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 March 2019 Flashcards
1-3 verses daily, find a perfect time that works to continue meditating it throughout the day and compile that memory to retain many bible verses in my heart
Acts 15:6–11 (KRV)
제 1차 예루살렘 회의
: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7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8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9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10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이것으로 종지부를 찍습니다. 구원론의 큰 신학적인 결론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듣고 성령의 감동을 받고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목적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나 개인적으로 직면한 큰 위기. 뭘까요? 길 건너 통일교? 아니면 신천지?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우리의 위협은 안됩니다. 우리가 조심을 가지고 관심을 가지고 신경 써야 할 대상이지만 정말 한국 교회의 위기는, 어느새 우리도 인식하지 못한 가운데 들어와 토대를 마련하고 있는 세속주의와 맘모니즘 입니다. 가장 교묘한 위기에요. (!) 어느새 강단에서 전해지는 복음이 좋은 사람 만드는 복음이 되고 교양인 만드는 복음이 되었어요. (!)
어느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계신 분이, 어느 글에서 이런이야기. 페이스북에 돌아다니는 글을 읽어봤습니다. 오늘 날 교회는, 많은 성도들을 우매화시켰다. 처녀의 몸에서 생물학적으로 아기가 태어나는가.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어떻게 홍해가 갈라지고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느냐. 이러면서 한국 교회는 교양을 가르쳐야 한다.
설혹, 교양이 없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들이요, 그를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복음이 교양을 담고 있지만 교양이 없더라도 이것을 붙들어야 해요. 성공이라는 질주안에 복음 또한 합류해서 세속의 이익을 증진 시키는 하나의 수단과 도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건 복음이 아니죠. (!미국 유학과, 결혼과, 이 모든 사역의 자리들… ) 오랜 역사 속에 우리도 인지하지 못한 속에 이끼가 끼고 문화가 덮이고 지역교회 전통이 쉬워져서, 인간의 힘으로 두들겨 부서지지 않는 단단한 껍질을 형성하고 말았어요. 마틴 루터, 칼빈, 쯔윙글리 의 공통점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자 입니다. 카돌릭을 반대해서 개혁을 일으킨 게 아니에요, 본질은 말씀의 본질로 돌아가자 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맞이한, 하나의 멤버쉽을 가진 성도의 공동의 위기가 있다면, 이 알맹이인 예수는 제쳐두고, 우리의 이익과, 우리의 라이브한 삶을 도와주는 도우미밖에 안되는 거에요. 그 예수 때문에 살고, 그 예수가 나의 주인되신다는 고백은 구닥다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살고 싶지 않았다, 왜 사는지 몰랐다, 삶의 이유)
“만삭 되지 못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라는 표현은, 사도 중 꼴찌라는 것이에요. 그러나 사도는 사도라는 거에요. 한 단계 더 들어가서, 왜 당시에 사도라는 직임이 필요했을까. 두 가지 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과 신앙 고백에 의해 이 땅에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기 위해. 두번째는, 사도들을 통해 성령의 감동을 통해 신부의 매뉴얼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 사도는 단회적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 속사도니 신사도니 성경이 말하는 사도가 아닙니다. 더더군다나, 목사도 사도의 계승자가 아닙니다. 사도직의 계승자도 아닙니다. 그냥 목사입니다. 개념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 사도가 교회를 세웠다가 안되니까 다시 사도를 세우고, 성경 썼는데 안되니까 계속 또 성경 써야 되고, 아닙니다. 가르침 받고 목격한 자들을 통해 성경도 완성되었고 교회도 출범되었습니다. 다른 개념의 교회, 성경은 존재할 수 없죠. (그냥 열심히 하겠다는 것인데, 의미를 부여하고 그 사도의 정신을 계승하고 지키고 간다는 것인데, 좋은 것 아닌가.)
Galatians 1:6 (KRV)
: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어떻게 이렇게 명료하게 복음을 적어놓았나. 그리스도의 은혜로 복음을 듣고 부르심을 받은 자. (!) 복음의 주제입니다. 은혜와 율법의 출동. 대척점이 아니라 상호 관계입니다. 이게 잘못될 때 거짓 교사들이 슬쩍 들어와서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받는다 가르쳤지만, 잘못된 것입니다. 조금 달콤한 얘기를 해서, 복음을 쉽게 설명해서, 자기의 어눌한 언변을 커버하고 백성들을 사로잡기 위한 인기작전에 불과합니다. 바울을 공격하기 시작한 거에요. 이게 무슨 얘기냐면,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유대주의자들이, 구원을 그렇게 얻는 게 말이됩니까. 거기에다가, 모세로부터 강조되었던 전통적으로 중요한 할례를 받아야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쪽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까? 분별력이 아직 어린 성도들인데. 어쩐지 구원이 너무 쉽더라. 잘못 이해한 겁니다.
