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 July 2019 Flashcards
Joshua 1:8 (KRV)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먼저 영적인 책이죠, 성경이. 풍성한 하나님의 표정을 놓치지 않으려면 상식적으로 읽는 버릇이 있어야 합니다. (!) 멀쩡한 사람에게 두려워하지마, 강하고 담대해. 그럼 화나겠죠? 지금 여호수아가 두려워한다는 거에요.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문제 앖에 연약함과 두려움이 있었고 힘든 부분이 있었구나. 성경은 인간의 의지에 초점을 맞춘 책도 아니고 본받아라 하는 위인전도 아닙니다. 초라하고 부족한 이들과 방불한 인간을 어떻게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드러내는 책입니다. 성경을 용전으로 전락시키면 안됩니다.
두려움, 연약함, 불순종, 형편없는 바보같은 모습을 얼마든지 드러냈습니다. 과연 여호수아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연약함은 무엇이었을까.
여호수아 하면 투철한 군인상이 떠오릅니다. 장군의 이미지와 함께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자 하는. 시중에 있는 설교를 들어보면 여호수아를 리더쉽의 교본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리더쉽의 내용으로 소개한 부분이 없어요. 뜻밖에 불안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두번째는 가나안 = 천국 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어요. 이게 맞다면 전쟁이 있어야 할까요? 들어가자마자 싸움판이거든요. 가나안은 천국의 모델이 아니에요. 가나안이라는 정확한 해석을 존 리치라는 분이 쓴 작은 소책자를 통해 지역과 의미에 대해 썼습니다. 천국의 모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순종해가는가 라는 싸움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이미 아브라함적부터 주신 땅입니다. 점령이 아니라 순종해서 얻는 땅입니다. 점령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 선교도 그런 식으로 이해합니다. (!) 이미 언약으로 주신 땅입니다. 얼마나 순종하는지 드러내는 책입니다. 리더십이 아니라 순종에 관한 책입니다.
Joshua 1:1 (KRV)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다
Deuteronomy 34:7 (KRV)
1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모세가 누굽니까. 이스라엘의 아버지같은 존재에요. 저희들이 대학다닐 때, 1-2학년 때, 12.6 사태가 일어났어요. 부하가 대통령을 저격하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어요. 권자가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나라가 절단나는 것 처럼 생각했어요. 국민이 받았던 충격은,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그 이상입니다. 모세가 죽었어요. 시름시름 앓다가 죽은 사람이 아니라 갑자기 죽었어요.
신명기 34장을 봅시다.
7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건강한데 그런데 왜 죽어요? 갑자기 죽은 거에요. 그의 임무가 다하였기에 하나님께서 데려가셨어요. 2인자인 여호수아의 입장에서는 졸지에 황당한 일을 당한 겁니다. 백성들과 여호수아를 흔들었던 근본적 두려움. 이거 어떡하나. 모세의 처절한 고통을 여호수아만큼 같이 한 사람이 없어요. 이 백성들의 못되고 악한 모습을 참모로서 같이 주욱 지켜보았습니다. 돌멩이 던져서 협박하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가장 근거리에서 겪었던 사람이 여호수아입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모세가, 내가 백성들을 낳았습니까? 왜 나한테 맡겨서 생고생 시킵니까? 나를 데려가 주십시요. 이 백성의 완악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요. 모세는 죽었어요. 갑자기 떠났어요. 백성들은 덩그러니 남아있습니다. 가나안 일곱 족속이 철옹성으로 지키고 있는 호락호락 하지 안하요. 범인일진대 두려웠을 것입니다.
청년들도, 졸업은 앞두고 있는데 스펙이 있나, 집안에 백이 있나, 학교가 번듯하나, 미래가 잘 안보여요. 30-40대는 아래 위로 치이는 세대입니다. 애들은 커가죠. 나이는 급속히먹죠.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죠. (!) 이럴 때, 여호수아같지 않겠어요?
Joshua 1:3 (KRV)
Joshua 1:8 (KRV)
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들어갔어요? 안들어갔어요. 시제는 완료형으로 되어있어요. 미래완료형 시제라고 신학에서 말합니다. 성경에 많아요. 반드시 언제 주로 쓰여졌냐면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이건 확실히 된 것과 같은 상황일 때. 아무 진척 없고 시작된 것 없지만. 하나님 언약으로 된 것과 같을 때. 강조하는 차원에서. 이 미래 완료형 시제를 씁니다. 지금 이 땅은 점령일 뿐 아니라 들어가지도 않았어요. 아직 진입도 안했는데 줬대요. 될 일입니까 될수도 안될수도 있는 일입니까? 이런 미래 완료적 시제는 반드시 됩니다. 누구의 기도나 예언을 붙드는 게 아니라 기록된 언약을 붙들어야 해요. (!어떻게 이런 것 성경에서 찾죠? 우리에 나에 우리 교회에 관한 예언이 성경이 있을까요?)
하나님, 이거 말씀하셨잖아요. 표현이 거시기 하지만 그러면 끝나요. 하나님 이것 약속하신 것 아닙니까? (!나는 약속 많이 했는데. 하나님은 말씀 통해서 약속하시니까) 보복이 두려워 붙잡혀 있을 때, 재공격해서 덮치면 어떡하지, 아브라함이 위협속에서 두려워할 때 밖으로 데려나가십니다. 하늘에 별 보이지, 예, 네 민족이 저렇게 될 것이다. 바다의 모래알, 네 민족이 그렇게 될 것이다. 정작 자식도 없었어요. 그렇게 약속하십니다. 기가막혀하니까 사인을 보이시기를 고기 사이로 횃불이 지나가게 하면서 계약서에 도장찍듯이 확실히 하세요. 하나님은 역사의 행위를 약속과 언약을 통해 진행하십니다.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시편을 여는 말입니다. 묵상. 메디테이션. 사실 정확한 번역은 명상입니다. 묵상은 달라요. 청년 몇놈 잡으러 저도 삼각산까지 쫓아갔어요. 두녀석이 명상한다고. 명상이 뭔가요? 눈을 감으세요. 둥근해가 떠오르죠? 눈감으면 반짝반짝한게 떠오르죠. 묵상은, 들짐승이 배고파서 그렁거리며 밤에 잠 안자고 온 들녘을 찾아 돌아다녀요. 한 경점에 먹이감을 포착했을 때. 또 하나는 소가 음식을 먹고 반추합니다. 슥슥 갈아요. 삼켰다 뱉었다. 되새김질. 이 두가지 개념이 묵상입니다. 눈 감고 음~ 하는 한가한 개념이 아니에요. 강렬하게 목이 갈하게 말씀을 묵상하는 그런 행위에요.
이 묵상이라는 말은, 말씀의 강렬한 내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에요. 묵상하여… 다 지켜 행하라… 네가 형통하리라. 성경에는 뜻밖에도 형통이라 표현했으나 전혀 다른 단어로 표현해요. 요셉이 보디발의 종으로 팔렸는데 찬송가 후렴으로 따라붙는 단어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형통했다. 히브리어로 찰라흐 라는 단어를 써요. 인간적인 번영은 셀라흐 에요. 한글로는 형통이라는 같은 단어로 썼어요. 인간적인 번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뜻대로 진행될 때 쓰는 찰라흐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목마른 짐승처럼, 허기진 짐승처럼, 베뢰아 사람처럼 씹고 삼키고 되새김질 할 때에, 우리 귀에 누구의 섭리와 계획,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열린다. (!)
Joshua 1:12–16 (KRV)
12 ○여호수아가 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13 므낫세 반 지파에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14 너희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편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고
15 여호와께서 너희로 안식하게 하신 것 같이 너희 형제도 안식하게 되며 그들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얻게 되거든 너희는 너희 소유지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편 해 돋는 편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차지할찌니라
16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소테림을 불렀는데 열두지파 중 세 지파를 따로 소집합니다. 므낫세 반쪽이 나서 반 지파입니다. 요셉의 자손. 또하나는 갓 지파. 그리고 르우벤 지파. 이 세 지파에게 명령하기를, 1진, 2진, 3진은 이 나머지 아홉지파 반 형제들과 강을 건너가서 다 전쟁을 하고 다 안식을 경험한 다음에, 완전히 점령한 다음, 승리를 마쳐놓고 다시 건너와서 너희가 원하는대로 살도록 해라 이런 명령을 해요.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이유가 있습니다.
