. 너희 군대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음이라. 이스라엘을 군대래요. 여호수아서에서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너희를 위하느냐, 여호와의 군대를 위함이니다. 또 군대에요. 인간의 하나님 설계의 특징은, 통치와 명령체계 속에 있을 때 행복하다는 거에요. 다 문제는 여기에서 이탈 되었기에 고생이 벌어집니다. (!)
가끔 휴가 나왔다가 탈영되는 경우 있어요. 가장 안전한 것은 빨리 잡혀야 되요. 벌을 받더라도 군 질서속에 자기 위치 속에 서있을 때 군인으로서 가장 안전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어요. 우리 일상을 돌아보십시요. 어디에서 문제가 생기는가. 간단해요. 더 중요한 걸 덜 중요하게 여기고, 덜 중요한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먼저할 것을 나중에하고 나중에 할 것을 먼저하고. 자기 자리에 있지 않기에 문제가 발생해요. (!)
Genesis 2:2-3 (KRV)
Revelation 21:1–5 (KRV)
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안식의 가장 중요한 핵심가치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 일하심의 결과로 안식은 누가 누려요? 우리가 누려요. 인생의 긴 순례의 여정은 이 참된 안식을 찾아가는 싸움이에요. 흔들리고 폭력이 난무하고 착취와 억압이 난무한 이 세상에, 우리에게 안식이 없어요. 내 삶에 안식이 없어요. 저 사람만큼만 하면 좋겠다. 그 사람 안에도 안식이 없어요. 어떻게 찾아옵니까.
내 신앙의 명제속 가장 중요한 고백이 하나님의 일하심이에요. 그 선언이 이루어질 때 우리 삶은 다 뒤집어지고 달라질 수 밖에 없어요. 하나님 앞서 일하시고 더 지혜롭고 아무리 답답하고 우울하고 불확실한 일을 앞에 둘지라도 가슴앞에 웅장한 아들로서의 고백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아버지께서 일하신다. 안식의 중심주제에요. 아버지께서 일하신다. (!) 이 고백을 붙들 수 있을 때 세상이 떠밀어내지 못하는 그 안식이 찾아옵니다. 생명이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무엇이 덜 중요한지 그 때 보기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실 때, 내게 진정한 쉼이 찾아온다는 거에요. 아직 여호와 한 분만으로는 뭔가 불안해, 부족해, 그래서 자기가 바빠야 하는 거에요. 결과는 뭐에요, 손에 붙잡은 한줌의 물처럼 다 빠져나가요. (!)
제자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가 다시 그물을 잡았을 때, 텅빈 그물 처럼. 내 다시 하나님이 일하신다 라는 명제가 내안에 일어날 때, 그 때 진정한 안식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신실한 우리의 고백이 되기 바랍니다. 책상 앞에 써놓으세요. 하나님께서 일하신다.
Genesis 3:1 (KRV)
Genesis 3:2–3 (KRV)
: 3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피조물이죠. 가장 지혜롭다. 후반절에, 여자에게 질문이라는 방식으로 의혹을 불어넣습니다. 아주 눈치채지 못하도록 방식을 사용합니다. 일반화 하는 방법으로.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 한절한절 꼼꼼히 지나갑니다.
사단이 속이는 방법은,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더냐. 일반화의 작업이에요. (!) 종교다원주의가 여기에 있어요. 왜 무서운가 하면, 불교면 어떻고 천주교, 기독교, 신천지면 어떠냐. 끝에 가면 진리는 하나인데, 문화와 역사 배경상 좀 다를 뿐이다. 지식적인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들려요. 그러니까, 종교간에 대화가 필요하고 진리는 정상에서 하나로만나는 것이 확인된다. 아니요,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에요. 죄송하지만, 생명이고 진리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수 없다. 배타적일 수 밖에 없어요. 그러나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다 괜찮고 대화하자. 굉장히 위험한 짓입니다.