그러면 그렇지, 다 넘어갑니다. 이렇게 되니까, 갈라디아는 많은 혼란이 일어났어요. 누구말이 맞는 건가. 인사를 간단히 끝내고, 사도권이 왜 중요한가 설명을 하고, 그리스도 은혜로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배반자, 조폭자의 세계에서도 배신은 죽음이다. 영적으로 사실 맞아요. 떠남. 물리적인 얘기가 아니라 등돌리는 것. 이것이 최초 에덴 동산에서 벌어졌어요. 육일동안 천지 창조와 인간 창조를 하신 후, 아름다운 솜씨에 본인이 감탄하시며 심히 좋았더라. 모든 것으로부터 무오한 환경. 그런데 사단의 거짓말에 여자가 넘어지고 남자가 넘어집니다. 독립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관계가 끊어지게 되요.
성경의 죄에 대한 정의는 남의 것 훔치고 방탕하고 이렇게 말한 것 없습니다. 죄로 말미암은 증상들입니다. 성경이 정의하는 죄는, 관계개념이에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하며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이문제와 맞닥뜨려 피해갈 인류가 없습니다. 누구의 거짓말에, 사단의 거짓말에 속았어요. 주종목입니다. 생뚱맞은 거짓말로 하지않고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살짝 변개하여 말합니다. 정말 이 동산의 모든 실과를 먹지 말라 하더냐?
이단 이라는 것은 다를 이, 끝 단이에요. 끝이 달라요. 처음 이단은 교회라 그러고, 목사라 그러고, 성경공부 한다고 하고. 턱턱 넘어가요. 좋은 의미에서 성경공부한다 해서 초등, 중등, 고등, 다 거치고 일곱별을 들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압니까? 접니다. 이런식으로. 무얼 가지고 장난을 하냐면, 계시록의 은유적 문화적 표현이 있기 때문에 갖다 붙이면 몰라요. 분별 못하면 그 끝이 다른 것을 몰라요. (!)
하나님을 떠난 인류는 어떤 비참한 결과를 맞이했는가. 유명한 둘째 아들. 아버지가 살아있는데 유산을 요구해요. 유대법상, 신명기 상으로는 돌로쳐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산은 시퍼렇게 아버지가 살아있는데 내 몫을 달라, 왠걸, 줍니다. 좋아라 챙겨서 어디로 가냐면, 유대 땅을 벗어나서 절연을 각오하고 돌아올 생각 없이 푸른 꿈을 향해서 갑니다. 이걸로 내가 온 세상을 휘어잡아 보리라. 떠나면서부터 나타난 현상, 핍절, 고난, 가난, 방탕이 찾아옵니다. 나중에 다 거덜나고, 심지어는 가장 유대인이 혐오했던 그 돼지의 열매를 먹고 생활해요. 그리고 죽게 됩니다. 자기 심정이, 내가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그제서야, 어떤 자각이 올라오냐면, 아버지 의 집으로. 내가 여기서 미쳤지, 우리 아버지 의 집에는 종들도 좋은신발도 좋은 것도 먹는데, 지금 기가막히게 돼지와 같이 먹고, 돼지같은 생활을 하는데, 죽을 각오로 일어나 가는데, 상거가 아직 먼데, 아버지가 달려요. 반가워서 달려가서 아들을 얼싸안아버립니다. 혹이라도 동네 사람 눈에 먼저 띄어서 율법으로 돌무덤 일을 당할까봐 다 털어놓고 돌아오는 아들을, 아무도 손 못대, 안아버리고, 회복되고, 잔치 벌이고 풍악을 울려라. 잘먹고 잘살게 된다. 이런 말이 아니에요. 회복이고 회개에요.