르우벤 지파는 성경에 표현하기를 이 르우벤은, 야곱의 열두아들 중 장남이에요. 근데 장남 구실을 못하고 서마와 못된짓을 하죠. 장남의 자리에서 내몰려요. 이 사람은 야곱의 유언을 보면 엄청난 다혈질입니다. 이 사람 손에, 굉장히 많은 살육이 일어납니다. 싸움하는 데는 서러워할만큼 전쟁에 능한 지파에요. 갓지파는 이름 자체가 군대라는 뜻이에요. 선봉에서 서요 전쟁에는. 용맹한 기질을 가진 군인 집안이에요. 진적이 없어요. 므낫세 반 지파는 이름 자체가 용사라는 뜻. 기드온이 있어요. 세 지파 공통점은 전쟁에 능해요. 그래서 조상적 부터 전쟁했다 하면 이기는 거에요. 이기다 보니까 땅도 좋고 좋은 땅을 차지하고 또 노획물이 많아요. 역할에 따라 분배하다 보니까 항상 분배가 많았어요. 그럼 살림 살이가 괜찮죠.
사람이 근데 배가 부르면 약속을 주장합니까 아니면 슬슬 잊어지게 됩니까. 민수기 때 모세 때 이 세 지파가 와서 욕을 해요. 뭐 꼭 강 건너가서까지 싸울 이유가 있냐 우리가. 이스라엘 땅은 요단을 중심으로 저쪽 이쪽이라는 표현이요. 지중해 반대쪽입니다. 이쪽은 굉장히 비옥한 땅 천지에요. 이 세지파가 요단을 코앞에 두고 안건너려고해요 모세 때.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짓고 뚜르뚜르뚜르. 구태여 강 건너가서 구차하게 싸울 필요 있겠느냐. 배가 부르니 안이한 생각이 발동되고 뭘 놓냐면 하나님께로부터 주신 약속을 놓게 됩니다. 모세 때, 한 가지 부탁합니다. 그래도, 너희가 용맹한 형제들인데 셋 빠져나가면 핵심이 다 빠져나간다. 형제들이 얼마나 실망하겠냐, 가나안 땅 안들어가도 좋으니까 전쟁만 해라, 도로 건너와서 너희 원하는대로 살아라. 이 얘기입니다. (!!주여…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
모세 때부터 약속해진 거에요. 요단 직전에 상기시킵니다. 이것 잊지 말자. 전쟁은 해줄게. 사는 건 이쪽에서 산다. 경계선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 실리와 이익 때문에 약속을 놓아버린 사람들이에요. (!) 뜻밖에도 그리스도인들에는 경계선에 의외로 많아요. 절실하고 절박할 때는 은혜를 주장하고 약속을 붙들어요. (!리치) 그런데 등따시고 배불러지고 평안해지면, 므낫세 반지파, 르우반, 갓 지파의 행태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상기시켜 주니까,
Joshua 1:16–17 (KRV)
Joshua 13:13 (KRV)
Psalm 106:34–36 (KRV)
16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17 우리는 범사에 모세를 청종한 것 같이 당신을 청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아 걱정마세요. 갈게요. 싸워줄 테니까. 여기 들어가서 안살고, 이쪽 동편에서 돌아가서 살테니까 그것만 다짐해주시고 걱정마세요. 그렇게 정말 되었나요?
13 그술 사람과 마아갓 사람은 이스라엘 자손이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그술과 마아갓이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더라
못한게 아니고 쫓아내지 아니하였어요. 시편 기자가 정확하게 들추어냅니다.
34 저희가 여호와의 명을 좇지 아니하여 이족들을 멸하지 아니하고
35 열방과 섞여서 그 행위를 배우며
36 그 우상들을 섬기므로 그것이 저희에게 올무가 되었도다
매력적인 문화. (!) 쫓아내기에는 너무 달콤했거든요. (!) 쫓아내지 않았고 그것이 거대한 세력으로 일어나서 올무가 되었어요. (!) 그리스도안에 삶 사는 공동체에게 주는 준엄한 경고입니다. 사소하고 작아보여서 남겨두죠. 시간이 지나고 죄성과 결부가 되면 우리가 떨쳐낼 수 없는 괴물로 일어나요. 이게 역사의 무서운 역사성입니다. 엄청난 괴물로 일어나요. 결국 나중에는 쫓아내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의 삶. 특히 가나안의 싸움은 성결의 싸움이요. (!) 성결은, 성경이 말하기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존하는 것을 성결하다고 합니다. 그 안에는 윤리적 도덕적 문제가 있어요. 가장 선명한 성결의 가치는 하나님의 은혜만 의존하는 그 태도를 성결하다고 합니다. 신랑 신부의 최고가치는 성결이요. 당신만 100% 사랑해. 이고백이요. 그것을 성결하다 해요. 이런 경우 가능할까요. 여자가 삐져요. 알고보니까 남편이 옆집 여자를 1% 사랑해요. 당신은 99% 사랑하는데 쫀쫀하게 1% 가지고 삐지고 그래. 전부 아니면 전무에요. 사랑은 올인이에요. 성결하다고 얘기해요. 그리스도인의 성결은, 신랑 되신 그리스도께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은혜의 속성이에요. 가나안 싸움의 가장 큰 가치입니다. 우리 내면에 공동체에 그 싸움이 계속 들어올 거에요. 그리스도의 신부답게 오직 그리스도께만 은혜로 의존하는 귀한 고백의 걸음을 걷도록 기치를 높게 들고 걸어가기를 축복합니다.
Joshua 2:10–11 (KRV)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중요한 단어, 우리가 듣자. 로마서 10장에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라합의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어요. 들음으로 난 믿음이요. 열왕기에 보면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죠. 왕이 되자마자 하나님께 처음으로 구했던 것이 뭡니까, 지혜요. 부도 귀도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했구나. 그 때는, 그 지혜는 뭘까요. 렙쇼메아, 딴 지혜가 아니라, 잘 듣는 마음. 솔로몬이 구했던 지혜는, 잘 듣는 귀를 구했어요. 잘 듣는 마음이요. 성경의 지혜는 잘 듣는 마음이요. 심지어는 누구의 소리까지요, 한 가련한 창기의 아픔의 소리까지 들어요. 아기 하나를 두고 유명한 재판의 일화. 생모가 내가 포기하겠습니다. 기록된 바 자궁에서 불타는 모성의 소리를 들었다. 잘 듣는 귀가 있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귀에요.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 중요하지만,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열망이 열려있다는 거에요. 귀가 열려있다는 거에요. (!)
지금은 여러분 모르는데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복입니다. 청년 때부터 하나님 말씀을 듣기를 즐거워하는 심령이 된 사람은 그 복이 평생따라가요. 참 신기해요. 여러분 복받은 줄 아세요. (!) 집에 앉아서 티비를 여기저기 틀어보세요. 매력적인 티비가 얼마나 많아요. 이게 왠일이에요, 왜 여기 와 앉아있어요. 이게 복이에요.
Joshua 6:25 (KRV)
Hebrews 11:31 (KRV)
25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탐지하려고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었더라
가나안에서 가장 처절한 몸부림으로 살았던 한 여인. 국가적 기준으로 따질 때는 안해야 할 짓을 했어요. 게다가 자국의 군인들이 와서 심문할 때 윤리 도덕적으로 거짓말을 해요. 한 군데만 읽어드릴게요.
히브리서 기자는 이 라합의 행동을 어떻게 판단하는지 봅시다.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나는 이 싸움 예수님 피로 합니다. 이 믿음으로 한 거에요. 야고보서는
사자를 접대하여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 행함으로요. 다 들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소문을 들은 대로, 거기에 운명을 건거에요. (!) 믿음의 결단을 한 거에요. (!)
Matthew 1:3–6 (KRV)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처절한 인생살았던 라합의 이름이 그리스도의 왕의 족보에 떡하니 올라와 있는 이것, 구원이에요. 구원받을 수 없는 조건 없는 인생이 이렇게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구원받습니다. 그 말이 6:25 의 그가 오늘까지 우리중에 있느니라. 바로 가나안의 점령은, 그런 조건으로 들어가는 거에요. 들어갈 수 없는 조건인데 그리스도의 은혜로 들어간다 이거에요. 어떤 내용입니까. 왜 홍해를 건너는데 왜 요단 건너요. 차이가 뭐였죠? 홍해는 말그대로 세례요.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으로 구원을 입는 사건이요. 요단은 구원 입은 사람들이 얼마나 순종하는가. 그래서 매일 전쟁이었어요. 이 초입에, 라합이 등장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우리 같이 라합처럼 죄 많은 연약한 인생들이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 땅에서 이제 왕의 족보가 되어가는 싸움이요. (!) 그가 오늘까지 있느니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결국, 이 여인을 통해서 이스라엘 군인들이, 얼마나 지난 40년간 바보같은 생활을 했는가. 하나님의 확고한 약속들을 우리가 얼마나 믿지 못하고 살았는가 이 가련한 여인의 입술을 통해 확인받고 들어가요. 구원이 무엇인가. 라합처럼 희망없이 살던 인생이었는데 오직 그분께 내 전생애를 걸고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는 그 가나안을 향해 매일, 라합처럼 절실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없이는 나는 안됩니다. 크기의 싸움, 확률의 싸움 아니에요. 이스라엘 군대와 여건과 조건 한 마디도 없어요.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고 대적을 물리친 것을 내가 들었다. (!) 이스라엘 형편이나 군대가 나옵니까? 아니요. 일절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고 그는 생애를 걸 결단을 합니다. 앞으로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남겨져 있어요. 다음 시간에.