: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이미 여자는 이 대답으로 봐서 무너졌어요. 두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덧대었고, 과정과 왜곡이 일어납니다. 죽을까 하노라? 반드시 죽는다 했어요. 로를 붙여서 뒤집어요. 죽을 수 있다 보다 안죽을 수 있다에 초점을 맞추어요. 왜곡은 반대적인 경향으로 가기 마련입니다.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그런 말 안했어요. 과장과 덧붙임이 일어나요. (!) 타락과 부패는 하나님 말씀을 덧대고 덧붙일 때 일어나요. 내년이면 종교개혁 500년인데, 마틴 루터도 뭘 뒤집고 고치고 아니에요. 원래 말씀으로 돌아가자에요. (!)
Genesis 3:4 (KRV)
Genesis 3:6 (KRV)
: 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여자에게 사실상 새로운 관점을 집어넣어준 거에요. 내 안에, 하나님의 관점 말고, 어둠의 세력에 새로운 관점이 들어올 때 부패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짐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
죄, 하말티야. 하마르티야. 과녘에서 벗어나다. 과녘은 생명입니다. 그 과녘에 맞닿아져야 생명을 얻고 삶이 풍성함을 얻도록 창조되었어요. 그런데 과녘에서 벗어나면 자기 관점이 생기고 자기 규례가 생겨서, 이게 죄에요. (!) 여자에게 자기 관점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아니, 뱀이 넣어준 관점이요. (!) 뱀의 관점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로잡아주어야 해요.
: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본즉. 관점이에요. (!) 여자가 그 나무를 봄의 관점은 누구의 관점입니까, 가까이는 나의 관점이지만 비틀려진, 이미 무너진 뱀의 관점이에요. 그 관점인즉슨,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여, 금단의 열매를 하나님의 질서와 통치를 무시하고 시간을 뛰어넘어, 기다리지 못하고 먹어버립니다. 여기에서 죄가 본격적으로 들어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극복하셨죠? 예수님 유혹한 사탄도 말씀을 인용해요. 그런데 예수님도 뭘로 물리치십니까, 오리지널 말씀으로 물리쳐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성경에 이르기를. 이것이 예수님의 무기였어요. 자기가 할 수 있었지만 자기 뜻대로 하지 않았어요. (!) 자기 한계를 지킴으로, 첫사람이 무너졌던 이 의미를 완성하고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
1 John 2:16–17 (KRV)
2 Kings 18:4 (KRV)
: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창세기의 유혹은 세상으로부터 왔어요. 사탄은 세상의 앞잡이에요. (!) 마지막 시대는 결국 진리 전쟁입니다. 주변에 유난히 신천지들이 진을 치고 미혹하는 그림이 있어 화가 났는데,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바른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착념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인간은 꼭 무슨 짓을 하냐면, 장대 위 놋뱀을 가지고 우상을 만들어 섬겼어요.
: 4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느후스단, 놋조각. 그 껍데기만 가지고 분향했다고 해요. 오늘날 그런 거 많습니다. 예배도 그래요. 예배 한 번 드려서 내 삶을 떼우는, 헌금 한 번 드린 것으로, 예배드렸다고 때우는, 십자가도 그럴 수 있어요. 카톨릭 사제들이 병을 물리칠 때 십자가를 들이대요.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는 사라진채 십자가가 부적이 되고 오늘날은 십자가 악세사리에요. 악세사리, 부적 아니에요. 무당집에도 십자가가 있더래요. 아무거나 올리면 되는 랜덤한 종교아니잖아요. 오늘 이 말씀이, 우리 신앙 생활 속에, 첫째는 하나님께 더욱 붙들리는 삶. 의미는 사라진채 형식만 남은 신앙이 없는가. 돌아보는 복된 시간 되기 원합니다.