Galatians 1:7 (KRV)
: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결국 오늘 주제는, 다른 복음은 없다. 기독교는, 내 안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부추겨서 개선하고 증진시키고자 하는 것이 기독교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종교들이 하는 내용입니다. 착한 사람되라. 좋은 일해야 복받는다. 그러나 기독교의 초점은 철저하게 로마서에서 봤듯이, 율법의 잣대를 들이대면, 인간이 누구냐에 대한 실력이 드러나고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눈 떠졌어요. 죄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죄인지도 몰랐던 상황. 택함 받은 자의 은혜는 뭘까요, 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대속의 은혜가 필요하다. 율법을 통해 깨닫는 거에요.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있구나. 그러나 오늘날 강단마다 위기가 있다면, 교회 재정? 숫자? 그게 위기가 아니에요. 강단이, 전해지는 복음이 너무 나이스해지는 거에요. 복잡하고 스트레스 받는데 당신은 죄인입니다. 이거 다 싫어하고 거북해요. (!) 혹자가, 저 형제 믿음 좋다. 그 판단 기준이 뭡니까. 머릿속에 한 두명 떠올려보세요. 어떤 면이 신앙이 믿음이 좋은 것입니까. 일반적인 잣대를 열거해볼까요. 주일 예배 안빠지고, 새벽 예배 안빠지고, 십일조, 선교 다 따라가고. 신앙이 좋음을 부분적으로 가늠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적어도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좋고 나쁨의 근거는,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값을 대신하여 죽으셔야 하는가. 누가 죽었어야 할 자리인가. 나는 어떤 은혜를 입고 있는가 이 정면으로 통과한 사람은 두가지에요. 첫째 세상에 대한 이해가 달라집니다. 둘째 인간의 이해가 달라집니다.
용서못하고 부르르 떠는 일이 점점 사그러집니다. 너나 나나 긍휼이 필요한 존재이구나. 눈과 마음이 바뀝니다. (!) 십자가의 사건을 제대로 통과치 않은 심령은, 자꾸 의도와 시도가 올라오는게, 그래도 난 너보다 나. 파렴치한 죄인들 뉴스에서 하는 행동에 치 떨죠. 그럴 필요없어요. 통탄은 하지만, 나도, 하나님 부름 앞에 서지 못했다면 뭐가 달랐을까. 죄의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점에서는 차이 없어요. 배울 수록 똑똑할 수록, 죄만 똑똑하게 짓고 죄만 교묘하게 짓습니다. (!) 굿 윌 스토어라는 교회 가게에 방문했어요. 한 20명 남짓 지능이 떨어지는 장애아이들과 일반 직원이 어울려서 운영합니다. 폐품들 다 가져와서 기증한 물건들 닦고 수선해서 장사합니다. 매출이 꽤 있더라구요. 아이들이 기본 생활비 받고 하루종일 나와서 일하며 공동체에서 생활해 나갑니다. 목사님은, 시애틀에서 10년이상 머물러 계시면서 공부를 많이 하셨어요. 아이들과 아침마다 큐티 하신대요. 가능하시냐고. 모르시는 말씀, 너무 은혜롭습니다. 저마다 적용할 수 있는 대화를 나눈답니다. 아이들은 매번,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과일을 좋아하실까. 둘러앉아서. 한 아이가,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다가, 감을 좋아하실 거 같아요. 감이 색깔이 이뻐서 그렇대요. 그럴 수도 있겠다. 은둥이는 아냐 하나님은 포도를 좋아하실 것 같아. 예수님이 첫 기적을 그 포도로 포도주만드셨기 때문에. 그런 쪽은 말이 안되죠. 아이들의 심령의 눈에 비친 그들의 세계는 정말 말 그대로 천사들이라는 거라는 겁니다. 그렇게 깨끗할 수 없대요. 복잡한 비지니스 현장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들은 주판을 놓아야 하고 실익을 따지며 두들겨지고 있습니까. 심지어는 친구들 마저도 일등급, 이등급 서열이 매겨지는 서글픈 세상에서 삽니다. 인간이 내뱉는 이땅의 냄새들입니다.
Galatians 1:10 (KRV)
: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1차 전도여행에서 이고니온에서 거의 죽다가 쫓겨나서 루스드라로 가요.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장애자를 권능으로 일으킵니다. 갑자기 바울을 죽이려다가 신이 강림했다 해서 바울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려고 합니다. 말려요. 나는 하나님의 종일 뿐이다. 하나님께만 제사하라. 계속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 때 이고니온에서 일당들이 쫓아와서 거의 매맞아 죽을 뻔 하는 경험을 하는데 그것을 상기시키는 거죠. 그 때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려면 경배받았다. 내가 죽을지언정, 예수그리스도가 구주이시며 속박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신다. 그 일을 내가 쉬지 않는다.
오늘 성도들이 모든 강단 마다 다시 들어야 할 복음,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그 십자가는 적어도 나에게 어떤 사건으로 해석되어 오는가. 이 시대가, 한국 교회가, 청년들이, 십자가앞에서 다시 한 번 우리 인생이 해석되는 축복이 있기 원합니다.
