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 August 2019 Flashcards

Mark

1
Q

Mark 1:4 (KRV)

A

4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이 세례를 누가 받아요, 예수님이. 회개하실 죄가 있으신가요? 우리의 죄를 대신 속량하기 위하여 오셨어요. 새내기 새로운 예배 형식으로 드렸어요. 이렇게 예배 드려도 됩니까? 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드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사건 말이 되는 사건이에요 안되는 사건이에요? 말이 안되죠. 어떻게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세요. 창조주가 피조의 몸으로 오세요. 성육신 으로 망가짐으로 우리 생명을 구하셨어요. 그 은혜가 흘러들어왔습니다. 예배 자체가 예배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이 예배입니다. 한 영혼이라도 찾아서 생명을 구원해 내는 일입니다. 그 일이라면 망가진들 어떻습니까. 예배 순서 형식이 뭐 그리 중요합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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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Mark 1:10 (KRV)

A

10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올라오시고 성령님은 내려오세요. 맞물려집니다. 하나가 되어요. 요단을 건넌다. 물에 잠긴다. 그리스도인은 매일 요단을 건너요. 죽음 저 넘어 천국 가는 강이 아니에요.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의 출발지점을 말합니다. 백성들과 예수님이 뭘 천명하냐면, 천국 건너기 전의 강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 새로운 사역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가나안의 전쟁이었고 정복의 싸움이었습니다. 요단강에서 새로운 사역을 천명하시는 사건입니다. 첫번째 사인은 하늘이 열립니다. 정확하게 이 말은 하늘이 임하는 거에요. 하늘이 내려오는 거에요. 하나님 나라가 내려옵니다. 시편에 여호와께 가까이 함이 복이라.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야한다고 이해해요. 우리는 그럴 수 없는 존재에요.

비근한 예. 누가복음 15장에, 그지 몰골 된 아들로 아버지가 뛰어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가 가까워집니다. 성경에서 가깝다는 이야기는, 우리쪽에 주권이 없어요. (!) 예배도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시는 사건이지, 불러주시는 사건이지, 가까이 하실 때 우리가 가까이 갈 수 있는 거에요. (!스탠다드가 아니라) 예수님께 하늘이 가까이 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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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Exodus 20:1–2 (KRV)

십계명 (신 5:1–21)

A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주께서 베푸신 구원을 날마다 기억해야 합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이 말씀이 절실히 필요한 때가 더 없을 것 같습니다. 돈, 쾌락, 성공이 우상 되는 시대. 자녀들 마저 우상이 아닙니까? 우상이 뭐에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 더 우선적인 가치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 없으세요?

열 살 짜리 딸 하나가 디지털 카메라 사려고 자금을 벌었는데, 성경 보내기 운동, 안나가 동전이 섞인 저금통을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아빠 카메라 살 돈으로 성경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기로 했어요. 이 돈을 부쳐주세요. 그 돈을 그렇게 써도 괜찮겠어? 어떻게 모은 돈인데? 딸 아이가 답하기를, 물론이죠 아빠. 크리스쳔이라면 꼭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아니 어떻게 열살짜리 아이가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 아이도 크리스챤이었기 때문에 입니다. (!)

왜 옛날 얘기 꺼내고 있을까요? 잊지 말라. 어떻게 크리스챤 되었는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잊지 말라. 죄와 허물로 망가진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전적인 하나님 은혜. 그것을 날마다 기억한다면 우리 하나님만 섬길 수 있지 않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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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Q

Exodus 20:3 (KRV)

A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하나님을 인생의 최우선 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21세기 리더 스쿨 안에서 아이들을 훈련시킬 때. 무엇보다 우선순위를 잘 정해야 한다고 가르쳤고, 이렇게 훈련했습니다. 열 장의 카드 몇묶음을 자녀와서 한 묶음씩 나누어줍니다. 한가지씩 그 카드에 적도록 하여라. 적기 시작합니다. 그 후에, 자, 너희들 앞에 책상에다가, 그 열가지 소중한 카드 중 한 장을 내려놓아라. 한장을 버려라. 가장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것 버립니다. 한장 더 버려라. 또 버려라. 언제까지. 두 장 남을 때까지. 그럼 아이들 손에는 두 장. 이제 그 두 장에서 한가지 더 버려라. 그 때, 우왕좌왕 할 때. 한녀석은 웁니다. 한장에는 엄마, 다른 한장에는 아빠를 썼습니다.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그래도 버려라. 주저없이 아빠를 버렸습니다. 아이들에게 우선순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마지막 한 장에 너희의 인생을 걸어라. 후회없는 인생 살기 원한다면, 그 마지막 한 장에 너의 인생을 걸어라. (!)

하나님의 10가지 우선순위 라는 책. (!) 최우선순위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3절입니다.

시내 산 정상에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 왜 이것이 첫째일까요? 인생의 최우선 순위가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뒤로 밀리면, 우리 인생은 무너지고 맙니다. 이것이 뒤로밀리면 아무리 부와, 명예와, 권력과, 남부러운 인생 살아간다할지라도, 코끝에서 호흡이 멈추는 순간, 후회가 밀려올 것입니다.

코리텐붐. 내 아버지. 시계방 사업. 기쁘고 즐겁게 일을 도왔다고 합니다. 경제적 위기에 처하자. 어느 날, 잘 차려입은 신사가 값비싼 시계들을 보았습니다. 코리라는 이 딸은 아빠와 신사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그 시계가 팔리도록 기도했습니다. 제가 찾던 시계입니다. 안주머니 손을 넣고 두툼한 지폐 뭉치를 꺼냈습니다. 코리는 순간, 주께 영광을 돌릴지어다. 드디어 현금이다. 바로 그 때, 말했습니다. 혹시 여기 좋은 시계공을 아세요? 그 사람을 아는데, 벤 휴턴. 코리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벤 휴턴은 죽었고, 그 아들에게서 샀어요. 그 말을 들은 아버지. 손님, 그 시계를 볼 수 있겠습니까. 시계 뒤를 열어 조절하고 도로 주었습니다. 여기있습니다. 아주 작은 착오. 이제 시계가 잘 갈 것입니다. 젊은 시계공을 신뢰합니다. 그도 그 아버지처럼 좋은 시계공입니다. 시계를 하나 사주셔서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없이 사업의 어려움을 당하면 제가 돕겠습니다. 제 시계를 돌려주십시요. 돈을 돌려주었고 정중히 인사하고 보냈습니다. 코리가 뛰쳐나와 아빠,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대답했습니다. 코리, 내가 벤 휴턴 씨 장례식에 복음 전했던 거 기억하니. 코리 아버지는 크리스챤으로서 장례 때 장례를 인도하곤 했어요. 그 젊은 사람이, 자주 오던 손님이 텐붐씨한테 갔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할까. 주님 이름이 영광스럽다고 생각하겠니? 축복의 돈과 저주의 돈이 있단다. (!)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아오지 않았니. 그분은 수많은 언덕의 양들을 키우시고 또 우리를 돌보아 주실 거야. (!)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저녁에 생각하기를, 어떻게 하면, 나도 아버지처럼, 그런 믿음과 신뢰를 가질 수가 있을까? (!닉)

어린이 주일, 아무리 자녀가 장성해도 어린아이처럼 느껴진다 하죠. 언젠가 자녀 얻을 때, 무엇을 주시고 계십니까. 그 자녀들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가족. 오직 주님만을 섬기는 예배하는 가족. 그것 주지 않는다면 오늘 자녀들은 믿음의 길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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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Q

Mark 1:41 (KRV)