Genesis 4:3 (KRV)
: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세월이 지난 후에. 간과할 수 있어요. 도대체 무슨 세월이 지난 거냐. 1년이냐 30년이냐. 그런데 이 문장이, 정확히 해석되어야 제사의 전체 의미가 확연하게 들어옵니다. 세 토막으로 끊어 설명을 드릴게요. 세월은 욤 이라는 단어인데, 날입니다. 지난 은 캣츠 라는 단어인데, 심판과 종말에 연결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아주 엄중한 진리가 들어오는데, 예배를 설명하기 위해 쓰인 앞에 놓은 수식어. 어떤 날이 종말을 향해 끝을 향해 맞대어 있다구요. 정확히 이야기하기는, 농사를 지을 때 한 절기가 지난. 후에 라는 말은 결과가 나온다는 거에요. 양 치는 한 절기, 농사짓는 한 절기 후에 나오는 열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가장 중요한 아이덴티티가 예배자입니다. (!) 신자입니다. 성도입니다. 이것보다 더 본질적인 아이덴티티는 예배자입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의 인생을 하나의 제사로 보았어요. 딤후 4장에 보면, 전제와 같이 내가 부음이 되고. 길고 멀었던 제단에 드려지는 제물로 이해된 것입니다. 부음이 된 것은, 누구 죽었소, 통지 보내는 부임이 아니고, 전제라는 제사가 끝남을 알리는 혼주의 행위입니다. 붓다. 그러면 이 제사는 끝이 나요. 멀고 길었던 험했던 나의 인생을 하나로 제사로 보았을 때 그 제사가 끝이 난다 이말이죠. 느낌으로 바짝 바짝 숨통이 조여오는 것을 감옥에서 직감해요. 우리는 예배자로서, 가인과 아벨 처럼 중요한 정체성은 예배자에요. 창조의 목적도 동일합니다.
유형이든, 무형이든, 길고먼 예배자의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배의 끝이, 종말이 옵니다. 추수할 때가 온다고 성경에서 말합니다. 심판대에 섭니다. 부정적인 뜻 뿐 아니라 우리는 그 시간을 그리스도 앞에서 맞닥뜨리게 됩니다. 오늘 이 표현 속에는, 가인과 아벨의 예배가 단순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연결되는 드러난 한 모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들 각각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
Hebrews 11:4 (KRV)
Ephesians 2:8–9 (KRV)
1 John 3:12 (KRV)
: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아벨은 이런 믿음, 붙들리는 은혜가 있었어요. 더 자세히 보면,
: 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속지 말것은, 가인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살인자가 아니에요, 그가 악한 자에 속했기 때문에, 그 열매가 살인으로 드러난 것 뿐입니다. 이건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에요. (!) 신앙은 가장 중요한 기초가, 치성을 드리는 싸움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 이거에요. 과거에 우리는 다 가인에 속해있었어요. 그러나 그리스도안의 아벨. 아벨과 같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사망에서 생명의 자리로 우리를 옮기신 거에요. 그리스도로 접붙이신 거에요.
Genesis 4:8 (KRV)
: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매튜 헨리라는 학자가 설명하기를, 이 대목을 설명하기를,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위해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들로 데리고 나갔다 주석합니다. 정확히 맞습니다. 가인의 살인은 고의입니다. 과실이 아닙니다.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 고의적입니다. 더 무서운 것이, 쳐 죽인것입니다. 쳐 죽이니라. 이 문법이 놀랍게도 미완료형으로 되어있어요. 항상 무슨 시제를 내포합니까, 현재를 내포해요. 이 살인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거에요. 살인은 추억이 아니에요. 살인은 지금도 사망의 냄새를 뿜어내며 진행형이에요.
우리는 어떻게 아벨의 제사를 드릴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중보적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속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인의 자리에 있었어요. 사망의 냄새를 풍기는, 살인의 의도를 가진 가인의 자리에 있었어요.