Joshua 3:1 (KRV)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너다
Numbers 25:1–5 (KRV)
브올에서 생긴 일
1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여기에서 세 날을 보내죠. 구약의 지명은 정말 중요합니다. 어디에서 떠냤냐면 싯딤에서 떠났다고 구태야 밝힙니다. 이스라엘의 어떤 장소이길래, 이 위치를 구태여 밝혔을까요.
25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2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3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5 모세가 이스라엘 사사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관할하는 자 중에 바알브올에게 부속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소였어요. 광야 노정중에 가장 악한 짓을 마다하지 않았던 현장이요. 거기가 싯딤이요. 우리에게도 지난 시간을 돌아보라면 머리를 흔들어버리고 싶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 그런 현장이 제게도 있습니다. 살아온 시간을 되돌아보자면, 생각만 하면 끔찍해. 통증이 있고 그 생각만 하면 고통스러워요. 누구나 하나님 앞에 그런 싯딤의 현장이 있고 우리는 요단을 가기 위해 그 싯딤을 떠나야 합니다. (!) 요단이라는 말은 내려가다 라는 말입니다. 지형도 그래요. 싯딤에서 떠나 요단으로 내려갑니다. 싯딤은 이스라엘의 괴로운 역사의 현장이요. 말뚝을 뽑다. 라는 말. 어둠을 흩어내고, 지난 역사를 흩어내고 새 날, 햇빛이 돋는 새 땅을 향해 가려면 이 전제가 없으면 안되요. 반드시 싯딤을 떠나야 요단으로 갑니다. 분명한 전제에요. 강력한 하나님 말씀의 능력에 붙들려서 치유도, 회개도, 의식도 바뀌고, 결단도 일어나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Joshua 3:2 (KRV)
2 삼 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여기에서 사흘을 기다리게 합니다.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요. 상상을 해보세요. 사람이 제일 못하는 게 뭐죠.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는 것. 가장 인간이 본질상 힘들어 해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니까 믿음이 좋다고 생각해요. 아니요, 믿음이 뭔지 설명이 잘 되어서 그래요. 하나님의 은혜를 제일 잘 설명할 수 있어서 믿음의 조상이에요. 아들이 있으리라.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십년 뒤 하갈에게 들어가 생산을 해내고 맙니다. 칠흙같은 13년의 시간이 흘러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어요. 가만히 계시면 고문이에요. 언제 부르시려나. 늘, 이게 형벌이에요. 86세에서 13년 후 99세 때 첫 말씀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나는 전능자라. 나는 세다. 이게 아니라 거기에는 엄청난 꾸지람이 배어져 있었습니다. 너 왜 나를 신뢰하지 않았냐, 이 질책이 발언에 녹아져 있습니다. 나는 전능자라. 아브라함을 항복시키죠. 아브라함의 가족에게 할례를 명합니다. 그리고 난 아들이 이삭이요.
성경을 중심으로 아브라함의 할례 를 중심으로 그 전이 이스마엘, 그 후가 이삭이라 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기준이고 우리 신앙생활의 중요한 작업입니다. 남자의 생식기 끝을 잘라내는 과정이고 너는 육체적으로 죽었다 이 말입니다. 약속의 자녀이지 네 힘으로 낳은 아들이 아니다. 이스마엘은 힘써 자기 실력으로 낳았어요. 인간이 힘써 자기 실력으로 하는 게 이래요. 할례 후 낳은 이삭, 아브라함을 통해 낳았지만 육체적 실력이 아니라 은혜로 주신 것을 말해요. 이삭을 약속의 자녀라고 말해요. (!)
인간이 제일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확한 타이밍을 기다리지 못하는 것. 하나님이 망신 당할거 같아. 하나님 약속이 깨질 것 같아서 좀 힘좀 쓴 게 이스라엘 낳은 거에요. (!) 얼마나 뒤틀리는지 아시잖아요. 사람이 해놓은 짓이요. 엎드려 기다리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요. 미치는 거에요. (!) 죽을 것 같은 그 때,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세요. (!)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데요. 보통 하나님께 붙어있지 않고서는 안되요. 거룩하다 성결하다는 윤리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께 얼마나 내가 밀착되어있는가의 싸움이요.
또 기다렸다 때를 놓쳤던 사람이 누구죠. 사울왕이요. 선지자가 안오니까, 번제를 그냥 드려요.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더라. 좋지 않은 조크이죠. 피가 끓을수록, 몸이 뜨거울수록 하나님 시간을 못기다려요. 창세기에 보면 전부 그 싸움이요. 아브라함과 롯의 선택에서도 롯은 결국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온 동네를 찾아다녀요. 결국 그리고 찾은데가 소돔과 고모라. 네온 사인, 물좋고 정자 좋은 곳. 아브라함은 엎드림. 업 드림. 기가막힌 주제에요. 엎드려야 업 드림이 되는 거에요. (!) 그 때부터 하나님이 꿈을 주시기 시작해요. 요단 건너기 전 삼일의 훈련입니다. 몇가지를 명령하는데,
Joshua 3:3 (KRV)
Numbers 17:10 (KRV)
Joshua 3:3–6 (KRV)
3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아론의 두쌍난 지팡이. 만나를 담은 항아리. 십계명이 담겨진 돌판. 성전의 안쪽을 지성소라고 합니다. 일년에 한 번씩 대제사장만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 앞에는 진설떡, 등잔불이 밝혀져 있죠. 그 등잔불은 항상 켜져 있어야 해요. 간혹 꺼지는 때가 있어요. 외적이 공격해올 때. 절대 꺼지면 안되요. 언약궤는 우리 옛날 시집오실 때 타셨던 가마와 비슷합니다. 차이는, 이 가마 천정부위에 금으로 천사의 형상이 마주보도록 되어있고 그 고개가 천정을 내려다 보게 되어있습니다. 그 천정부위를 새로 만드는데 시은좌. Mercy seat. 이라 합니다. 제물을 가지고 들어와 피를 이 시은좌에 부어요. 그 자리가 자비의 자리. 베풀 시. 은혜 은, 자리 좌. Mercy seat. 이 안에 세 가지 물건이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면 삼척동자도 아는 기적의 상징물들이요. 이 상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10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찌니라
간직하게 하는데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고라 자손이 모세의 권위에 대적해요.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목회자는 아니에요) 고라 자손이 광야에서 엄청 죽습니다. 지팡이는 죽은거죠. 이미 죽은 나무. 근데 거기에는 사퀘드 라는 살구 꽃이 피고 싹이 나요. 무슨 표징이요? 반역한 자에대한 표징. 어디에 간직해요? 언약궤에. 단순히 기적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거역하여 죽은 고라 자손들의 죄가 어떠함을 상징하는 기적이요.
두번째 만나를 담은 항아리. 출애굽기 때 설명드렸는데 만나는 뭐였죠. 떡을 내라 물을 내라 원망을 터뜨릴 때 떡만 해결되면, 의복만 해결되면, 거할 곳만 해결되면 우리가 하나님 잘 섬기겠습니다. 그래서 떡을 주셨어요. 감격해서? 그래? 확실하게 해줄게. 떡 줌으로, 펄펄 만나가 내림으로 그런 기적을 40년 겪고도 하나님을 얼마나 순종하기에는 심령에 파산된 존재인지 확실하게 확인시켜주기 위해 그런 기적을 내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고 입에서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떡으로 안된다는 것을 증명한 게 만나에요. (!)
우리 애만 붙여주면, 우리 남편 승급만 시켜주면, 직장만 어떻게 해주시면, 뺀질거리지 않고 잘 섬길 것 같죠? 안된다니까요. 그 기적을 매일 경험한 백성들이 이스라엘이요. 40년을 철저히 불순종하고 뺀질거리며 살았어요. 그 결과가 신명기에요. 다시 하나님 명령을 기록한 책이요. 여호와 입에서 나온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 뼈저리게 녹아지도록 기억한 거에요. 만나의 항아리는 그러므로 불순종과 패역의 상징이요. 마지막 뭐 하나 남았어요? 십계명.