Galatians 1:11-12 (KRV)
: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 때 작용하는 게 믿음의 원리인데, 자기 신념, 경험, 확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능력과, 자비, 우리를 사랑하시는 속성에 운명을 거는 태도를 말합니다. (!) 좌고 우고 없이 그냥 가는거에요. 인간적으로는 실수와 실패될 수 있죠,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그 전능하신 능력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능력이어서, 우리의 실수와 실패를 넘고 넘어서 궁극적으로 누구의 선이 이루어지냐면, 하나님의 선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하나님의 토브. 그 선이 이루어집니다. 내가 실패하면 실수하면 그 선이 포기가 되고 이게 아닙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리가면 성공하고 저리가면 실패하는 선택은 없어요. (!) 그분의 성품과 인격과 사랑을 믿고 그분께 맡기고 갈 때, 그 삶은 절대 취소되거나 실패할 수 없는 삶이 되는 거죠. (!) 믿습니까.
자유의 대헌장. 복음의 진수 중 진수. 복음이 갖는 위대한 책, 갈라디아서가 탄생합니다. 흔들리는 백성 때문에. 꽃도 흔들려야 그 가운데 뿌리가 견고히 내리듯이. 바람이 불어야, 뿌리는 반작용에 의해서 땅밑으로 강하게 뿌리에 힘을 주고 땅 밑으로 뻗게 되어있습니다. 바람이 의미없고 쓸모없는 게 아니죠. (!) 이 흔들리는 성도들을 향해서, 복음을 담은 자로서, 먼저 받은 자로서, 일관성있게 준엄한 꾸짖음이나 배신감을 표현하지 않고 형제들아. 따뜻하게 맞이하고 있어요.
: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종교의 핵심으로 들어가보면 공통점이 있는데 사람이 고안하고 창안하고 깨달은 것을 집대성하여 신학을 만들어서 그것을 숭상하고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제가 오래전에, 살던 집 옆에 개운사라는 절이 있었어요. 안암동에. 거기에는 소위 불교 신학생들이 기숙하는 기숙사가 있었어요. 자주 마당에 들어가서 놀기도하고 했는데, 이 스님들이 참 착해요. 성품도 훨씬 너그럽고. 이런 저런 대화를 하다보면. 이들이 재밌는 얘기를 합니다. 불교의 끝은 뭐냐. 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에요. 이걸 결국 깨다는 것이 불교의 가치고 지향점이라는 것이죠. 무 이렇게 하고 죽은 스님도 있어요. 얼마나 허무해요. 맞아요. 인간의 끝이너무 허무해요. 그리스도 만나기전에는. (!)
다른 종교의 체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설계할 때는, 하나님 안에서 머물러 있을 때만 행복하고 온전하고 안전하도록 설계를 했습니다. 그러나, 에덴의 죄가 들어오고,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교만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관계의 문제가 생기고 깨졌어요. 이 때부터 인간은 맹아적 상태,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빠진 것입니다. 아직 창조의 질서 속에 흔적이 남아서, 눈감긴 상태에서 그들은 영원하려는 욕망때문에 길을 찾기 시작합니다. 여기가면 길 있을까, 영원과 생명이 있을까, 더듬 거리다가 만든 게 여타 종교들이에요. (!) 학문적으로 체계를 이루어서 나름 종교가 된 것이죠. 그러나 인간이 깨닫고 고안해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전했던 복음은, 출처와 근거가 뭐냐.
Galatians 1:12 (KRV):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Acts 22:6-8 (KRV)
바울의 회심 이야기
6 가는데 다메섹에 가까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서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취매 7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가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8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초자연적인 계시로 예수님을 만납니다. 처음으로 나왔던 질문이, 주님은 누구십니까? 청년 여러분,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시간, 내 어깨의 모든 직함, 신앙의 세월, 이 견장을 다 내려놓고 정직하게 낯설게 물어야 합니다. 주님은 누구십니까? (!) 누구십니까. 꿈에도. 자신의 지난 삶이 틀렸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울이,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의 예수니라. 척박하고 가난한 그늘진 외진 동네입니다. 누구도 그런 동네에서 메시아가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말을 타고 철권 정치를 휘두르는 로마의 세력을 단숨에 제압할 수 있는 위풍당당한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어떻게 그 메시아가, 가장 저주의 현상이라고 소개되었던 나무 위에 달려죽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다마스커스의 계시를 통해, 오랜 수천년의 역사를 넘어, 인류가 고대하며 기다리던 메시아가 예수라는 사실과 사울의 인식 한복판에서 만남이 이루어지는 거에요. 그제서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
그가 걸으셨던 골고다의 길로, 주님의 길로, 언제나 앞서가시며. 나를 따라오너라.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꿈안에서… 예수님이셨다.) 어쩌면 신천지, 공산주의, 좌편향, 이런 의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진짜 교회 위기가 있다면, 우리도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들어와있는 유사복음, 다른 복음입니다. 복음이랑 비슷한 게 아니라 복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얼마나 많이 들어와서 성경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본의를 밀어내고. 비본질적인 복음이 교회의 중심이 되어있고,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거에요.