A

41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깨끗함 받으라 했지 치료받으라 했어요? 종교적 언어입니다. 핵심적인 문제. 가끔가다가 기도 많이 하시는 분들, 많은 기도에서 역사가 있습니다. 이렇게 오해해서는 안돼요. 기도 많이 해서 기도 응답받았다는 공식이 없어요. 시간의 양의 조건에 있지 않아요. (!) 항상 모든 기도응답과 구원의 역사는 그분의 자비와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 우리 기도도 마찬가지에요. 율법적 기도를 피해야해요. 저 사람 왜 고생할까, 기도 안하잖아. 정죄까지 합니다. 율법적 사고의 독선입니다. 자비만 기초되어야 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예배해야 해요. 혹이라도 그분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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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Q

Psalm 84:1–3 (KRV)

A

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제단에서. 누군가 희생 제물이 죽어지는 곳입니다. 오셔서 그리스도가 죽으실 자리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는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는 은총을 누립니다. 이 기초에는, 그리스도의 죽음이에요. 나 환자는 깨끗함을 받고 구속의 은혜를 노래하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삶에서 뼛속 깊이, 내가 이렇게 그리스도의 아픈 죽음을 통해 피어난 자유한 생명이라는 것 잊지 않는 또 한 주 되십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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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Q

Mark 1:30 (KRV)

A

범죄한 인간의 첫째 현상은 하나님을 피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그렇고 아담이 그랬습니다. 영적인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습니다. 엘리야도 동굴 속으로 도망가죠. 그 길 끝에 주님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그 때마다, 네가 땅 끝에 도망갈지라도 (!!) 음부에 자리를 펼지라도 내가 거기에 있겠다. (!파리 오층, maid apartment) 집요한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시며,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심방하셨어요. 예수님이 몸을 입으시고 오신 사건. 성령님까지 우리 안에 집어넣어 주세요. 전부 심방하시는 사건.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베드로가 장모님을 모셨던 것 같아요. 아침 저녁으로 얼굴을 맞대는 그런 관계. 열병. 이 열병은 명사로 되어있지 않아요. 말 그대로 질병일 텐데, 동사 분사형으로 되어있어요. 어떤 상태가 반복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싶었던 거에요. 원문을 보면 열을 받아서. 열을 받아서 생기는 병이 뭐에요? 홧병. 한국 사람들이 제일 잘 알고 있는 문제 아니에요. 한국 사람들 화 많은 거 아세요? 느긋하지 못합니다. 의외로. 운전하다 거리에 가보면 대번 알아요. 별 쌍욕을 다 듣습니다. 한국 사회의 분노가 위험한 수준이에요. 어린아이들 가운데에도 분노 조절이 안되어서 얼굴에 화기가 있어요. 안에 이 화기를 절제하지 못하고 해소하지 못해서 얼굴로 나와요. 끔찍해요 그 얼굴 보면. 홧병 무서워요. (!Anger I need to control) 어떤 반복되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반복되는 동작. 누웠다 일어났다. 이런 상태에 놓여져 있습니다.

사실 어머니 고생하시죠, 장남이라는 놈이 시커먼 가방들고 총신대 왔다갔다. 저희 이모. 집안 형편 안돌본다고 욕했어요. 워낙 입이 거치세요. 이북 분이세요. 말이 세고 욕도 잘해요. 쌈도 잘하고. 저희 어머니 이북분이에요. 이 가정이 그런 가족 구성원 간의 문제에요. 그러자 예수님이 인생의 문제를 간과하지 않으시고 심방하십니다. 심방해야 합니다. 직장으로 가야해요. 안나오면 좇아가야 해요. 언제까지. 끝까지. 제 인생의 철학은 끝까지 하는 겁니다. 그형제가 나올 때까지. 그 자매가 나올 때 까지. 주님이 나를 그렇게 포기치 않았어요. (!) 우리같은 진상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어요. 그 구속의 은혜가 내 속에 분명하고 확실했기 때문에, 인간적 끈질김이 아니라, 성령으로. 한 영혼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소탐대실하지말고 기차는 가는 거야. 무시할 수 있어요. (!주여) 아니요. 하나님 일하는 사람들은 작은 것에도 최선을 다합니다. 맹수가 먹이감을 포획할 때 대충하지 않죠. 작은 것도 사력을 다합니다. 우리 주님도 그러셨습니다. 소자 한 사람도,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셨어요. 똑같이. (!) 무슨 일을 하든지, 십자가의 기본 정신에서 시작해야 해요.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렇게 이 집에 심방을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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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Q

Matthew 8:14–15 (KRV)

많은 사람을 고치시다 (막 1:29–34; 눅 4:38–41)

A

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사람이 손 맞잡는 것은 중요한 교제의 수단이거든요. 어르신들 만나든, 어르신들은 그냥 안아주세요. 다 보는 자리에서. 손을 잡아 일으켰다.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에게이론. 부활의 용어입니다. 권능이 예수님의 손을 통해서. 죽은 영혼이 회복되고 병든 마음이 고쳐져요. 예수의 생명이 들어가요. 에게이로. 일으켰다. 이 여인이 살아났다. 물질적 세계에 가득차서 그것만 바라봐요. 처자식은 어쩌라고. 이게 당연한 장모님의 근심과 염려일 거에요. 그것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가슴 한복판에, 인생을 바꾸는 불덩어리가 들어온 것입니다. 여기 철저하게 주님이 주도적입니다. 고쳐주세요 이런 호소도 없어요. 일방적으로 찾아오시고 손대시고 일으키는 역사에요. 그렇게 구원은 시작되고 일어납니다. (!) 에게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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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Q

Mark 10:45 (KRV)

A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최초로 마가복음 기자를 통해 육신의 병을 고쳐낸 개인의 기록현장이 오늘 베드로 장모의 열병 고치는 현장입니다. 어떤 결과물로 나타났냐면, 일으킴을 얻고 어떤 자로, 섬기는 자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수종드는 자. 수종든다 에서 집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수종드는 자에요. 집사라는 자의 말의 어원은 밥상 옆에서 서빙하다. 섬기다. (!) 마가복음 전체의 굵은 주제입니다. (!그래서 다 잘 안하려고 하는구나)

아이패드 사용하세요? 팟캐스트. 팟방이라 하죠. 유익한 방송, 좋은 강해들이 어마어마하게 올라와있어요. 테드. 맛있는 교회사 이야기. 감신대 이덕주 교수. (@) 구수하게 옛날 얘기하듯 들려주셔서 듣다가 뭘 들었냐면.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에 가면. 삼대가 묻혀계십니다.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님. 캐나다의 1860년도에 태어났고 빈민들을 위해 헌신하는 각오로 의사가 됩니다. 의대에 진학해요. 그리고는 뉴욕으로 나와서 학교에 다닙니다. 뉴욕 퀸즈 의대. 학교 졸업하고 실습생으로 병원에 들어갔다가 운명의 여인과 눈이 맞고, 로제타 라는 여인. 굉장히 유명한 여인. 펜실베니아 의대를 선교를 위해 입학한 여자에요. 어느 병원의 실습생으로 들어갔다가 두사람의 뜻이 비슷해서 교제가 이루어지고 만남이 일어나고 약혼합니다. 남자는 중국 선교사로, 여자는 오로지 한국에 여의사가 없다고 해서 의학을 준비하던 특이한 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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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Q

Mark 1:21–23 (KRV)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시다 (눅 4:31–37)

A

21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이사야 선지자의 글에,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바벨론 포로 당시에, 이스라엘의 고역의 생활을 끝내고 그들에게 자유가 임할 것을 이사야 선지자가 예고한 그림입니다. 위로는 나훔. 가버나움. 가장 거룩한 공간과 시간에 더러운 영에 귀신에게 묶인 자. 위로가 뭘까요? 귀신의 억압에서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자유케 해주세요.) 억눌린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어요. 예언의 성취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1절.