이 십계명은 첫번째 에요 두번째 에요? 두번째 십계명은 뉘앙스가 뭐에요? 첫번째는 모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아론을 중심으로 산 밑에서 금송아지 만들고 우상으로 만든 게 아니고 우리를 위하여 인도하여낸 여호와로라. 종교의 쓸데없는 부질없는 짓이요. 형상화 시키려고 하는 시도가 끊임없었어요. 그러자, 모세가 산에서 율법 받고 내려오다가 그 소리를 듣고 여호수아가 싸우는 것 같은데요, 아니다, 뛰놀고 춤추고 난리 났어요. 받았던 십계명을 가루로 만들어 물에 타서 마시게 합니다. 그것 이끈 사람들을 레위지파가 죽이게 합니다. 그거에는 탁월한 지파거든요.
세 가지가 어떤 공통점이 있죠? 철저히 인간의 죄가 그 법궤에 들어가 있습니다. 제사장의 피를 그 시은좌에 부어요. 법궤는 승리의 상징, 기적의 물건이 아니라, 인간의 죄가 얼마나 어린양의 보혈이 필요한가 설명하는 물건이 담겨져 있는 거라구요.
3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4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5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6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일러 가로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서 나아가니라
그리고 언약궤는 요단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어디서 세례를 받으셨죠? 요단강이요. 어린양의 보혈로 들어가는 자리에요. 그분께 순종을 배우는 땅이 가나안이요. 성결은 뭐에요, 내가 얼마나 고상해지고 치성과 덕행을 쌓아서 괜찮은 신사의 인품이 되는 그 싸움이에요? 성경에서 성결하라 거룩하라라는 명령이 나오면 그리스도께 엎어져라. 그리스도만 붙들라. 그 말을 뭘로 설명하냐면 신랑과 신부의 사랑의 관계요. 성결은 그 분께만 순종을 바치는 고백을 하는 자로 섰다. (!부모와.. 리더나.. 다른 것은요) 우리가 사는 땅이, 어디로 가든지, 가나안 땅이 되어야 합니다. 어린양에 밀착되어서, 나는 공로 없으나. 나는 볼품없고 여전히 모자라고 흠이 많은 죄인이지만. 어린양의 보혈로 덮어진 은총 받은 자로서, 꼭 붙어서 이 한주간도 예수의 이름으로 이겨내는 축복 있기 바랍니다.
Joshua 3:17 (KRV)
Exodus 14:21 (KRV)
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
어린양의 죽음을 상징한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들어서자 요단강이 끊어져요. 언약의 성취를 상징합니다. 백성들 앞에 무슨 길이 열려요? 새롭고 산 길이 열려요. (!) 강바닥이 길이 됩니다. 누가? 그 넘치게 흘렀던 홍해나 요단물이 밑바닥이 마른 땅이 준비되어있을 줄 누가 알았어요. (!) 하나님은 어린양의 죽으심을 통해 새롭고 산 길을 준비하셨어요. 너희 앞에 새롭고 산 길이 있나니. 예수님의 육체를 상징하는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었다는 것. 아래서부터 위에로 찢지 않아요. 인간이 찢지 못해요. 위에서 찢어요, 누가 하신 거죠? 하나님이요. 구원의 완성 또한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그 육체를 상징하는 휘장이 찢어지고 이스라엘 공동체 앞에 새롭고 산 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요단 밑 마른 땅을 누가 알았으리요?
강바닥이 아무리 말라도 건널 수 있을 것 같아요? 애어른 합쳐서. 갯벌일 텐데. 그런데 마른 땅이래요. 어떻게 말랐지? 성경을 읽을 때 유치한 상상력이 필요해요. 그래서 어린 아이들이 성경읽다가 은혜받아요. 이런 자라야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늘, 어린아이 같은 아들의 모습으로 딸의 모습으로 서자. 너무 폼잡으려고 생각하지 말자.
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감격스러워서 웃어야 해요. 이 본문이 얼마나 우스워요. 이백만 가량의 인파가 어떻게 갯벌을 건너요. 하나님께서 밤새, 동풍이라는 것은, 팔레스타인의 뜨거운 바람이에요. 동풍표 선풍기를 틀어가지고 이걸 밤새 말려요. 할렐루야. 그들은 아우성 치고 걱정하고 잠들어 있을 때 이 인생들의 꼬라지를 아시는 하나님은 뜨거운 동풍표 자연바람으로 뻘판 밑을 다 말려요. 아버지.
집사람이 저혈압이시고 잠의 양이 많으세요. 시름 시름 앓고 그러세요. 둘째 첫째 낳고 하루는 뭐 인기척에 눈을 떴는데, 애기 옆에 앉아서 지친 몸으로 계속 모기 물릴까봐 부채질을 하고 있어요. 여러분은 자기 더우니까 부채질 하지만. 이야 저 잠 많은 친구가 일어나 앉아서 애기 위해 모기. 어느 놈이나 달려들면 죽여버린다 하고 하나님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다정하신 분이에요.
한주간 살 때. 홍해와 같은 것들이 겁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밑에 마른 땅을 준비하세요. (!) 그 두려움 밑에 정복을 준비하십니다. 여러분의 아버지에요. 이말씀 이 약속 붙들고. 우리 태권도 형제들처럼, 유치원 재롱 잔치처럼, 아버지의 믿음을 믿고 일어서 나아가는 저와 성도들 되기 바랍니다.
새끼들. 자식들만큼 뻔뻔한 존재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저희 집에도 뻔뻔한 애가 하나 있는데, 유일하게 제 문자를 씹는 아이가 그 아이입니다. 며칠 전 되게 혼났어요. 문자 보내면 아예 답이 없었어요. 저도 말을 며칠 안하다가 뭐하지? 바로 답이 없었어요. 전에 교회에도 설교를 6부 하고 회의하고 가면 일곱시가 넘어요.
집에 가서 짜논 빨래 늘어져서 누우면 거기 올라타는 애가 있어요. 고수부지 나가자 하고 장기판 가지고 와서 장기 두자 하는 요구. 그 모습을 보다가 아내가, 나도 쟤처럼 뻔뻔해봤으면 좋겠다. 하나님은 우리가 나갈 때 어떤 모습으로 서는 것을 원할까요? 한국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태도에 좀 문제가 있어요. 엄한 아버지 아래 자랐으면 엄한 하나님 이라는 감도를 가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보란듯 떳떳한 신앙으로 나갈 수 없을까, 앵벌이 신앙. 껌 막 팔아가지고 모아서 가져다 바치는 이런 감각이 있어요. 보란듯, 떳떳하게 나아가기 원하고, 내가 뭔가 잘 되거나 잘 해서 하나님 앞에 서기 원하는 잘못된 관점이 있어요. 그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정말 원하는 것은, 우리에게 좀 더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편한, 뻔뻔한 모습으로 서기 원합니다.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관계의 복이에요.
하나님께 편하게 다가가자. 너무 열심도 부리지 마시고, 이 말은 열심을 부리지 말라는 게 아니라 거기에만 초점 두지 말라. 하나님 여러분들이 어떤 모습으로도 아들로 자녀로 서 있기 원합니다. 오늘 그 부분에 대해 요단을 건너는 과정을 통해 좀 보도록 합시다.
Joshua 3:10 (KRV)
10 또 말하되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 이 일로 너희가 알리라
반드시 이 일곱족속을 쫓아낼 것이다. 요단 한 복판에 들어서는 사건과 가나안 안의 일곱족속을 쫓아내실 것을 동시에 약속하세요. 법궤를 매고 제사장들이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가나안의 일곱족속을 쫓아내실 것을 알것이다. 어떤 함수관계가 있을까요? 그림을 그려보세요.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 한복판에 들어서는 것, 가나안 일곱족속이 쫓아내어진다. 무슨 그림이죠? 법궤는 그리스도 어린양의 죽음을 상징했어요. 그 죽음은 누구의 죄 때문에, 어린양이 죽어야 합니까? 마태복음 3장에 공적 사역 시작하시기 전에 세례를 받으세요. 어디서, 요단에서. 옛것은 죽고, 약속에 대해서 새로 사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요. 이것을 그대로. 요단강가에서 세례 요한에 의해 예수님이 세례 받아요. 죄인이 받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세요. 세례 요한에게 죄인의 모습으로 세례 받아요. 그 그림은 정확하게 지금 제사장 어깨에 둘러매어진 법궤가 요단강 한복판에 들어가 있는 그림입니다. 어린양 예수가 죽음 당한 것. 내가 죽어야 할 그 강에서 어린양이 대신 죽어요.