요즘, 저녁마다 청년들과 요한 계시록 강의를 합니다. 지난 주부터. 소아시아 일곱개 교회. 첫째가 에베소 교회입니다. 거기에 지적했던 책망이 첫사랑을 회복하라. (!) 일반적인 사랑이 아니에요. 진리가 말하는 십자가 사랑입니다. 유난히, 진리에 열심이었던 교회가 에베소 교회입니다. 그곳 목회를 끝내고 강변에서 눈물의 작별을 할 때 내가 떠나면 이리떼가 올것이다. 에베소 장로들과 성도들은, 진리를 검증하고 진리를 가늠하는데 무척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다 그만, 핵심인 사랑을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사랑하라고 가르쳐준 진리가, 상대방을 칼질하고 죽이고 선혈이 흐르는 피바다가 되었어요. 옳고 그른 것 따지다가 사랑을 놓치고 말았어요. 본질을 놓고 비 본질의 싸움에 시달렸어요. 전선이 바뀐 것입니다. (!) 교회는 아이를 가지자는 거에요. 나누어서 반씩 갖자는 거에요. 그 정의가 중요합니까, 아이를 살리는 생명과 사랑이 중요합니까.
Acts 22:9–10 (KRV)
: 9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10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정한 바 너의 모든 행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이 두 질문을 뒤집어서 바울은 살았어요.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른채 자기 의를 드러내며 경주하고 달리며 씨름했어요. 그런데, 이 다메섹 언덕의 계시의 사건을 통해서, 자기가 박해하던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 앞에 눈이 열어지면서, 그러면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두번째 질문에 왜 웃었을까요. 지금까지 옳은 줄 알고 뛰고 달렸다는 삶이 다 틀렸구나 이것을 고백하는 거에요. 다 배설물로 여겼다. 해로 여겼다. 그럼 주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옳습니까? 인생은 60부터가 아니고, 십자가서부터입니다. 십자가를 통과치 않은 인생은 사실 가짜 인생이에요. (!?)
어제 인터넷을 통해, 끔찍한 뉴스 보셨나요? 우리 교단이에요. 교회 안에 칼부림이 일어나고, 성직자가, 한숨을 넘어서 사망의 그림자, 썩은 냄새가 온 땅에 진동하는 이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바울이, 로마 교회를 향해 붓을 들었던 중요한 동기는 무엇입니까. 세속화 된 로마 교회. 길고 긴 환란 속에 무너지는 그곳에 다시 복음을 들어야겠다. 그 동기입니다. 다시 복음을 들어야겠다. 아무리 칠흑같은 역사속에 내밀려졌다 할지라도, 방법은 있습니다. (!) 다시 복음 앞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입니다. 모든 세속의 때를 드러내고, 비본질적인 것들을 다 드러내고, 지금도 십자가 내 죄를 위해 죽으신 흐르는 그 선혈이,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다 적셔서 다시 복음 앞에 설 수 있다면. 일흔 일곱번 용서하라는 예수님께서 용서해주시리라 믿습니다. (!)
두 가지 질문에 정직히 통과할 수 있는 여러분 될 수 있기 바랍니다. 주님 누구십니까? 내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Galatians 1:17–18 (KRV)
2 Corinthians 11:32–33 (KRV)
: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쌔
오늘 설교 제목이 무엇인지 보셨습니까? 아라비아의 시간입니다. 한 때 이렇게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적이 있어요. 사도바울은 거듭 난 이후에 저 시나이 반도, 시내산이라고 하죠, 아라비아 광야에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하나님과 유일하게 계시를 받으며 독대로 깊은 정리가 좀 필요했을 것이다. 본격적인 복음 전파를 위해 3년간 수련을 쌓았다. 마치 모세와 엘리야 처럼. 굉장히 의미도 강하고 설득력있죠. (!) 이렇게 해석하면 피차 문제가 없어요. 이런 패턴으로 히든 타임. 왜 필요한가. 설교하기도 했고 저도 이해를 가졌던 적이 있어요.