이 대조되는 풍경을 그냥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 첫사역지는 나훔의 동네.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해방과 자유를 주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첫 선교지로서 위로의 마을에 오셨습니다. 자유케 하고 풀어주기 위해 선교 가는 거에요. 신앙적 긍지를 가지고 가세요. 예수님이 먼저 가셨고 우리가 그를 따르는. 나를 따르라.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우리입니다. 베드로의 어줍지 않은 고백에, 사단아 물러가라, 내 뒤로 물러가라, 베드로보고 하세요. 베드로야, 사탄의 속성처럼 놀아나지 말고 내 뒤에 서라.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대로 쫓아와라. (!앞에가지말고, 사탄의 논리에 놀아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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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Q

Mark 1:24-26 (KRV)

Romans 7:22–23 (KRV)

A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이 잘 아는 것 같죠? 마지막 표현에,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이 표현은 헬라말에, 그 당시 어떤 표현이냐면, 헬라에 가장 큰 제우스 신입니다. 제우스 신에게 존칭하는 호칭을 성경에다 도용해서 씁니다. 귀신이 예수를 제대로 안다는 얘기입니까 모른다는 얘기입니까. 아무 인격적 관계가 없어요. 딱 하나는 예수님 오신 목적을 자기 입으로 말했어요.

2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꾸짖다. 입을 닫게 했다. 잠잠하다는 입닥치라. 무당들은 굿 하는 거 보셨죠. 귀신을 야단치고 좇아냅니까 귀신을 달랩니까. 무속신앙은 신을 달랩니다. 하나님은 그런 귀신들을 달랩니까? 참아, 참아. 꾸짖고 야단쳐요. 생명이 다른 것이기 때문에. 잠잠하라 는 입다물어라. 풍랑을 꾸짖었어요. 풍랑은 세파. 세상의 풍조를 얘기합니다. 세상의 풍조를 향해 편하게 친하게 비슷하게 지내는 게 아니라 입을 닫아라. 교회가 세상을 향해 소리쳐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런데 이거 안하죠. 공격들어올 까봐. (!) 역사속에 교회는 이 일을, 이 기능을 상실할 때 교회가 무너졌습니다. (!) 어두움을 꾸짖는 책망의 기능이 있어야 합니다.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스파라소. 어떤 학자는 간질병으로 이해했더라구요. 이 옷같은 것을 양쪽에서 잡고, 힘이 팽팽하면 한쪽이 부르르 떱니다 힘이 딸리니까. 그럼 이게 찢어져요. 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거에요. 사도 바울이 절묘하게 표현합니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어둠의 권세가 내 인생의 한 끝을 붙잡아요. 한 기능이 육체의 한 소욕을, 그리고 성령이 한 소욕을 붙들어요. 이게 정상이에요. 비명을 질러요 이걸 놓으려고 하니까. 얼마나 이 내면의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지 봐야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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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Q

Mark 1:27–28 (KRV)

A

27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예수님의 교훈과 가르침은 곧 능력입니다. 사복음서에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나갈 때 귀신이 축출되어요. 귀신은 택한 생명들을 붙잡고 있어요. 말씀이 선포되면서 축출되어요. 이게 새교훈이요. 지금까지 회당에서는, 말씀은 말씀, 교훈은 교훈, 삶은 아니고. 율법사의 가르침이요. 예수님의 말씀은 능력이 되고 삶이 변하고 새 생명 새 빛이 임했다구요. 그런데 이 소문이 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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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Q

Mark 1:14–15 (KRV)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다 (마 4:12–17; 눅 4:14–15)

A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꽃길 깔고 꽃가마 태우는 것 아니에요. 평생 욕먹는 역할, 박수 갈채 받는 역할 맡을 수 있어요. 누가 더 낫나? 비교할 수 없는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시각에서 인식해야 해요. 세상의 돌팔매질, 비난 받는 역할을 하다가 자기 책무를 다하고 목베임 당하는 참수형을 당하고 숨져갑니다. 그것이 그의 삶의 역할이요, 멋지게 살다가 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다. 복음이라고 하면 안되나요? 의도가 있어요. 뭔 의도가 많냐? 성경은 의도로 가득차 있습니다. 겉읽으면 안됩니다. 말씀에 집착해서 여기 어떤 의도가 있는지, 한 일획이라도 놓치려고 하면 안됩니다. 하나씩 하나씩 붙들도록.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 읽고 또 읽고, 이 행간이 뭘까. 날 좋아한다는 걸까, 고려한다는 걸까, 되씹고 주야로 묵상하고, 성경은 그 이상의 책이에요. (!) 곳곳마다 묻어있다는 걸 알아야해요. 왜 하나님의 복음이라 그랬을까. 기독교만 썼던 말도 기독교의 말도 아니에요. 유황겔리온은 로마황제의 명령입니다. 그 시대 살았던 사람들은 복음은 황제의 명령인 것을 누구나 알았어요. 황제의 명령은 주로 어떤 내용 담고 있는가. 첫째, 로마는 온 세상에 걸쳐 전쟁 벌였습니다. 항상 이겼고 정복자였습니다. 반드시 그 국가에 세금을 어마어마하게 부과합니다. 식민지 국가에 세금 부과의 명령은 로마 황제부터에요. 로마 시민들에게는 부가 들어오니까 복음이에요. 식민지 국가에는 복음일 수 없죠.

또 한 가지. 언제 사용하냐면 군대를 파견하고 황제의 소식을 알리기 위해 어마어마한 도로를 닦았어요. 지금도 가면 도처에 있고 토목이 발전되어서 2천년 전에 걸친 길과 하수도를 지금도 써요. 굉장하죠. (!) 황제의 명령이 내달리는 도로, 거기에는 로마 제국이 만들어지고 형성됩니다. 유황겔리온입니다. 그 때 로마는 온 세상을 향해, 황제의 명령은 평화를 가져다 주는 자, 선포했어요. 인간이 만들어낸 복음, 평화입니다. 로마 황제에 의해 터치되는 복음은 반쪽자리에요. 온 만 인류는 로마 중심적 평화요, 복음이었어요. 굿뉴스. 세상의 복음이었어요. 오늘도 반쪽 자리 복음이 우리의 귀를 속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한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 만민에게 전해지는 복음과 구원이에요. 그냥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 이라고 합니다. (!)

복음을 전파하셨다. 케루소. 선포하셨다.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설교속에 던져지는 주된 메세지는, 하나님 나라의 주제가 빠지면 옳지않습니다. 모든 설교가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 땅에 관한 것은 더 똑똑한 학자요, 전문가 많습니다. 그런데 자꾸 세상을 베껴오죠. (!) 그러면 사람들이 들을거라 착각해요. 세상 것을 조금 고상한 거 들어러 와요? 아니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으러 옵니다. 새롭게 증언하고 선포자가 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여러분들이 기도해주셔야 합니다. 주님은 그의 사역을 이렇게 시작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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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Galatians 4:4 (KRV)

A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무엇때문에요? 하나님의 계획된 결정적 시간이 와서. 여기서 때가 차매라는 말은 뭘까요, 온 세상이 절망에 빠져있었어요.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도 절망스러웠던 시대. 온 천하 백성은 로마라는 강력한 국가 밑에, 힘의 물리적인 지배 아래서 장탄식을 터뜨리며 신음해 있을 때. 온 백성 마음 속에는, 더 지독스럽게 주님이 언제 오실까. 그 날만 대망하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메시야 대망 사상이 절정에 달할 때입니다. 그분만이 오셔서 이 어려움을 해결해주실 수 있다는 믿음과 소망 때문에. 그 때가 찼다. 그와 같은 원리로 이 시대로 보면, 정말 주님 다시 오실 시간이 가까이 오셨으리라 믿습니다. 이 주변의 여러 징조를 보면, 성경에서 예고하셨던 모든 징조와 징후들이 도처에서 보여지고 만져지고 느껴지고 있어요. 감정과 육감과 감성을 뛰어넘어서 이 시대의 징조들을 설명한 것이 근대사에 펼쳐지고 나타나고 정말 그 때가 찼어요. (!) 우리교회는 더욱 더 그 다시 오실 시간에 집중해야 해요. 그 정점을 향해서 우리 인생의 모든 타임 스케쥴을 맞추어야 해요. 더 조이고 맞추어서 우리 온 인생을 드려야 하고 떠나야 합니다. 장흥으로, 목포로, 일본으로 떠나서 화급하게 절실한 마음으로 절벽 벼랑끝에 서 있는 그를 붙들고 이리로 가면 죽어! (!) 소리라도 질러야 해요. 소리라도 못질러요. 내가 어찌할 수 없으면 여기 사람 빠졌어요. 된장찌게 잘먹었습니다. 집사님이 잘 먹고 소리지르라고 밥상 잘 차려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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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Q