이 구속의 사건.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는 대속의 사건은. 이 사역으로 난 손털고 끝났다 끝, 이게 아니라 무엇까지 약속이요, 가나안의 삶의 정복과 완성까지를 이 죽음은 내포하고 약속하고 있다. (!) 이렇게 중요한 얘기를 하시는데.
법궤가 들어서는 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 가나안 땅의 정복의 완성을. 하나님 아들을 내어주셔서 대속의 죽음을 죽게 하신 사건은, 그것 만으로 효력있습니까, 우리의 구원까지 담고 완성하는 것까지 내포합니까.
십자가는 오늘의 삶까지 유효한 것입니다. 이런 것 알아야 해요. 2천년 전에 죽어마땅할 내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만 그 현장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요단강 한복판의 대신 죽으신 그 사건은, 긴긴 내 인생속에 구속을 내포하고 있는 완전한 약속이에요. 오늘이 지치고 힘들 때마다 십자가 그 사건을 봐야 해요. 우리에게 궁극적 힘을, 새 힘을 줍니다.
제일 좋아하는 찬송,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내 마음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당했나, 이 벌레같은 날 위해 주 보혈 흘렸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의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준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나를 통해 내가 실망할때, 난 왜 이러지. 이게 될까, 이게 뭐야. 나를 향한 좌절과 절망이 밀려올 때마다 뚜렷이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세요. (!) 구속의 처음 뿐 아니라 내가 완성될 자리를 약속합니다. (!건축가??) 가나안의 모든 대적을 물리치는 것 까지를 말합니다.
John 9:1 (NLT)
Jesus Heals a Man Born Blind
1 As Jesus was walking along, he saw a man who had been blind from birth.
It is about a man born blind. Interesting fact is that he was born blind. Question is that who sinned? Inside of this question, there are tendencies and theologies embedded. First is that sin leads into tragedy. (!) That is the belief expressed in disciple’s question. When you think about it, it is true and right thinking. Last week, I am saying that when you sin, you have to pay back for sure. If we know that, many will change. Would you still take from others if you knew pay back ten times more. If you realize deeply, surely there are punishments and sins. You would not sin even when you are alone. Certainly you will not harm your brothers in Christ as that will be paid back for sure as you live the life of Christians.
Forgiveness and salvation, what about these? Heaven is guaranteed when one puts his faith in Christ for salvation. As long as I get to heaven, it’s fine and I will do whatever I want to do. But even in heaven, there are different glories. There are also shameful salvation. You got it despite your sins, because of forgiveness. When you get to heaven, you will regret for sure. You may not feel it but you need to come to understand more deeply so that when the time comes you will not regret. When you go to heaven you realize the difference and you regret how you lived.
John 9:2 (NLT)
2 “Rabbi,” his disciples asked him, “why was this man born blind? Was it because of his own sins or his parents’ sins?”
Second is this. Because he was born blind, it must have been that his parents sinned. This is very tragic if you think about it. I want to put caviat here. There are many variations in human condition. We do not know the reason why we were put in certain condition. (!Chaoxianzu or…) Sin leads to consequences for sure. In the question of disciples, there are premises that some things seem to be fate. This is the tragedy. Because of sins, man could not help but live in this wretched condition. To take away that sin there are consequences for sure.
John 9:3 (NLT)
3 “It was not because of his sins or his parents’ sins,” Jesus answered. “This happened so the power of God could be seen in him.
I’m sharing this because I was being insulted by people and I was given this advice. Sinners in fact should be insulted. (!) This came to me very deeply. Right, I am the sinner. It is right for sinners to be insulted. Originally we should be insulted. Sinners deserve. Negative plus negative makes plus. Sinners should be insulted. We are sinners saved by grace but we are sinners nonetheless. We should be persecuted and insulted by all kinds of evil set against us. We should think of it as penance against our sins.
This is a great leap of our lives. Crisis is opportunity. Feels like I am being abandoned but there is great God who never leaves me in this way. Reason he allows is because he has greater blessing in store for me. (!) Persecuted and said all kinds of things, great is your reward in heaven. Great development takes place through all that suffering and sacrifice.
Judges 2:10 (KRV)
잊을 수 없는 박물관, 이스라엘의 야드바젬이라는 박물관. 야드바젬은 기억하라 라는 뜻이에요.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5300백만불을 들여서 유대인들이 실험용으로 학살된 많은 백성들, 신비감, 공포감, 인간의 죄의 무서움, 한꺼번에 녹아져서 하루에 이름을 한번씩 불러집니다. 얼마나 잘해놓았는지. 야드바젬. 기억하라. 맨 끝에 나올 때 보면,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미래를 약속하는 것이다.
토인비라는 역사학자가 이스라엘에 대한 찬사를 썼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민족은 하나의 경이로움이다. 독립을 선언할 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나라 없이 떠돌아다니던 민족이 팔레스타인에 나라를 세웁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리고 자식들의 교육이다. 교육에서도 두가지를 꼽아요. 예배의 자리를 강조해서 어릴 때부터 듣는 훈련을 시켜요. 글을 읽어보니까, 이스라엘은 지금도 초등학교 시절에는 컴퓨터 교육을 안시킨대요. 기계문명이 하나님 주신 말씀을 손상시킬까봐. 우리는 반보라도 뒤질 새라 영어 다띄고 태권도 보내고 산수학원에 이버스 저버스 유랑합니다. 실제 학교가서는 흥미를 잃죠. 선험교육이 꼭 좋은 걸까, 교육학자들이 문제제기를 합니다.
예배에 대한 교육을 주입합니다.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솔로몬의 렉 쇼메아 라는 말도 잘 듣는 마음. 이걸 구했던 거죠. 그 지혜를 주셔서 성경에도 기록된 것 같이 명 재판의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고, 백성들의 심령 밑바닥에서 나오는 마음을 잘 듣고.
두번째 교육이 신앙 교육인데. 전통교육이죠. 전통을 굉장히 중요시 여겨서,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 가면 유대인 마을 지나가면 어김없이 키파 모자를 쓰고 챙이 넓은 검은 중절모와 정장을 하고 부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회당을 갑니다.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도록 전통 교육을 시키죠. 수천년 유랑민족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회복하고 재건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 유대인들에 의해 인정받지 못한 정치가들이 대통령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가. 암암리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국이나 다른 여러나라에 끼치고 있죠.
두 가지. 신앙과 교육입니다. 그 중에서도 예배교육, 전통교육을 통해 선조들의 신앙을 기억케 한다는 거죠. 성경역사에 아주 뼈저린 실수가 있었습니다. 사사기 2장.
10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스라엘의 뼈저린 역사입니다. 전혀 다른 종자가 일어났어요.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신앙교육과 예배교육의 부재. 무서운 역사의 결과입니다. 일본속담에 아들은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라난다. 아버지 하는 짓을 똑같이 따라해요. 참 무서워요. 한 날은 집에 들어가는데, 어머님이 저를 불러 세워요. 현관앞에 이리와봐. 네 아들 신발 벗어놓은 거 봐라. 한 쪽은 이쪽 다른 쪽은 저쪽. 저렇게 벗으면 안되는데. 누가 그것을 그렇게 벗는지 아니? 네가 그렇다. 사소한 역사같지만 이것도 신발 벗는 역사에요. 얼마나 아버지의 반보 앞선 걸음이 무서운지 몰라요.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역사였습니다. 신앙 교육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오늘 그 문제를 여호수아 4장으로 다루어 보겠습니다.
Joshua 4:1–8 (KRV)
길갈에 세운 열 두 돌
Joshua 4:19 (KRV)
1 온 백성이 요단 건너기를 마치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2 백성의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택하고
3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곳에서 돌 열둘을 취하고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밤 너희의 유숙할 그 곳에 두라 하라
4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예비한 그 열두 사람을 불러서
5 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들어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 개씩 취하여 어깨에 메라
6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7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하라
8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수아의 명한 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를 따라 요단 가운데서 돌 열둘을 취하여 자기들의 유숙할 곳으로 가져다가 거기 두었더라
어깨에 맬 정도면 작은 돌이 아닐 거에요. 열 두명이 가져나와서 너희가 유숙할 곳에 두라. 그 유숙할 곳이 어딘가.