혹시 감이 이상해서, 어느 교회 다니세요, 무슨무슨 교회. 조사를 해보니, 이단성이 있는 시비가 걸린 교회에요. 왜 이런 데를 다니세요? 두 가지를 얘기하세요. 그 교회 가면 너무 분위기가 좋대요. 그리구요? 또 그 교회 가면 밥을 맛있게 해준대요. 아하. 이 어른이, 그렇게 오랜 생활 예배당을 오셨지만, 십자가 앞에 가인으로 들통난 적이 없으시구나. 십자가에 제대로 못박히시지 못했구나. 연세가 있다고 되는 게 아니라 소속의 문제요, 생명의 문제입니다. 한번도 십자가 앞에서, 주님과 함께 내가 못박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들통난 적이 없어요. (!) 생명에 관한 싸움이에요, 교양과목이 아니에요. 가인의 역사와 셋의 역사로 갈라지는 것입니다. 나중에 아벨 대신에 셋을 주십니다.
전혀 상관 없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리스도의 예표인 아벨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바 되었다구요. 지성과 정성을 다 해야겠지만, 예배 때 나와서 내가 다시 한 번 십자가에 쾅 쾅 쾅 못박히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한번, 새날 살게 하신 그 감격, 내가 어쩌다 택함을 받고, 구원받은 은혜받은 존재가 되었는가, 예배자가 되었다는 것,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가인의 걸음으로 왔다가 아벨로 나갈 수 있도록 복된 예배자로 축복합니다.
Genesis 6:2 (KRV)
: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뭘 봤어요? 아름다움을 봤다. 토브. 긍정적으로 쓰여집니다. 보시기에 좋았다. 토브. 사람쪽에 쓰일 때는 부정적이 됩니다. 조금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매력을 보았다. 겉의 매력을 보았다.
요즘도 세상 안믿는 사람들은 사람만 건강하면 된다 하지만 뭔가 갖추었으면 좋겠고, 인상은 이랬으면 좋겠고, 믿는 쪽에 오면 어머니와 이구동성으로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들이대면, 좀 직장이 옳았으면 좋겠고, 키가 너무 작지 않아요? 사람이 살아서 존재했던 역사는 다 같습니다. 인생의 대사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것이 겉의 매력을 보았다는 거에요. 이 여인이 인격과 품격과 신앙의 성숙도가 되어있는가 를 보는 게 아니라, 그 겉의 매력을 보았다. (!후… 큰일날 뻔 했다)
(그래서 ff 가 참 필요하다…)
Genesis 6:8 (KRV)
: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을 한 절로 놀랍게 표현해냅니다. 은혜에요. (!)
우리는 그래서 은혜 입은 자들입니다. 이런 가사. 주 나의 모습 보네. 상한 나. 주사랑 나를 채우네. 그 은혜로 나를 세우나. 세상 소망 다 사라져가도 아깝다는 말이 아니에요. 이게 사라져야 은혜가 제대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아유. 이게 사라져야 십자가와 구속의 의미가 제대로 들어오게 된다 이말입니다. (!) 주의 사랑은 끝이 없으니. 그 주의 은혜임을 나는 믿네.
John 3:14-15
2 Corinthians 1:8–9 (NLT)
John 3 speaks of Nicodemus, Jesus says, just as Moses lifted up the snake in the desert, the Son of Man has to be lifted up, referring to his own cross. This was the life of suffering for Jesus. Unless you are born again, you cannot enter into the kingdom of God. This is basics of our faith. You die, you will live. Through the suffering and cross, we truly come to live. (!T T) It is foolishness to the world but we abide by.
: 8 We think you ought to know, dear brothers and sisters, about the trouble we went through in the province of Asia. We were crushed and overwhelmed beyond our ability to endure, and we thought we would never live through it. 9 In fact, we expected to die. But as a result, we stopped relying on ourselves and learned to rely only on God, who raises the dead.
From Apostle Paul, he’s describing intense situations. We felt the sentence of death every day. Tragic, full of suffering. Life of no peace, facing death every day. This kind of suffering really changes us. Time of suffering changes us in a good way or it can change us in a bad way. We can come closer to God or it hardens us. (!) There are so many sufferings that we cannot live like this and go on any longer. We close our hearts before God. We face crisis in our faith.