Mark 1:16–20 (KRV)

제자 넷을 부르시다 (마 4:18–22; 눅 5:1–11)

A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17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짧은 앞부분 14-15 에서 왜 예수님이 오셨고 세례 요한은 왜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되는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어요. 항상 그런데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해도, 별도, 천지를 지으실 수 있는 분이에요.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시는데 쓰신 방법은 사람을 준비하여 사람을 통해 하십니다. (!) 교회 기초를 삼으실 열두제자를 부르시기 시작하세요. 열 두 사도를 통해 이 땅에 교회를 기초놓기 위해서. 성경의 사도는 단회성이에요. 오늘날 목사는 사도적 계승자요 사명자도 아닙니다. 목사가 사도다 하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교회의 네 역할, 사도, 집사, 이런 것은…?) 정신, 가치, 목적지, 공유하여 그 뒤를 따르는 주의 종들일 뿐이에요. (!그게 그거 아닌가) 존재해서 감당해야 했던 역할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도로 부름받습니다. 복음전파가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역입니다. 모든 우선적 가치입니다. 그러기 위해 사도를 부르고 교회를 세웠다.

부름입니다. 부름. 이 부름이. 어디에서 일어납니까? 어부역할을 했던 삶의 현장에서 부름이 일어납니다. 보통 부름을 콜링. 소명이라 합니다. (삶의 현장…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삶의 현장… 하나님이 이루셨다) 내칼 내션. 콜링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옵니다. 소명 또는 부름, 또는 직업을 얘기합니다. 어부들의 직업이 바뀌나요 안바뀌나요. 똑같이 어부죠. 그런데 속 내용이 바뀝니다. 지금까지 고기 낚는 어부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 직책을 이용해서 내가 너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중요한 과제. 이 부름이 삶의 현장에서 일어났다. 학교 선생님은 학교에서. 방송인은 방송 현장에서. 가정 주부는 가정 현장에서 부름이 일어났다. 곧, 주부 다 때려치고 방송 때려치고 나서자. 이 얘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 삶의 자리가 새로운 소명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그 삶의 현장에서 콜링이 일어났어요. (vs 다 끊어야 한다)

모 대학에 강의하고 있는데 강력하게 하나님 소명이 있습니다. 제가 신학을 해야 할까요? 이런 질문들. 소명에는 두가지 차원. 내적 외적 소명이 있습니다. 문제는, 외적 소명은 객관적인 기준과 평가로 이 사람이 목사로서 전적인 전임 사역으로 소양과 인격과 모든 것이 합당하다. 객관적으로 교회 커뮤니티에서 평가해줍니다. 내적 소명은 근데 힘들어요. 하나님과 나 사이에 밖에 없어요. 내가 받았다는데. 천하 누구도 말릴 수 없어요. 여기서 많은 문제가 일어나요. 해주는 대답. 그 현장에서 하나님 일을 하십시요. 지금까지 밥벌이였다면, 그 현장에서 복음 전하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십시요. 그럼 직업과 현장은 바뀌지 않지만 거기서 하나님의 일꾼이되는 겁니다. 그 부름의 현장이삶의 자리에요. 이렇게 부름받은 사람들은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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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Q

Mark 1:18 (KRV)

Mark 1:19–20 (KRV)

A

18 곧 그물을 버려두고 좇으니라

부름을 받은 자는 반드시 버림을 겪습니다. 반드시 포기해야 합니다. 다니엘 서에 뜻을 정하여. 뜻을 정하는 것은 포기해야 하는 것을 전제합니다. 반드시 내려놓아야 할 것이 분명 있습니다. 그걸 움켜쥐고 따를 수 없어요. 사도바울이, 나는 좇아가노라. 달려가노라. 더 좋은 곳을 위해 덜한 이익을 내려놓다. 이것이 일상속에 반복됩니다. 무슨 싸움이냐면, 더 좋은 가치를 위해 덜 좋은 가치를 매일 포기하는 그 싸움이요. 더 좋은 가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 이 땅의 소멸되어질 사소한 이익을 매일 내려놓는다. 일상속에 매일 임합니다. (!) 이런 갈등이 매일 쑤시고 들어와요. 계속 내려놓는 싸움. 양쪽을 다 움켜쥐고 부름에 응할 수 없어요. (!어떻게 내려놓을 수 있습니까)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저희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비 세베대를 삯군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 무슨 관계죠? 성경에 나타난 용어를 빌려쓰자면, 언약의 관계입니다. 성경 다 뒤져보세요. 하나님은 절대 종과 언약하지 않습니다, 자기 백성과 자기 자녀와 언약해요. 성경에 나타난 베리트라는 언약은 일방적인 언약입니다. 상대가 이 언약을 지켜낼 실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제는 종과 언약하지 않습니다. 종은 부리고 시켜먹으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를 언약 백성으로 부르십니다. 소명을 주시고 일을 시키되 우격다짐으로 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계약은 대등한 관계에요. 이 자체가 감격이에요. (!) 근데 우리가 하나님과 대등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 언약은 베리트, 일방적인 계약. 아들을 내놓으시고 죽이시고 그 죽음을 걸고 약속하셨다구요. 틀림없이 내 백성인데 계약하겠다. 저쪽이 이행할 실력이 안돼. 근데 해요. 안될 것을 뻔히 알고도 해요. 그런데 깨지지 않아요. 그리스도 때문에. 그 아드님의 목숨을 담보로 사랑의 언약을 하세요.

하나님 우리를 생각하시는 것이 대등한 인격으로 부르시고 사역을 감당케 하십니다. 제일 밑바닥 깔리는 성도의 전제는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그분이 신실하시기 때문에. 끝까지 감당해주시는. 아들을 걸고 사랑해주시기 때문에. 그 안에 우리가 머물러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세요. 율법적인 따름, 부담의 따름, 위험의 따름 보다 그분을 사랑해서 순종하고 사랑해서 따라갈 수 있는 그 계약, 하나님이 완성하신 그 계약, 온전히 따를 수 있는 축복이 있기 바랍니다.

17
Q

Mark 1:12 (KRV)

시험을 받으시다 (마 4:1–11; 눅 4:1–13)

A

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자칫하면 시험의 주체가 사탄인 줄 알아요. 그런데 정확하게 성령님으로 밝힙니다. (!) 이 말이 갖는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겠습니다. 한 번은 지나가다가 강력히 촉구하라 이거를 족구에 미쳐서 강력히 족구하라 내눈에는 보였어요.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는 예수님이 성령이 임했을 때 내면적 충동. 멀쩡히 직장생활 하던 사람이 내적인 성령의 충동에 의하여 다 내려놓고 무작정 가는 거에요. 내 몰리는 현상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내몰렸다는 피동적으로 등 떠밀어넣었다 가 아니에요. 성령이 충만히 임하니까 (!) 제어할 수 없는 충동에 뭔가에 붙잡혀서 광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사실 삶의 기조가 이런 식으로 살아져야 해요. 우리는 자아가 너무 팽배하다보니까 강권적인 성령의 내몰림을 자꾸 타협하고 계산하다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 성령님이 충만히 계시고 그 상태가 내 안에 영적인 예민함으로 작용할 때 그 때는 내몰리는 거에요. (!) 그런데 사탄의 어두움이 가득할 때는, 혈기, 분노, 잘못된 관점이 멸망의 쪽으로 그 인생을 몰아가는 겁니다. (!)