19 ○정월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서 여리고 동편 지경 길갈에 진 치매
길갈입니다. 후대에 사람은 늘 잊어요. 우리 민족은 시련과 실패에 대해 쉽게 잊는 게 있습니다. 냄비 근성이라고 비아냥 거리는데, 인간이면 다 잊어버립니다. 금메달 따서 기뻐했지만 4년 뒤에 또 이 일을 할 때 누가 땄었지? 모든 게 다 지나가고 잊어버려요. 그걸 기억시키라는 거에요. 후손들에게. 히브리 민족은, 중요한 삼대 절기, 아버지 세대가 다음 세대 전수하도록 되어있어요. 아들아, 텐트 준비해라. 어디가요? 그냥 따라와. 편안한 집을 두고 광야로 나가서 아들과 텐트 칩니다. 누룩없는 떡을 먹고 지내요. 아버지 이게 뭐에요, 맛없는 빵 세끼로. 내 얘기 잘 들어라. 몇백년 전, 몇 천년 전. 애굽의 노예생활 했단다. 모세라는 아버지를 통해 홍해를 건널 때 이런역사, 저런 역사, 갈라진 마른 땅 을 건너와 이 나라를 건국했단다. 이것 절대 잊어서는 안되고 초막절을 지내는 거란다. 너도 너 아들에게 이것을 꼭 말해야 한단다.
전통은 스토리에요. (@! 이것 꼭 해야한다.) 드라마 본 얘기는 할지 몰라도. 자식 세대와 부모님 세대 간에, 어떤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가. 스토리 있는 민족과 없는 민족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어요. 부모님 세대는 자녀 세대와 특히 방학 같은 때 얼마나 좋은 기회에요. 이번에 아빠가 제주 선교 가기로 했는데 시간 좀 내라. 갑자기 말하면 짜증냅니다. 예절을 지켜서 적어도 몇 달 전에, 아무개야, 이번 8월 중요한 계획있는데 함께 해야 한다. 한달 후에 이야기 해줄게. 이 일에 시간 빼라. 제주도 가는데 아들을 대동시킵니다. 뜨거운 햇볕 아래, 제주 토속 골목을 다니며 전도지를 들고, 이야기를 하며, 전도받는 새생명 을 목격하게 합니다. 스토리가 만들어집니다. (!)
후대와 선조사이에 신앙의 스토리를 공유하는 사건입니다. 시공간이 초월되요. 모세가 직접 와서 이야기 하는 것이고, 다윗이 함께 식탁에 앉아 공유하는 것입니다. 자녀와 부모가 좋은 이 두달, 삼일 교회는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순종하고 있습니다. 특히 올해 그 일을 놓쳤다면 겨울에도 있습니다. 1년 전부터 계획하셔서 어린 자녀도 괜찮습니다. 요즘 애들이 다 편한 곳에 있어요. 데리고만 나가보면 푸세식 많아요. 불편하게아버지와 겪었던 시간들이 아이들의 굉장한 신앙의 눈금으로 남습니다. 제주도 골목에서 전도했었는데, 신앙이 빗나갈 수 없어요. 아버지와의 시공간을 공유했던 신앙의 스토리를 갖고 있는 거에요. 파워가 다릅니다.
2013년 여름은, 이런 주제. 스토리가 있는 여름. (@) 혼자의 스토리가 아니라. 누가 알아서는 안되는 나쁜 스토리가 아니라, 아내와 자녀와 함께 할 수 있는 신앙의 스토리. 이것이 유대인들이 가졌던 중요한 신앙의 인식 세계입니다. (!@저기가 아니라, RV 아니라 텐트!)
Romans 6:4 (KRV)
Joshua 5:9 (KRV)
Revelation 21:12–14 (KRV)
Revelation 21:21 (KRV)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아주 중요한 단계 하나를 넘어서야 합니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인데, 서양 신학자들이, 한국 교회는 너무 십자가에만 매몰되어있다. 죽음과 고난에만 있고 그 다음 부활의 아침과 다음 세계를 향하지 못한다. 서구 신학자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옳습니다. 십자가는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어요. 그러나 십자가의 죽음이 목적지가 되서는 안되요. (!) 어디를 가야 해요. 삼일 교회 가야 하는데, 시청 앞에서 약도를 그립시다. 삼일 교회 오려면, 우리 정상적인 코스대로라면, 시청 앞에서 남대문을 지나서, 서울역을 지나서, 굴다리 지나면 굴 다리 크고작은 거 세개 있는데 첫째 굴대를 통과해서 좌회전 받으면 삼일 교회 나와요. 보통 그린다면 시청은 대충 그리고 남대문 한 십원 자리 동전만큼, 서울역도, 마지막 목적지인 삼일 교회는 그거야 말로 남대문만하게 그려야해요, 거기가 최종 목적지니까. 그런데 우리는 목적지는 코딱지만하게 그려놓고 남대문하고 시청을 남대문만하게 그려놔요. 헷갈리겠죠.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삼일 교회요. 근데 중간에 너무 여정의 팻말을 너무 크게 그려서 여기가 목적진가 헷갈릴 수 있다구요.
이말을 오해하지 마세요. 십자가가 들 중요한 게 아니에요. 내 생명을 다 걸어도 아깝지 않아요. 그러나 대속의 제물로 아들을 걸으신 것은 십자가가 목적지가 아니라는 거에요.
9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새로 생성되어 붙인 일이라는 말입니다. 길갈이라고 명명했어요. 2 라는 숫자가 있고 풋노트에 굴러간다. 수레바퀴라는 뜻입니다. 길갈은 이런 뜻, 모든 더러움이 굴러가서 떠나갔다. 그것이 길갈이에요. 이 길갈의 현장을 우리 성도가 매일 매일 현실적인 삶 속에 증표로 세워야 한다고 믿습니다. 어린양의 죽음을 근거로, 죽으신 이상 이 열두돌의 징표는 매일 매일 삶의 현장에 세워져야 합니다. 육신의 삶이, 저주스러운 삶이 떠나가고, 그동안 아픔 가진 모든 길갈의 이 수치가 물러가고, 떠나가는 역사가 예배의 시간 마다 열두돌의 증표로 세워져야 해요. (!)
계시록에 가면 모든 성도들에게 이것이 해당됩니다.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14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여러분들이 열 두 돌이에요. 그것이 계시록에 가면 진주로 바뀌어요. 열 둘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의 상징적 숫자입니다. 여러분 삶의 자리는 강밑에 대신 죽으신 어린양의 죽음을 근거로 삶의 현장에 이 증표가 우뚝우뚝 세워져서 길갈의 수치를 물러가게 해야 합니다. 그런 헌신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의 자리는, 눈을 감는다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눈을 감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 만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Joshua 5:13 (KRV) 칼을 든 여호와의 군대장관 Revelation 3:20 (KRV) Revelation 3:14–19 (KRV)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말씀
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웠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광야의 오합지졸. 할례하고 첫 전쟁을 향해 진격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러가지 생각이 많았겠죠. 어떤 한 사람이 길을 가로막고 칼을 빼어들어요. 여호수아의 한 핵심적인 질문. 너희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잘 묵상해보세요. 질문의 주어는 우리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를 대표하는 여호수아입니다. 우리편이냐 우리의 대적 편이냐. 질문의 요지는 우리. 손해냐 이익이냐 이런 말로도 들려요. 암묵적인 메세지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모든 문제가 드러납니다. 40년 방황의 이 질문 한 마디에 대번 드러납니다. 물론 택하신 백성, 택하신 민족이에요. 한번도 그들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겼던 기억이 없어요. 열하룻길을 몇년 돌아다녔다구요? 40년. 그 비교가 무엇을 뜻합니까? 방탕과 낭비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뒤안길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떤 영적 속성을 잘 감추어놓고 있습니까? 불순종입니다. 가장 정확한 정의는, 하나님을 안 믿지 않고 모르지 않아요. 언제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활을 도와주는 조력자, 어시스턴트에 불과한 (!) 이스라엘이 그렇게 대접했다구요. 그들의 뇌리의 한복판에는 나에게 손해가 되느냐 이익이 되느냐 에 판단의 근거가 되요. (!)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랑 관계를 끊기는 싫은데 너무 깊게 간섭도 원치 않아요. 위험하거나 어려울 때마다 좀 등장하셔서 도와주는 정도로만 거래를 원해요. (!) 이것이 열하룻길을 40년 돌아다닌 이유입니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대적을 위하느냐. 취중진담이라고 얼떨결에 튀어나온 질문.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클리어하게 보여주는 것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 내편 맞습니까? 그런 관계 원치 않으세요. (!)
20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사영리. 전도용 소책자에 전형 구절로 삽입되어있습니다. 믿지 않는 불신자에게 적용을 하는데, 틀리지는 않지만 적합하지는 않습니다.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불신자에요 신자에요? 네 신자에요. 적당한 경계선상의 덥지도 차지도 않은 그리스도인이요. 언제나 내가 위급할 때만 필요한 마왕같은, 도깨비 방망이 같은 존재에요. 교제를 그렇게 원하시지 않으세요. (!)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신데요. 내가 문 열면 구원이요 문 닫으면 구원 아닙니까? 아니요 내 의지와 상관없어요. 내 공로 아니에요. 그분이 혼자 역사하시는 일방적인 역사에요. 개혁주의 신앙입니다.