: 32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쌔 33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지금 자기에 대한 눈초리, 광주리를 타고 도망갈정도로 수많은 위험 속에 바울은 놀랍게도 다메섹 언덕에서 회개와 부르심이 동시에 내면에 일어난 독특한 인물입니다. (!)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즉각 도성에 들어가서 순종했다는 데에 초점이 있어요. (!) 하나님의 마음이요. 무엇을 향한. 복음 들어가지 않는 땅에, 죽어가는 그 땅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바울의 부름속에 그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1차, 2차, 3차 여행을 연구해보면, 계속 쫓겨다니고 떠밀려 다닙니다. 도망다닙니다. 그곳마다 교회가 설립되고 복음이 들어가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때 그 시대를 향한. (!) 중요한 한 사실. 교회가 욕 먹는 정도가 아니라 혐오되어요.
1년에 넉달 선교하는 교회. 자비량으로 헌신다해 선교합니다. 칭찬할 만 하죠. 그러나, 1년 열두달, 365일, 더 크게, 지구촌 곳곳에, 복음을 듣지 못하는 땅으로, 예수님이 눈물을 뚝뚝 흘리시는 그 땅으로, 어떤 욕과 위험을 감당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현장에서 떠나야 하고, 대한민국 교회가 땅끝까지 가라는 복음앞에 눈 뜰 때, 우리는 썩고 부패할 여지가 없어요. (!) 고여있으니까 흐르지 않으니까 몰려있으니까 썩어요. (!) 가야 합니다. 일년 넉달이 아니라 일년 삼백육십오일, 그 명령앞에, 화급한 마음으로 복음의 횃불을 들고 미덕과 교양을 뛰어넘어 복음의 전령자들이 되도록 여러분의 남은 인생 되도록 축복합니다. (정말 바로 선교시작했기에 야샨 같은 사람을 만난 게 아닌가)
Galatians 2:1 (KRV)
: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바울의 즉석 회심 그리고 사명을 받는데 누가 믿겠어요? 전향한 간첩. 명단 파악해서 결정적인 디데이 때 집어넣으려고 위장 전향한 것 아닐까? 명예와 신앙을 무릅쓰고 바나바가 이 사람을 추천합니다. 걱정 마십시요. 이분의 회심은 진정 하나님의 역사요, 하나님의 부름입니다. 이 사울을 받읍시다. 바나바도 오해 소지를 받을 수 있는 위험한 일입니다. 원래 위로를 잘 하는 사람이니까 그랬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지시에 근거한 행동이었습니다. 원래 fighter 스타일이 아니에요. 담대한 것은 기질 적인 게 아닙니다. (!) 혈기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것인가, 순종과 고난과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빛나는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바나바가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때, 과부와 고아들이 다 모여들었습니다. 매겨야 하는데, 돈이 없어요. 뻔해요 살림 살이가. 그 상황을 파악하고 제일 먼저, 밭을 다 팔아요. 부동산 있던 것 청산해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둡니다. 이거 지금 사람들 굶고 있는데 쓰십시다. 온 교회 분위기가 바나바만 나타나면 바나바 바나바 이렇게 된 거에요. 송태근이 같으면 어때요, 어깨에 후까시가 들어가고 으쓱해지고, 그럴 수 있어요. 그런데, 바나바는 참 겸손했어요. 행 28장까지 보면 재밌는 흐름 하나가, 13장 이전까지는 이름이 바나바와 바울이. 그런데 후반에는 뒤집어져요. 바울과 바나바가. 뭘 얘기하고 싶은가요. 나중에는 아예 슬그머니 사라집니다. 리더는 세 가지 연습해라. 희미해지는 연습, 사라지는 연습, 작아지는 연습. 리더라는 자리는 가만히 있어도 영향력이 생기는 자리에요. 교회 공동체에서 그렇게 되서는 절대 안됩니다. 시대적 역할, 사라질 역할, 사라질 시간도 알았어요. 슬그머니 없어집니다. (!) 오늘날 복음이 흐르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거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바울이 혼자 된 바울이 아니에요.