한글 성경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문제 하나가 있어요. 마가가 이 글을 쓸 때에는 후대에 썼으니까 과거이죠. 마가는 이 모든 동사를 현재형으로 씁니다. 과거 시제로 안썼어요. 몰아내셨다. 에크발로. 원래 쓰려면 과거 시제로 써야 해요. 시제를 몰랐을까요? 모를리 없죠. 알았습니다. 그런데, 성령께 붙들려 이 글을 쓰면서, 과거에 벌어졌던 일을 현재 시제로 썼어요. 이유는, 그 때 끝난 일이 아니라 오늘 성도들의 인생살이 속에 계속 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 진행되어져야 하는 일이에요.

18
Q

Mark 1:13 (KRV)

A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민수기 출애굽기 레위기, 광야를 지나가요. 사탄의 세력을 상징하는 개념이요. 여러분들이 던져진 그 공간이 광야입니다. 광야가 갖는 강조점은 그 의미이기 때문에 형용사로 쓰였어요. 어떤 곳이에요? 무서운 죽음이 부글부글합니다. 내장탕, 산채비빔밥, 눈깔 사탕이 있는. 끔찍한 곳. 낮에는 살인적인 햇빛. 죽음에는 추위. 차이가 50도. 사람 살 공간이 아니죠. 예수님이 내적인 충동에 이끌려서 광야로 들어가요.

일터가, 캠퍼스가, 가정이 광야에요. 스윗 홈 아니에요. 교회에서 은혜받고 구원열차 한바탕 하면 천국같아요 할렐루야 아멘. 저 문을 나서는 모든 성도들이 축도까지 받고 갔어. 은혜 충만해서 다 일어납시다. 그러나 대문을 여는 순간, 거기에 원수들이. 여러분들의 가정은 안그러겠지만, 때로는 그렇게 내몰려요. 오늘도 이 자리 앉은 성도들 가운데는, 내 아침에 출근해서 그 인간 볼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고 하루가 천일 같아요. 광야. 살 수 없는 곳. 일상이 광야에요. 광야에 세워진 교회에요. 광야 교회. 그럼 교회는 눈물을 닦아주고 수용해주고 위로와 격려가 있는 곳이에요. 미션의 개념도 있고 훈련의 개념도 있지만 또 하나의 축이 교제의 개념이요. (!)

19
Q

Mark 15:38 (KRV)

A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아래부터 위로 찢어져야 맞는데. 운명하시는 순간,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집니다. 이 말은 인간이 찢었습니까, 하나님이 찢었습니까. 이때부터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었고 이 일을 위해 자기 몸을 십자가에서 찢으십니다. 처음부터 마가복음은 하늘이 찢어지고 아들의 몸이 찢어지고 휘장이 찢어지는 것을 기록하고 그 새롭고 산 길로 생명을 우리는 얻게 됩니다. (!)

인간에게는 참된 안식이 없습니다. 주님은 안식의 주로 오셔서 수고하고 짐진자들아 다 나에게 오라. 참된 안식을 위해 왔습니다. 십대들, 어쩌다가 대한민국 에 태어나서, 성적이 뭔데, 성적에 불행하게 밀어붙입니다. 그러지 마세요. 성적 안나오면 인생이 망가집니까. 푸쉬하고 아이들을 압박합니다. 성적 때문에 고층 아파트에서 몸을 날려요. 이게 무슨 재앙입니까. 뭐라고 설명을 할 수 없는 아픔이 있어요. 다시는 재현되서는 안되요. 애들마저도 안식이 없어요. 예수만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으로 들어오십시요. 예수께 집중할 때 거기서 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분만이, 그분을 찢어짐으로 산 길이 열렸어요. 들어오십시요. 해다가 열심히 바치려고 하고 열심히 해보려고 하지말고 그 분 안으로 들어오세요. (!)

부모 뱃속에서 태어나고 또 언제 태어납니까, 결혼할 때 또 새롭게 태어나요,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새로 태어납니다. (!) 병아리 알껍질 안에 있을 때 그게 우주에요. 때가 되어서 쪼고 깨고 나오면 상상할 수 없는 세계가 또 나와요. 물질 세계에도 이런 논리가 있는데 인생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갈 때 비교 상상할 수 없는 부요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할까요. 한 번 경험하면 세상이 박치기하고 흔들어도 담대할 수 있어요. 주님 안에서 가질 수 있는 자세입니다. 그 새롭고 산 길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 쉼을 얻기 위해 찢으셨어요. 하늘이 갈라지고 성소의 휘장이 갈라져요. 예수 이름으로 그 안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 진리의 세계로, 말씀을 따라가다가, 인생의 전후무후한 인생의 대박을 만나시기를 축복합니다.

20
Q
Acts 13:13 (KRV)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도하다
1 Peter 5:12–13 (KRV)
끝 인사
Mark 1:1 (KRV)
세례 요한의 전파(마 3:1–12; 눅 3:1–9, 15–17; 요 1:19–23)
A

13 ○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중도하차해요. 밤빌리아 가려면 마치 태백산맥을 넘어가야 하는 거에요. 넘을 자신이 없었던 걸까요? 여러가지 설이 있어요. 그 중, 하나는 부자집 아들이어서 고생을 안해서 그랬다. 아마 풍토병이 걸려 돌아갔을 것이다. 갈등 때문에, 바울의 일 중심적 행태에 환멸을 느끼고 돌아갔을 것이다. 가장 압도적인 것은, 향수병 이라는 통계가 나와 있어요. 딱히 이거다 라고 사실상 몰라요. 준령을 앞에 두고 마가는 중도하차하게 됩니다.

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13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바벨론은 로마교회를 말합니다. 그런데 마가를 베드로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았다. 베드로의 통역관으로 일했다는 기록이 여기 저기 있습니다. 베드로가 마가를 성숙시킨 것입니다. 실패를 알고 싶다면 나에게 물어봐. 베드로입니다. 마가가 길 가다가 자포자기 했어요. 베드로가 그를 바라보며 처참한 영적인 상황을 보고 자기 수하에 들이죠. 넘어져 본 사람만이 아는 실패의 자국이죠. 세번씩 주님을 부인했던 가슴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어요. 베드로의 눈에 비친 마가는 자기보다 나은 인물이에요. 내 밑에 와라. 기죽을 것 없다. 너의 형님은 어땠는 줄 아니. 그 마가를 고쳐냅니다. 그래서 마가는 사실상 베드로의 영향력을 가장 많이 받아요. 마가복음 1장 1절이 증거입니다.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베드로의 언어에요. 베드로의 영향을 받은 필체입니다. 베드로의 고백. 복음이 갖는 용서와 화해의 복음의 능력을 이렇게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때는 이 길이 너무 힘들어서 삐딱선을 탔지만, 평생의 자국을 가지고 극복해냈던 베드로와의 만남을 통해 유익한 사람으로 바뀌고, 사복음서 중 가장 위대한 서신이 쓰여지지 않습니까. 마가가 썼어요.