근데 내가 열어야돼요. 무슨 뜻일까요? 내가 다급할 때만 달려가는 종으로 싫다. 내가 너 집의 주인으로서, 가족으로서 관계하기 원한다. (!) 근데 똑같은 상황이 가나안 들어가는 초입에 전쟁을 앞에 두고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하는 질문이요.
Joshua 5:13 (KRV) 칼을 든 여호와의 군대장관 Joshua 5:14 (KRV) Exodus 12:40–41 (KRV) Joshua 5:14-15 (KRV)
13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웠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내 직장, 내 자식, 내 노후, 내 남편, 나 나 나 나. 나. 계시록 3장의 지적이고, 여호수아 5장의 지적입니다. 광야 40년 방탕, 방황의 본질이었어요.
14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아니라. 질문은 두가지였어요. 근데 전체 부정이요. 단도적으로 아니라. 이건 둘 다의 전체 부정이요. 난 네 편도 너의 대적의 편도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커밍아웃을 합니다. 정체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왔느니라. 쉽지 않은 부분이요. 군대대장에 따라 해석이 확 달라집니다. 여호와의 군대대장. 누굴까요. 여호와의 군대. 뭐지?
40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사백삼십 년이라
41 사백삼십 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정확하게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공동체를 여호와의 군대라고 말하고 있어요. 이 사람이 누구의 대장으로 왔다구요? 신앙의 틀을 완전히 뒤집는 매우 중요한 발언이에요. 나는, 너희들을 도와주는 정도로 지원군 대장 정도로 온게 아니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왔다. 이스라엘 백성의 군대 대장으로 왔다. 지원 부대 아니다. 너희의 대장으로 왔다. (!)
일을 치르고 전쟁해야 하는데, 대장하시는게 확실해요 옆에서 조금 도와주는 게 확신해요. 묻는 게 등신이지. 광야 40년 충분하다. 이 가나안의 모든 전쟁과 싸움은 내가 한다. 할렐루야. 우리 신앙의 세계가 확, 어떤 감동이 밀려옵니까? 감동 강요죄라고 합니다. 저혼자 감동해서. 어떤 원로 목사님이 제일 꼴보기 싫은 목사가 자기 혼자 은혜 받고 내려오는 사람. 제가 아닌가. 그런 감격이 없어요? 그렇지. 왜 내가 이걸 붙들고 내가 고민했지? 그분께 다 맡기면 되는 건데. (!) 그분이 하시면 되는 건데. 그래서 여호수아서 전체 주제가 하나님이, 다 하신다. 우리는 믿고 순종하면 되는 거에요. (아무 결정도 안해요?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기 정말 원하세요?!)
하나님 지원군으로 쓸래요 대장으로 쓰실래요? 확실합니까? 그래요. 조치가 필요해요. 신앙생활하는데 머리가 좋아야 할까요, 믿음이 좋아야 할까요, 눈치가 빨라야 할까요. 신앙생활에는 눈치가 빨라야 합니다. 믿음은 주님 주시는 거니까 상관없어요. 눈치 빨랐던 사람이 여호수아에요. 여호수아 5장,
14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이거를 영적인 센스 또는 눈치라고 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눈치니라. 여호수아는 예수의 그림자에요. 상징이에요. 또다른 구약의 표현은 호세아 이죠.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 엎드립니다. 그러자,
15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내 발에서 신을 벗으라. 룻기에 보면, 나오미가 이방땅으로 모압땅으로 굶주림을 피해 갔다가 두 아들과 남편을 잃어요. 여자 셋만 남아요. 대가 끊어졌어요. 좌절과 절망의 초라한 노년의 시기에 베들레헴에풍년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여인을 데리고 돌아오다가 오르바는 고향땅으로 룻은 나오미를 따라 갑니다. 신앙 고백과 구속사적인 그림이 목가적인 그림 안에 있는 거죠. 보아스의 집의 이삭을 줍다가. 집안의 대가 끊어질 때면, 가까운 권리를 가진 자들부터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 때 몇이 그것을 거절하는데, 신발을 벗어줍니다. 권리를 포기합니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 앞에서 신 벗는 것은, 하나님이 대장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습니다. 이것을 천명합니다. 구약에 보면 이와 같은 사건이 오버랩 되어 등장합니다. 출애굽기에 모세가 신을 벗을 때 인생의 시기가 어느 때에요? 바로공주의 아들로 입양되어서 최고의 국가 궁궐 아래 애굽의 문물을 다 배웁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무예를 다 터득해요. 그리고 나이 사십에 민족을 위해 뭔가를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았을 때 저지른 것이 살인. 동족을 돕는다고. 근데 동족에 의해 들통나고 바로는 수배령을 놓습니다. 하루 아침에, 왕위 계승 서열에도 가능했던 그가 광야에 초개와 같이 바람과 같이 40년. 보리 서말이면 남의 집에 처가집살이 안하는데 이방 땅 제사장의 아내를 맞는 바람에 남의 집 처가살이 초라한 목동으로 삽니다. 나이 80에, 뭘합니까? 인생을 자포자기 하고 절망가운데 던져져 있을 때. 한가로이 양떼를 뜯기고 있는데, 신비한 광경, 가시떨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가장 흔한나무. 이스라엘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거기에 불이 붙는데 타지 않아요. (!) 이 신비한 광경. 무슨 뜻일까요? 왜 타지 않죠? 단순히 그것을 기적이라고만 이해하는 것보다, 역사적 구속사적 의미가 담겨있어요. 불 탈 때 세 가지 가 필요해요. 재료, 불, 공기가 필요해요. 근데 이상해요. 가시 떨기에 재료가 타지 않아요. 불은 타올라요.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세요. 이중적인 메세지에요. 애굽의 용광로에 던져진 이스라엘 백성을 뜻하는데, 모세도 가시떨기 같은 존재에요. 공주 아들 아니에요. 사십년 초목에서 바람에 불리는 초개와 같은 목동잉에요. 들판 어디서나 만나는 가시떨기에요. 이건 기적이 아니라, 내가 앞으로 모세 너를 쓸 텐데, 실력 조건 때문에 너를 쓰는 게 아니다. (!) 내가 할 것이다. 하나님이 구원을 이룰 것이다. 모세가 아멘 하고 갔나요? 아직 꺾여지지 않아요. 이 꼬라지에 하고 말 안들어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쓸만한 조건이 아직 있다고 생각해요. 나일강을 피로, 지팡이를 뱀으로, 손을 희게 그리고 회복시킵니다. 세가지 사인. 가슴에 넣었는데 손이 문둥병. 인간의 문제가 가슴의 문제에요. (!) 죄인들은 나일강이 피로변한 것처럼 심판을 받습니다. 지팡이는 지도력의 상징인데, 생명에서 끊어졌습니다. 뱀이 되고 지팡이 되고 합니다. 지도력의 근거, 너의 실력, 배운 근거가 아니다. 말 못하는데요. 말잘하는 형을 주었다. 애굽의 구원 역사의 한복판에 던져져요. 가시떨기에 불붙은 것 처럼 모세의 조건을 사용하지 않으시는거에요. (!) 저도 마찬가지.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에요.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거에요.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보여줘요. 이제 나는 너희 시바라지 아니다. 나는 너희 대장이다. 몽골 국제 대학의 하버드 나오신 이용규박사 쓰신 내려놓음. 숨이 콱 막혔대요. 어떻게 그렇게 내려놓는지. 근데 서점 가보니까 더 내려놓음. 근데 다 내려놓음이라고. 자아가 철저히 부정될 때. 그분이 일하신다. 먼지같이 될 때. (!이게 성경적인가 한국적인 칼라인가)
Joshua 6:3–4 (KRV) 1 Corinthians 15:50–52 (KRV) Revelation 11:15 (KRV) Revelation 11:19 (KRV) Revelation 11:16–18 (KRV)
3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칠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작전을 이렇게 짜서 전쟁이 됩니까? 우선 제사장입니까 군인입니까? 제사장 일곱을 먼저 뽑아요. 종교인이지 군인이 아니에요. 그들에게 뭐라하냐면, 언약궤 앞에서 나팔을 불 것을 명합니다. 이건 완전히 군대 작전 개념으로는 뒤집어진 개념이죠. 적에게 자기 위치를 숨겨야 이깁니까 드러내야 이길 확률이 많습니까? 방금, 이 가나안 땅의 점령은 총칼로 빼앗아서 점령하는 싸움이 아니라 이미 주신 것을 순종해서 얻어 확인하는 싸움이라고 했어요. 제사장이 나팔을 불며 어린양의 자비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들고 성을 돌래요. 작전이라고 말할 수 없죠.