Isaiah 50:1–2 (NLT)
: This is what the Lord says: “Was your mother sent away because I divorced her? Did I sell you as slaves to my creditors? No, you were sold because of your sins. And your mother, too, was taken because of your sins. 2 Why was no one there when I came? Why didn’t anyone answer when I called? Is it because I have no power to rescue? No, that is not the reason! For I can speak to the sea and make it dry up! I can turn rivers into deserts covered with dying fish.
One famous pastor says there are four levels of fellowships you can have with another person. First level of fellowship is fellowship of sharing. Sharing testimonies and reflections, you get to know about each other. Relationship gets deeper. (!) Another level according to the pastor is fellowship of serving. Not that you are speaking but serving together, you grow deeper together. While you serve, you have different experiences together. There is deeper and deepest level of fellowship is suffering together. Deepest intimacy you can have with another person. Deepest kind of bond is formed through suffering together. Like, going through a war with someone. You are going through battle, trying to live and survive. You might not like the person next to you but because of suffering time, bond gets deeper. Trying to get through all the battles you become close.
How much more with God, through suffering, there is unity and deeper intimacy you can grow through it. It is an opportunity for us. In the place of suffering, we want to think of the heart of God. What is God feeling as I am going through difficult season of my life? God doesn’t want to make us suffer alone. If you are parents, you suffer when you see your children suffer. You suffer more looking at them. (!) God suffers more when we are in the difficult situation. We should think, if this bitter cup and cross comes to me, there must be a reason and a season why this came to me. Understanding the heart of God is faith we can set up in our dark season.
2 Corinthians 6:4–5 (NLT)
: 4 In everything we do, we show that we are true ministers of God. We patiently endure troubles and hardships and calamities of every kind. 5 We have been beaten, been put in prison, faced angry mobs, worked to exhaustion, endured sleepless nights, and gone without food.
This is Paul’s own experience. Who would want this kind of life? Where you are always chased and facing death always, hard pressed and experiencing difficulties? But this is just one side of Christians. There is the other side. It is the beautiful and noble side. Endurance. Keyword in Christian faith when it comes to faith. It is not simply that you let it pass or deal with it until it passes. True meaning of endurance is that you bear the situation to the point where situation changes you and situation changes. Even to the breaking point but you don’t break. You turn your pain into strength. Tribulation into power. It becomes your glory. That is what it means to have endurance. It turns us to God. This pain and situation bring us closer to God. (!)
Luke 14:26 (KRV)
: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부부가 신앙을 해요, 그 때 부딪히는 것이 있을 때 이 말씀이 온다. 나보다 주를 더 사랑하세요. 당신도 그렇게 하세요. 이게 이 가정은 놀라운 세계를 열어갈 수 있습니다. 잘못 가르치면 정말 오해받기 쉬워요.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과격하다? 파괴될 것은 파괴되어야지. 그걸 조금 해석해서 설명해 줘야 하지 않습니까. 더 큰 아름다운 것들을 만나기 위함이라. 지연 혈연을 떠나는 것. 버림은 얻음을 위함이다. 힘든 것이지만, 그것을 떠남이 더 큰 것을 얻기 위함이라.
미움이 어떤 경지냐. 극단적인 경지이죠. 그런 사람이, 가짜 중이 되었어. (!Weekly Review + Song record + Reading/ Film) 전력으로 헌신하지 못하고, 잇쇼 겟메이, 목숨을 다해서 살아가지 않아. 어떤 바둑의 천재가 쓴 책이 목숨을 두고 돌을 둔다. 어마어마한 사람이 되었어요. 기성. 세인트다. 이 수준이, 중이 나중에 유명한 스님이 되고 딸도 유명한 비구니가 되었습니다.
떠났어. 그런데 그것도 못 얻었어. 소금이 짠 맛을 잃었을 때 이렇죠. 우리 인생이 어떻게 살아야 하냐면, 축약적으로 여기 들어있습니다. 땡스기빙에 다 가. 근데 가지 않고 교회를 지키고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얻기 위해서 버리고 나왔는데 궁극적으로 얻지 못하도록 삶이 맞추어져 있다. 짠 맛을 잃은 거죠. 낭패다.