그런데 왜 이 서신을 쓰게 되었는가? 목적이 중요하죠. 때는 바야흐로 AD 64년. 인류 역사속에 유명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대화재. 네로가, 방화범이라는 소문이 로마 시내를 돌아다닙니다. 전체 열 구역 중 세 구역이 완전히 화재로 소멸되었어요. 서울시 말하면 세 개의 구가 불바다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시상이 떠오르지 않는 정신 착란증으로 네로 황제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돌아다니기 시작하고 정권잡은 자들이 반란에 불안해지죠. 예수 쟁이들에게 이 누명을 뒤집어 씌우자. 어마어마한 검거가 시작됩니다. 원형 경기장에 짐승의 옷을 씌우고 잡아먹히게 합니다. 톱으로 켭을 당하며. 끔찍한 고난이 예수 믿는 자들에게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견딜 수 없는 폭풍우가 시작됩니다. 절망이 찾아옵니다. 이제 끝이구나. 다 죽는 구나.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다. 정말 하나님 살아계시는가? 그 아들 예수는 어디계시는가?

존 티모.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라는 책. 어깨를 다 늘어뜨리고 있을 때. 살금살금 소문 하나가 돌아다닙니다. 조그마한 소책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집니다. 그 책 읽어봤어? 무슨 책? 마가복음. 한 줄기 빛을 던져주었던 책. 소책자로 가장 최초로 쓰여진 책인데, 정확히 AD 65-70 사이에 기록됩니다. 죽어가던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일한 길을 제시했던 그들이 붙잡고 일어날 수 있었던 소망. (!) 입에서 입으로. 그 고난 속에 성도들에게 복음의 소식이 되어집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복음의 시작이라.

21
Q

Mark 1:5–7 (KRV)

A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6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두가지 성경의 극찬. 여인이 낳은 자중 최고. 육개월 전에 나와서 예수님을 예비한 인물이에요. 세례요한은 자기 소명이 무엇인지 알고 산 행복자에요. 소명을 모르고는 하루하루 연명하는 것 밖에 없어요. 소명에 붙들린 사람. 하나님의 부르심에 붙들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나도 알고 싶다) 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소명을 맡은 자인가? 그리스도인 전부는 소명자여야 맞습니다. 전도서에는 청년이라고 합니다. 생물학적 나이 기준이 아니라, 청년이라는 히브리어의 배경은, 전쟁이 일어날 때, 젊은이들을 징병하죠. 이 개념에서 청년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집니다. 국가의 목적을 따라 부름을 받은 존재. 청년입니다. 그렇다면, 나이가 젊어도, 그부분이 선명하지 않다면 청년이 아니죠. 나이가 들어도 그것이 분명하다면 평생 청년으로 사는 거에요. 단한번도 생물학적 기준으로 청년 늙은이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 부르심, 소명이 확실한가. (!)

세례 요한은 소명이 분명했어요. 땅끝까지 부르시는 선교적 소명 앞에 방관자가 되지 마십시요. 청년으로 매일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응답하라 1994.

22
Q

Mark 1:5 (KRV)
Luke 3:1–2 (KRV)
세례 요한의 전파 (마 3:1–12; 막 1:1–8; 요 1:19–28)

A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예수님이 돌아다니시다가 여기 교회 씨관에 깃발을 꼽고 교회를 시작하셨어요. 어디가실래요? 그분에게 가죠. 왜 그분을 소개하는 데로 가요. 세례요한이 그런 상황에 있어요. 지금 뜨는 입장이에요, 추앙받아요. 코리덴붐 여사. 이차 세계대전 가장 고통 겪었던 여자. 전쟁이 끝나고 독실한 크리스챤으로 간증을 통해 불신자들을 돌아오게 합니다. 눈물과 회개의 역사. 흐뭇하게 바라보던 한 목사님이, 좀 웃으세요. 환호가 즐겁지 않으세요? 딱 한마디. 나귀가 주인 흉내내면 안되죠. (!)

마지막으로, 왜 세례요한을 쓰셨을까?

3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이게 뭘까요. 왜 요한을 설명하는데 가이사가, 분봉왕이 등장해요. 거기에 소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도식화된 종교의 한복판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지 않았다. 약대 털옷 입고 최소한의 검소한 생활을 하는 세례 요한에게 하나님의 메세지가 임합니다. 궁궐에 임하지 않았어요. 도성에, 지도자들에 말씀이 임하지 않았어요. 빈들에 서있던 요한에게 임해요. 매일 매일 빈들이 되어가야 해요. 세상은 간곳없고 주와 나만 보이는 빈들의 영성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다음 시간부터 본격적으로 진입할 것입니다.

23
Q

Mark 2:3–5 (KRV)

A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쌔
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중풍 병자, 그리고 네 친구에 초점이 있습니다. 순망치안.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진나라와 한나라를 건너 뛰어 괭 나라라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우 나라가 있었습니다. 우나라를 지나가야 괭 나라를 칠 수 있습니다. 몇 날 몇일까지 괭나라를 정벌하러 떠날 텐데 이웃이니 길좀 비켜주라. 올 때에 전리품 줄게. 진나라도 이웃이지만 괭 나라도 이웃인데. 어전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노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신하 하나가 왕에게 직언 합니다. 그건 안됩니다. 길을 열어주면, 분명 진의 세력으로 보아 통과하다가 괭나라만 무너지는 게 아니라 그 다음은 우리입니다. 순망 치안. 입술이 하찮은 것 같고 별볼일 없어도 막상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입니다. 라는 고사성어.

우리가 이 자리까지 오기에 스스로 잘나서 되었을까. 슈바이처 박사의 신앙은 모르지만 삶은 정말 존경하죠. 뒤늦게야 빚진 인생이었구나 크게 깨달았습니다. 내가 잘나서 잘먹고 잘살게 된 게 아니라 이웃 사람의 도움이 쌓여져서 이렇게 되었구나. 모든 것 내려놓고 아프리카에 들어가서 성자의 삶을 살아내죠.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 사역의 중심주제—나는 빚진 자라. (!부모님, 전도자, 가르친 자…) 이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거에요. 잘난 자리에 있으면 홀로 똑똑해서 가 있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공격을 했더라도 가슴 앓이가 있었더라도 내가 반듯하게 스스로를 살필 수 있었고 모든 것을 겸손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는 사실.

24
Q

Mark 2:10 (KRV)

Daniel 7:13–14 (KRV)

A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인자같은 이. 왜 그랬을까요? 이 말에서 모양은 사람의 모양인데 신의 아들이더라. 성경에서 인자의 표현은 반드시 두 가지 개념이 붙을 때 씁니다. 첫째,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죄사함이 던져질 때 그리고 우리 구속이 설명될 때 하나님 나라가 설명 될 때. 이 말에는 양성적 제 이격을 말해요. 온전한 인간으로 그리고 온전한 하나님. 여기에서 우리는 뭘 고백하냐면 왜 이 마당에 예수님이 드디어 자기 실체를 인자라는 표현을 드러내셨을까. 예수님이 자연 질서속에 들어오셨다는 거에요. 우리의 연약함, 죄성, 슬픔, 분노를 다 그분이 가지고 계셨어요. 그런데 죄 짓지 않으셨어요. 그게 놀라운 거에요. 하나님의 온전하신 아드님으로서의 신이시지만 온전한 인간으로 자연 질서 안에 육신의 몸으로 들어오셨다구요. 우리의 욕망, 죄를, 그것이 무엇인가를 아셨어요. 잠잘 때 되시면 졸음이 오셨고 견뎌야 하면 견디는 과정을 겪는, 우리의 절망을 한심함을 정확히 아시는 분. 거기에 감격이 있다구요. 인생의 죄를 다 지시고 죽으신 인자에요. (!)