나팔을 불라. 성경에는 나팔을 말할 때 두 종류가 있어요. 전쟁할 때 쓰는 나팔과 다른 경우에 쓰는 나팔이 있어요. 전쟁 나팔은 하초츠라 라는 말을 쓰고 평화를 선언할 때 쓰는 나팔이 따로 있는데 그 나팔은 소파르 입니다. 영어 성경 우리 나라 성경에는 구분이 없는데 원문에는 정확히 구분되어 있어요. 그럼 여기는 어떤 나팔일까요? 소파르 라는 단어에요. 전쟁하겠다는 게 아니죠, 평화를 선언하는 겁니다. 어디땅에, 가나안 땅에. 하나님 군대가 들어가면서 평화를 선언해요. 그 나팔 부는 것 뒤에는 뭘 맨 행렬이 뒤에 있죠? 어린양의 죽음을 상징하는 언약궤가 뒤를 따라요.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어린양 예수 께서 오실 때 요단강에서 세례받으실 때, 뭐라고 하셨죠.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로다. 그냥 좋은 평화가 아니라 어린양의 죽음을 근거로 한 평화입니다.
뭘 기초로 진입하고 있죠? 어린양의 죽음을 기초로 진입해요. 제사장의 나팔 소리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와 평화가 임할 것이다. 성경 전체를 거쳐서 복음이라고 해요. 이 복음이 어떤 이들에게는 거치는 돌이 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살리는 돌이되요. 이 명제가 어디 앞에 던져집니까? 가나안 땅에 살던 여리고성 사람들에게 던져집니다. 영접하는 은택 을 입은 자들은 라합과 가족들. 들음에서 구원이 왔다. 그런데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과 멸망의 결과가 남아요. 왜 일곱바퀴일까요? 궁극적인 평화를 선언하는 복음. 어린양의 죽음을 기초로.
모든 세상을 향하여 갈 때마다 철철 흐르는 보혈의 공로로 일터와 삶에 진정한 평화가 선언되는 축복있기를 원합니다. 누가 선포해요? 제사장된 여러분들이 나팔을 날려야 해요. (!)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주시기 원하는 것은 이 땅에 평화를 주러 왔어요. 돈이 가져다주는 게 아니고, 술이 즐겁게 하는 게 아니라, 온 인류가 궁극적으로 목말라했다 수가성 여인의 온전한 평화를 말합니다.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하는 어리석은 인간이요. 네가 불행해야 내가 행복해진다. 저 사람이 불행해야 내가 잘되는 거에요. 그건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추구하는 정의로운 평화가 아니에요. 모든 만민에게 똑같은 온전한 평화가 선언되는 것이 진정한 평화입니다. 그것 제시하실 수 있는 분은 한 분,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어요. 가나안 땅에 예수를 앞세우고 하초츠라 가 아니라 소파르를 가지고 나팔을 붑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궁극적인 평화를 선언하는 자여야 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라. 이 나팔은 여러분들을 상징하는 제사장들의 손에 들려 있습니다. (!)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나팔은 결국 다시 오실 예수님으로 완성될 온전한 구원의 선포를 말합니다. 사망 권세가 깨치고 울려퍼질 그 나팔입니다.
일곱째 나팔 소리
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궁극적인 완전한 왕의 통치를 말합니다.
16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7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18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순종하는 자에게는 구원과 상을 베푸시지만, 순종하지 않는다면 여리고 처럼 심판아래 놓일 수 밖에 없다는 거에요.
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이 완성의 한복판에 뭐가 보여요? 언약궤. 상징적인 그림이었어요. (!그 안에 궤 안에 보물 상자 안에 작은 십자가가 날아올랐다는 마이클의 환상) 이 복음의 소식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 자녀되는 권세를 주었지만, 불순종하고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멸망밖에 남아있지 않다. 이 그림이 압축된 것이 여리고 전쟁이요, 계시록에서 정확히 알려진 그림입니다. (!)
Joshua 6:10–11 (KRV)
10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찌니라 하고
11 여호와의 궤로 성을 한 번 돌게 하니라 무리가 진에 돌아와서 진에서 자니라
침묵하라. 첫째, 인간은 말을 함으로 메세지가 많습니까 침묵함으로입니까? 말 해버리면 그거밖에 메세지가 없어요. 그런데 침묵하면 많은 메세지가 함의되어있습니다. (!) 말로 복을 다 쏟을 때 있어요. 동역했던 교역자들도. 말로 은혜를 다 쏟아요. 봉사 실컷 다 해놓고 말로 다 쏟아요. 잠깐 빌립보서에서, 하나님께서 광야생활 동안, 네 귀에 들린대로 행하리라. 불만을 들은대로 행하겠다. 광야지나면서 제일 내뱉은게, 이래서 죽겠고 저래서 죽겠고, 광야에서 결국 다 가셨어요. 정확히 누구의 말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내 귀에 들린대로. 이 언어가 복이에요. 한 혀에서 살리는 권세도 죽이는 권세도 있어요. 두 사람 야합 하면 교회 공동체 하나 간단히 말아먹습니다. (!)
침묵을 강조하지 않았다면, 명령으로 하지 않았다면 뒤에서 어떤 녀석이, 뭐야, 이거 똥개훈련이야 전쟁이야. 여호수아도 혼미한가봐. 부정적인 언어가 누룩처럼 빨리 전이가되요. 이 순종과 이 행렬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교회 공동체 뿐 아니라 조직으로 들어오면 마음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그래도 결과거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는 거에요. 그런데 생각나는대로 뿜어올라오기 시작하면, 조직과 공동체가 절대 안됩니다. 못돌아요. 왜 이거 끝없이 돌아, 돌아버리겠네. 일이 안되죠. 그런데, 더 중요한 성경적 의미. 어린양이 끌려갈 때 그 입을 열지 아니하며. 기억나십니까? 억울하게 무엇을 뒤집어 씌우고, 예수님도 입을 열지 않으셨어요. 순수하게 하나님 계획을 받아들이는. 적극적인 신앙보다 더 중요한 신앙의 태도입니다. (!) 침묵은 수많은 말보다 더 강력한 힘이 있어요. (!)
한 사람은 말이 없고 다른 사람은 말이 bmw boom mouth woman 폭탄의 말을 가진 여자. 무게 잡고 있으면 평균치는 먹어요. 근데 떠들때는 좋은데 나중에 후회막심한 일이 비일 비재합니다. 예수님도 그 입을 열지 않으셨어요. 하나님 계획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 침묵은 믿음의 테스트에요. (!) 온전히 순종하는가. 침묵을 명령치 않았다면 성 돌기는 불가능합니다. (!)
Joshua 6:25 (KRV)
Joshua 7:25–26 (KRV)
25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탐지하려고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었더라
오늘날까지 이 여인을 통해 구원의 메세지를 전해다준다.
25 여호수아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26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 극렬한 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날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아간도 오늘날까지 있어요. 라합도 오늘날까지. 성경기자가 일부러 대비해놓았어요. 6장과 7장. 요한복음에는 3장에는 수가성 우물가의 슬픔많은 여인이 메시야를 만나는 아름다운 이야기. 그 여인은 예수님이 찾아갔습니까 찾아왔습니까. 찾아갔어요.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내가 반드시 통과해야만 한다. 수가성, 피값으로 준. 슬픔많은 여인. 이 여인은 아무 기개 없이 또 먹으면 목마를 그 물을 마시러 나왔어요. 거기에서 예수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원의 정확한 그림이에요. (!)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사건이요.
4장은 니고데모요. 최고의 지성인. 회의가 많았어요. 그가 예수님을 한 밤중 눈길을 피해 찾아갑니다.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질문이 틀렸죠. 영생은 어떻게 방법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죠.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니고데모 박사님이 맹꽁이같은 소리를 해요. 어떻게 내가 큰데 어머니 배로 들어가죠. 3, 4장의 절묘한 대비입니다. 물론 나중에 예수님을 영접하죠, 담대하게 예수님시신을 요구합니다. 과정에서 물론 회개를 했지만, 3장과 4장의 대비를 통해절묘한 구원의 모습을 보여줘요.
라합이 여기서는 주인공이요, 어느날 사고처럼 찾아온 역사. 구원이 임합니다. 그러나 누릴 것은 영광뿐인 아간에게는 파멸이 옵니다. 둘 다 오늘까지 기억되고 있어요. 오늘까지 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