Luke 12:17 (NLT)
: 17 He said to himself, ‘What should I do? I don’t have room for all my crops.’
Dilemma. I have nowhere to store my crops. Storing for myself. This is his aim. It can be our aim and our goal. I can store it for myself. He has blessings. For the farmer to have more. But what to do with it when blessings come? When blessings flip to curse, what is the problem? Why good becomes bad? It can be our thoughts that need to change. (!All these riches that were given as blessings, if my thoughts are wrong and don’t change, it will become the curse. Same for how I think about the children.)
Luke 12:18–19 (NLT)
: 18Then he said, ‘I know! I’ll tear down my barns and build bigger ones. Then I’ll have room enough to store all my wheat and other goods. 19And I’ll sit back and say to myself, “My friend, you have enough stored away for years to come. Now take it easy! Eat, drink, and be merry!”’
Blessing will become even greater blessings. Why does it become something beneficial?
If he would transfer, he will get it. Even if the Lord asks his life tonight. You will go to where treasure is awaiting, isn’t it? Don’t you think so? (!) You still lack one thing. Give all your riches out to the poor. If you keep it for yourself, it is the end of all things, it is foolishness, it is not counting on God. We will be accounted after all.
There is a way to keep it in heaven. Keep it there. You are not transferring, you are going to lose it. Even yourself do not know who will get it.
There is another parable of heaven. You are the harvester and you who worked hard do not know who will be the harvest. Do you know who will get what you sowed and planted? You are fool if you think you can keep it. It is foolishness. You are so much focused on earth. You don’t think about eternity. We shall think we are on this pilgrimage. (!How foolish it is to build a mansion in White Plains? Just for little more gain for little more time.)
Luke 12:21 (NLT)
: 21 “Yes, a person is a fool to store up earthly wealth but not have a rich relationship with God.”
Let us not store up things for ourselves. We suffered a lot, we are more and more encouraged to pile up more things in heaven. Nothing to be sorrowful, but joyful. Treasure will be for yourself, you will have it in heaven. Lord said it. He encouraged the rich man to remain as rich man in heaven. He gave the solution. That is what rich man is worried about, actually. They are shaken like that right? Will I be rich tomorrow? In 2008, many rich man lost things. Some committed suicide because they suddenly became poor. Their lives were in possession. When possession disappears, they could not live. Never lose your life. Lord gave you the solution. I wish we can be those who can follow these teachings. Anyone who stored up things for himself but not rich towards God. (!)
Genesis 7:7 (KRV)
Deuteronomy 18:15 (KRV)
John 6:14 (KRV)
: 7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히브리어로 테바 입니다. 정확히 두 번 등장합니다. 창세기의 방주, 또 출애굽기에 등장합니다. 인용구절도 만나본적이 없는데. 모세의 어머니가 출산이후에 모든 히브리 남아를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집에 놓고 키우죠. 점점 성장하면서 울음소리가 더 나고 들켜서 살해될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결단합니다. 갈대상자를 만들어요. 정확하게 테바입니다.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역청을 바르죠. 강보에 싸서 그 갈대 상자에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일강에 띄워보내요.
우리도 절대 절명의 선택 앞에, 외통수에 걸릴 때, 방법이 없죠. 방법이 더이상 없을 때. 그 때는 나일 강에 던지는 거에요. 가끔 편지에 강물에 이 문제를 던졌다 이런 표현. 그럴 때가 많아요. 모세라는 의미는, 물에서 건짐을 입은 자 라는 뜻입니다.
: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찌니라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찌어다. 먼 산 넘어 등장할 한 사람을 가리키는 지향점, 표지판입니다. 그 자는 나와 같은 선지자. 너희 형제 중에서.
: 14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모세가 지적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는 신약의 예수님을 묘사한 거에요. 종합해보면 이런 그림입니다. 방주는,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거에요. (!om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