오늘도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요 메시야지만 이 땅의 자연 질서속에 들어오셔서, 병듬과 분노와 악함을 다 제거하시고 영단번으로 제사드려졌습니다. 우리의 죄를 사해졌습니다. 인간이 참된 인간노릇한다… 신앙적으로 열정있는 사람이 빠질 수 있는 게, 헌신이 뛰어나고 열정이 있어요. 그 헌신과 열정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사랑하는 쪽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만 가치를 가지면 무서운 종교인이 된다는 거에요. 어렵도다. 다시 한 번. 중요한 얘기입니다. 예수님도 헌신하라 열정가지라 그랬어요, 그런데 그것이, 어느 방향성을 틀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인간을 따뜻하게 만들고, 온전하게 만들고, 회복시키고, 인간성을 치료하는데 쓰여지는 열정과 사랑이면 맞아요. 그러나 때로는 교회 안에서 열정과 사랑이 그 자체로만 헌신 이 헌신짝 되어서 사람들 두드려 패고 너 왜 헌신 안해, 비수가 되고 찌르고 아픔을 주는 것, 그것 사랑 아니에요, 헌신 아니에요, 열정도 아니에요. 이 환자 고쳐냅니다.

25
Q

Mark 3:13 (KRV)

열 두 제자를 세우시다 (마 10:1–4; 눅 6:12–16)

A

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는 게 하나님 일 아닙니다. (!) 하나님이 원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사람을 통해서 일꾼으로 불림 받고 쓰임 받은 것은 복중의 복이요, 영광중 영광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불렀어요? 자기의 원하는 사람들을 불렀어요. 여러분 각자가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이 되기 원합니다. 내가 살고 싶은대로, 내가 선택해서, 내가 걷는 것 같지만 한 걸음 걸음 마다 하나님의 등떠밈과 동행이 있었다는 것 부인 할 수 없어요. 열 두 명을 하나씩 부르십니다.

26
Q

Mark 3:14 (KRV)

A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함께 있게 했다. 예수님 임재를 얘기하는데, 지금까지 지배했던 유대 교에요. 이면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았다. 를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우리를 어디다 부려먹고 써먹으려고 부르시지 않아요. 물론 일도 사역도 맡기십니다. 문제는 그게 1차목적이 아니라는 거에요. 가장 원하시는 것은, 너 나랑 교제하자. 먼저는 함께 있게 하시고. (!) 주님이 주인되는 공동체. 새로 태어날 신약의 교회를 말하죠. 제자를 부르시고 우리를 부르시는데에는,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와 먼저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교역자들에게 누누히 다시 강조하는 것은, 개인의 경건의 시간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요. (!) 양떼위해서 일한다고 돌아다니는데, 중직자, 간사 다 마찬가지에요. 나의 경건의 시간 잃고 나서는 다 소용없는 거에요. 내가 은혜 받은 게 없는, 경험한 게 없는데 뭘 하고 뭘 얘기하겠어요. 리더들은 줄 떡 그리고 먹을 떡이 둘 다 있어야 해요. 책임이에요. (!) 황량한 벌판에 구름 떼처럼 사람들은 앉았는데 줄 게 없어요. 예수님이, 일침을 가했던 이야기,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에게 한 이야기. 교회에게 하는 이야기에요. 교회의 책임은 먹을 것, 말씀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 속에, 말씀의 기갈이 임할 때, 모든 사역에 갑작스레 피로의 증상이 생깁니다. 정말 일이 됩니다. 제일 무서운 게 일로 하는 게 제일 무서워요. (!)

제가 언젠가, 장례. 20대 중반의 청년이 암으로 죽었어요. 어머니는 전도사. 얼마나 기가 막혀요. 꽃같은 아들. 오래동안 아팠어요. 기가막힌다. 동대문 이대 병원 병문안 가서 예배드리고 너무 비통해하죠. 아주 아이가 잘생겼어요. 근데 오다가 그런 장례를 집례하러 오는데, 차 안에서 여 전도사님들 몇분이 깔깔 거리고 웃고 장난 쳐요. 앞에 앉아서 조용히 교역자실로 불렀어요. 예배가 마치고 나서는 모르겠다 또 다음 사역이 있으니까 기분도 전환 해야겠고. 그 가족은 성도의 가족이요, 그 청년의 슬픈 죽음을 집례 하러 가는데 말도 안되는 우스개소리와 장난으로 장례를 치르러 가야겠느냐. 이미 이 애경사에 관한 일들이 당신들에게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 형제의 가족의 아픔으로 들어오지 않고 일이에요. 그게 제일 비참한 거에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우선치 않으면. 사역을 한다고 하면서 다 그런식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중요했던 것이 함께 있게 하시고.

27
Q

Mark 6:53–54 (KRV)

게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시다 (마 14:34–36)

A

53 ○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54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청중의 반응은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해 줍니다. 호의했습니까? 예수신 줄을 알고. 유대땅은 못알아봤어요. 빛이 주인이 되어 이땅에 오셨으나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했다. 요한복음 1장의 증언. 성경에서 어둠은 말씀이 기갈일 때, 아모스 선지자는 어둠이라고 합니다. 이 어둠의 세상에 하나님이 아버지를 빛으로 이 세상에 보내세요. 그러나 그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해요. 유대의 전형적인 반응. 저주의 경멸의 대상이요, 죄악으로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게네사렛 마을에 사람들은 한눈에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어요. 풍랑을 거쳐 바다 하나 건넌 이 곳은 극과 극 대조입니다.

우리도 선교 나가다보면, 그런 반응을 놀랍게 발견해요. 뺀질거리는 서울 거리 전도지 받지도 않고 버리죠. 캄보디아, 미얀마나 오지 선교 나가 보면, 마치 갈라진 논바닥에 물을 붓는 것 처럼 확확 흡수하고 잘 반응하는지 몰라요.

배 침몰의 위기 때. 그 때 물 거리 위를 걸어오셨어요. 제자들이, 예수님보고 귀신이다. 바닷속에서 튀어나온 준동하는 세력의 현장으로 유대인들은 간주해서 예수님을 귀신으로 보았어요. 보았는데 제대로 못봤어요. 굉장히 중요한 초점이었습니다. 사람이, 진짜 유식하게 된다는 것은, 내가 얼마나 무식한지 알아가게 되는 게 유식한 거에요. 공부할 수록 자기 한계가 더 많이 보여요. 그런 것 발견하다보면 고개 들 수 없죠. 끔찍하죠. 과연 이 지식의 끝은 어디일까. 20-30년 신앙생활 안다고 하는데,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 헤아려 들어가보면 점점 미궁으로 빠지는 느낌이요. (!) 이 부분에 걸려 넘어져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일 여지 많은 사람들이 목회자요. 매번 혼자 잘난 체 하고 가르치기만 하니까. 설교중 질문 안하니까.

정작 예수님을 제대로 못보는 제자. 영적으로 무지한 죄많은 인생들인 이 게네사렛의 사람들, 저 분이면 나를 구원해주실 것이다. 예수인 줄을 알고. 캠퍼스던 거리이던 전도 나갈 때 겁먹지 마세요. (!) 여러분 설득력 아니에요. (!) 하나님이 하세요. 우리는 순종만 하고 얘기하면 되요. 새가족 이야기 들어보면 어쩌다 이러다 회개하나 정말 희한해요.

28
Q

Mark 6:55–56 (KRV)

A

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채로 메고 나아오니
56 아무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예수님 행동에 패턴이 있어요. 무슨 말씀을 하셨다. 손을 대셨다. 가르치셨다. 귀신에게 물러가라 하셨다. 예수님 행동에 대한 기록이 있어요. 마가기자는, 일절 그런 표현이 없고 사람들만 바빠요. 눕혀놓고 사람들만 굉장히 바빠요. 예수님이 했다 이런 거 일체 기록이 없어요. 사람들의 분주한 행동과 묘사들, 과연 수준있는 묘사일까. 전혀 그렇지 않아요. 강아지 뭐 마려운 것 처럼, 백성들만 바빴다. 시장에서 이집 갔다 저집 갔다 잡으러 갔다 이런 풍경 같아 보입니다. 예수에 대한 깊은 지식들도 없는 사람들이요.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었다. 곧, 구원을 받고 그 구원이 유지 보존되었다. 다 고침 받고 구원이 보존되고 유지 되었어요.