선교하다가 그레데 성에 복음을 전해요. 일당백이에요. 모두가 머리를 흔들며. 거기는 안가. 바울이 또 고민해요. 디도야, 예 선생님. 내가 왜 불렀는지 알지? 그럼요. 네가 여기 남아야겠다. 외로운 현장에 떨궈뜨립니다. 그렇게 가기 싫어하고 맡기 싫어하는 일이 있다면, 시켜야 하는 입장에 있을 때 아무나 시키겠습니까, 감당할 만한 사람 시키겠어요. 그 이치를 현실에 대입시켜보세요. 어떤 자매님은, 이런 집구석으로 내가 팔자가 세서. 그분이 감당할 만하니까 거기로 보낸 거에요. 그러고 보니 웃음이 나죠. 직장도 마찬가지. 부장이 나를 미워하나봐. 그러면 직장인에 불과해요. 아 일을 하나님이 나에게 맡겼나보다. 피하고 싶은 일이니까. 이게 일터의 일이지만 하나님의 사명이 됩니다. 선교적 제자가 그거에요. (!누가 내 자리에 있고 싶겠는가. 하나님이 나를 보냈다. 나를. 이곳에. 이 아픔에. 험한 일을 겪는 이곳에.)
Galatians 2:3 (KRV)
Acts 16:2–3 (KRV)
: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쌔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고린도 전서에 보면, 고리도 교회에 제일 심각했던 문제중 하나가 우상 제단에 바쳐졌던고기가 시장에 유통이 됩니다. 시장에서 파는 고기가 누구라도 알아요. 우상제물로서 드려졌던 고기라는 것. 바울이 난 그고기를 먹을 수 있다 해요. 고기 자체는 악도 선도 아니에요. 우상은 그리스도에게는 사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어요. 우상은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난 그 고기 아무 양심에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냐면 고린도에서 바울 생각 처럼 난 그 고기 양심의 자유를 가지고 먹을 수 있다. 신앙이 강한 쪽이에요. 반대쪽은 뭐냐면 어떻게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먹어, 자유치 못한 신앙이 약한 사람이 구분됩니다. 약한 것은 강한 쪽에서 만든 개념이에요. 어린 사람들… 그것에 하나 자유치 못하고 쯧쯧쯧. 강하다고 자부하는 이 사람들을 향해 약한 자들은, 뭐라고 생각할까요? 방종주의자들. 분위기가 딱 나뉘어집니다. 그 문제를 듣고 사도바울이 편지를 쓰며,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네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나는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먹는 자유때문에 약하다고 구분되어진 그 사람들이 넘어져 실족된다면 나는 고기 안먹는 규례를 지키겠다. 이게 자유에요. (!) 그리스도인들의 자유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라는 자유가 아니라, 할 수 있지만 형제의 덕과 사랑을 위해서 나는 안하겠다. 이게 진짜 자유의 완성이라는 거죠.
디도의 경우에는 한 지역과 한 교회를 책임질 목회자로서 이후의 시비의 개연성 때문에 딱 막았어요. 디모데의 경우에는 왜 그럼? 복음을 전파하는데, 할례 문제가 사소한 시비거리가 되어서 궁극적으로 복음의 전파지로 가는 데 어려움 겪을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명령한 것입니다.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는 거에요. 어떤 경우는 해야하고. 어떤 경우는 안해야 한다. 어렵죠? 결국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기준은 형제 사랑입니다. (!) 그게 없이는 방임 방탕으로 흐르게 됩니다. (!내가 집 가지고 차 두대 가질 수 있지만 이것이 내 형제를 시험들게 한다면, 나는 안 그러겠다 할 수 있어도.)
Galatians 2:10 (KRV)
: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좀 생뚱맞은, 자연스럽지 못한 문장같아요. 신학적 문제가 해결되고 이런 거 나와요. 교회 헌금 좀 하라는 걸까요? 예루살렘에 큰 기근으로 어려워졌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방 교회가 헌금을 모아서 바나바와 바울에게 헌금 전달을 부탁해요.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름 두달 겨울 두달 나갈 때마다 천원 헌금을 모아서 현지에 가서 연계교회를 도와주고, 어깨동무 사역으로 미자립 교회들을돕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재정이 있고 교회가 크니까 구제차원에서 돕는 걸까요? 구제하는 것은 절대 그런 개념 아니에요. (!) 왜 갑자기 구제가 등장하냐면, 이제는 너희와 우리가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주잇ㅁ으로 한 지체요 한 몸이니 복음의 열매를 공유하고 나누늑서이라는 메세지에요. 약한자가 도움을 받고 넉넉한 자가 도와주는 단순한 공식이 아니라 나눔과 공유와, 그리스도의 몸과 한 지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열매를 나누는 것… 내것이 너것이요, 우리는 한 몸입니다.)
Galatians 2:11–12 (KRV)
1 Timothy 5:20 (KRV)
: 11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12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 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 하게 하라
모두가 다 본 거에요. (!) 역시 저들의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구나. 우리 하나님도 다른 하나님이어야겠다. 자칫하면 역사적으로 두 종류의 교회가 생기기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공개적으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책망한 것입니다. 새카만 후배이지만. 쓸데없어 보이지만 베드로의 반응이 전혀 안나타나요. 야, 너 공개적으로 뭐하자는 거야? 베드로후서 3장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2 Peter 3:15 (KRV)
: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불쾌한 감정이 있어요? 앙금도 없습니다. 매우 중요한 사실은 책망을 바르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입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도 동시에 중요합니다. 신앙이나 연륜에서 교회 위치에서도 대선배인데 그 책망을 잘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 간과해서는 안되는 또 하나 사실.
Galatians 3:28 (KRV)
: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지식인들만 다니는 교회, 잘못된 교회입니다. (!리디머) 있는 사람들만 모이는 교회. 아닙니다. (!릭워렌) 교만한 벽입니다. 게바가 넘어진 가장 넘어진 이유는 왜 복음의 내용과 행동이 달라야했는가, 왜 외식에 빠져야했는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했기 때문에.
제일 중요한 가치, 교회의, 화평입니다. 옳고 그름보다 화평의 가치입니다. 옳고그름이라는 것은, 본질적인 옳고 그름이 아니라 비본질적인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자. 한 예로, 목사가 양복을 입고 설교하는 게 맞냐, 가운을 착용하고 설교하는 게 맞냐. 교인들이, 양복도 제대로 못입는데 가운입어라 하면 가운 입는 거에요. 그걸로 옳으냐 틀리냐 시비에 말릴 필요없다는 거죠. 화평보다 더 우선적인 가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화평을 위해 진리를 놓는 역사가 있습니다. 슬픈 것입니다. 화평을 뒤로하고라도 진리는 양보할 수 없어야 합니다. 선배들은 그렇게 목숨을 걸고 진리를 지켜왔습니다. 화평이 잘못된 우상이 되어서 진리를 양보할 수 없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다 그런 화평은 없습니다.
Genesis 15:5-6 (KRV)
Romans 3:20-22 (KRV)
: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자손. 오실 예수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방 땅의 우상을 섬기던 불신자를 택해서 부르세요. 지금부터 아브람을 설득해 나가세요. 믿음의 정의는, 우리의 논리와 이성으로 깨달아진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설명, 하나님의 설득, 하나님의 약속이 근거된 것입니다. 아브람을 택하셨는데 그의 행보가 끊임없이 불순종을 해요. 고민 한 마디 없이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아내를 애굽의 왕에게 거의 팔아넘깁니다. 아주 비열한 남자. 무슨 믿음의 조상이에요. 끊임없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혈통을 이어갈 사람들도 다윗왕 무슨 짓 하죠? 예수님이 그를 통해서 오시는데. (!) 최고의 절정기에 살인과 간음을 저지릅니다. 게다가 유다는, 자기 며느리와 불륜으로 생산을 해내요. 아브람의 후손들이 역사에 토해낸 구정물들이에요. 어디 한 군데, 아브라함 얘 안되겠다. 딴 혈통 좀 찾아봐야겠다. 이러셨나요? 또 고쳐서 넘어가고 또 고쳐서 넘어가고 계속 인간의 비겁함, 비열함, 거짓말, 불신을 뚫고 뚫고 뚫어서 결국에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나십니다. (!)
: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믿음이라는 처음 단어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을 의로 여겼다. 믿음과 의가 등장합니다. 의 는 법적 용어에요. justification. 아브람이 처음으로 믿었다 라는 표현을 써요. 이 믿었다는 믿음이 출처와 근거가 아브라함속에서 깨달아지고 만들어집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설득과 약속에 근거합니까. 후자이죠. 여기까지 쉽게 이해합니다. 결국 우리가 믿는 믿음도 나를 여기까지 설득하고 이끌어오신 결과 이지. (!)
: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누구를 가리킨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여인. 여인의 몸에서 난 자손. 그리스도의 오심을 의미합니다. 우리 안에서는 개선될 여지가 없어요. 율법이라는 잣대로 보면 사망이 당연한 결과에요. 새롭게 창조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동정녀를 통해 오셨습니다.
: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믿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신실함. 아버지의 계획과 그의 약속하심이 어떻게 드러나실 것인가 믿는 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지에 이르게 하고야 말거라는 것을 그리스도는 아신다구요. 우리의 믿음은, 그분의 신실하심과 사랑과 약속에 근거된 믿음이에요. 내가 믿는 게 아니라는 거죠. (!) 우리는 그냥 그것을 수납하고 순종하는 일 밖에 없어요. 광야의 놋뱀. 그 뱀을 볼 때 살아요. 십자가에 죽으실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