제가 아는 선배님 한 분. 어느 교회에 친구가 다니는데, 어느날 교회에서 이런 눈깔 사탕을 준다는 유혹을 해요. 오는 새신자에게 눈깔 사탕을 준데. 그 유혹에 넘어가서 교회를 따라갔어요. 실지로. 눈깔 사탕, 진짜 눈깔만한 사탕이 있었어요. 아이들 입장에는 그것 하나 물려놓으면 하루 종일 행복해요. 이걸 우물우물 빨아가면서 그거 하나 얻어먹으러 교회에 가요. 갔다가 은혜를 야무지게 받고 훌륭한 목사님이 되었어요. 안산 동산 교회 김인중 목사님. 김목사님 전도했던 친구 누나가 저와 함께 여 전도사님으로 사역했던 분. 그 유치 찬란한 스토리를 알게 되었어요. 하나님은 유치하냐 고상하냐 우선으로 보지 않습니다. 따뜻하고 기쁘신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 그저 잘난 모습으로 못난 모습으로 오든 딱 하나만 보세요.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만 기뻐하세요. 흰옷이냐, 관쓰고 나왔냐, 아무 관심 없어요. 어떤 형편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목말라하는 영혼을 보세요. (!)

믿지 않는 남편 둔 아내들. 교회 문턱 밟는 데 힘든 게 술끊고 담배 끊고 뭐 좀 정리하고. 시간이 누가 기다려 주나요. 안기다려줘요. 요즘 같은 세상에 숨쉬는 것만이라도 기적이에요. 사고 공화국인데. 하나님꼐서 기회 주실 때. 남자들은 대게, 맞어, 당신 그 꼬라지로 교회 나가봐야 아무 소용없어 하지 마시고 무조건 나오세요 하세요. 캠퍼스에서, 술 먹는데 교회도 안나가면 나중에 어떻게 하려고 하냐. 나머지는 주님이 책임 지세요. (!)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피차 은혜 속에서 주님으로 시선이 모아져 가는 거죠. 게네사렛. 오늘도 그 땅은 우리 주변에 있어요. 절대 택한 백성을 간과하시지 않습니다. 전할 자 전하시고 그 후에 뱃새다로 가십니다. 오늘도 이 복음이 순례길 걸어가는 여러분들에게 빗겨가는 걸음이 안되기를. 일터가 캠퍼스가 가정이 게네사렛이 되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문자 하나 기다리고 있고, 따스한 손길하나 기다리고, 따스한 품, 포기하려고 했던 인생의 끈을 다시 붙잡게 됩니다. 우리 인생의 게네사렛을 목격할 수 있는. 인생의 과제를 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29
Q

Mark 3:13 (KRV)

열 두 제자를 세우시다 (마 10:1–4; 눅 6:12–16)

A

13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는 게 하나님 일 아닙니다. (!) 하나님이 원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사람을 통해서 일꾼으로 불림 받고 쓰임 받은 것은 복중의 복이요, 영광중 영광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불렀어요? 자기의 원하는 사람들을 불렀어요. 여러분 각자가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이 되기 원합니다. 내가 살고 싶은대로, 내가 선택해서, 내가 걷는 것 같지만 한 걸음 걸음 마다 하나님의 등떠밈과 동행이 있었다는 것 부인 할 수 없어요. 열 두 명을 하나씩 부르십니다.

30
Q

Mark 3:14 (KRV)

A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함께 있게 했다. 예수님 임재를 얘기하는데, 지금까지 지배했던 유대 교에요. 이면에는 주님이 계시지 않았다. 를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우리를 어디다 부려먹고 써먹으려고 부르시지 않아요. 물론 일도 사역도 맡기십니다. 문제는 그게 1차목적이 아니라는 거에요. 가장 원하시는 것은, 너 나랑 교제하자. 먼저는 함께 있게 하시고. (!) 주님이 주인되는 공동체. 새로 태어날 신약의 교회를 말하죠. 제자를 부르시고 우리를 부르시는데에는,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우리와 먼저 교제하기 원하십니다. 교역자들에게 누누히 다시 강조하는 것은, 개인의 경건의 시간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요. (!) 양떼위해서 일한다고 돌아다니는데, 중직자, 간사 다 마찬가지에요. 나의 경건의 시간 잃고 나서는 다 소용없는 거에요. 내가 은혜 받은 게 없는, 경험한 게 없는데 뭘 하고 뭘 얘기하겠어요. 리더들은 줄 떡 그리고 먹을 떡이 둘 다 있어야 해요. 책임이에요. (!) 황량한 벌판에 구름 떼처럼 사람들은 앉았는데 줄 게 없어요. 예수님이, 일침을 가했던 이야기,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에게 한 이야기. 교회에게 하는 이야기에요. 교회의 책임은 먹을 것, 말씀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 속에, 말씀의 기갈이 임할 때, 모든 사역에 갑작스레 피로의 증상이 생깁니다. 정말 일이 됩니다. 제일 무서운 게 일로 하는 게 제일 무서워요. (!)

제가 언젠가, 장례. 20대 중반의 청년이 암으로 죽었어요. 어머니는 전도사. 얼마나 기가 막혀요. 꽃같은 아들. 오래동안 아팠어요. 기가막힌다. 동대문 이대 병원 병문안 가서 예배드리고 너무 비통해하죠. 아주 아이가 잘생겼어요. 근데 오다가 그런 장례를 집례하러 오는데, 차 안에서 여 전도사님들 몇분이 깔깔 거리고 웃고 장난 쳐요. 앞에 앉아서 조용히 교역자실로 불렀어요. 예배가 마치고 나서는 모르겠다 또 다음 사역이 있으니까 기분도 전환 해야겠고. 그 가족은 성도의 가족이요, 그 청년의 슬픈 죽음을 집례 하러 가는데 말도 안되는 우스개소리와 장난으로 장례를 치르러 가야겠느냐. 이미 이 애경사에 관한 일들이 당신들에게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 형제의 가족의 아픔으로 들어오지 않고 일이에요. 그게 제일 비참한 거에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우선치 않으면. 사역을 한다고 하면서 다 그런식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중요했던 것이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요즘 우리가 말하는 전도가 아니에요. 거봐 하나님이 써먹으려고 부른거지. 전도도 하며. 케루소라고 되어있는데 선포에요. 온 인격과 삶을 묶어서 일상에서 드러내는 선교적 제자의 삶을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예배 마치고 문 나서고 출발할 것입니다. 종이 비행기를 다 들고 가십시요. 작은 실천 하나서부터. 제자로서의 삶을 출발하여, 함께 하나님과 머무는 교제의 풍성함이 있어지는 여러분 되기 원합니다.

31
Q

Mark 14:3 (KRV)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 (마 26:6–13; 요 12:1–8)

A

3 ○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나환자 집단촌.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환자. 그 집에 식사 초대가 되어있어요. 예수께서 식사하셨대요. 식사. 하나의 우리에게 임한 구원의 그림을 스케치 형식으로 한 컷의 그림으로 전면에 드러내고 있는거죠. 시편 23편이 유명한데, 무엇때문에 유명해요?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부으신다. 상을 베푸시는 것은 식사상을 의미합니다. 손님을 초대해 식상을 함께 한다는 것은, 가족의 친밀감을 강조하는 하나의 예식입니다. 식사가 단순히 밥먹는 작업이 아니라 굉장히 깁니다. 가족을 또다른 말로 식구. 식자가 음식할 때 식, 구는 입구. 밥을 같이 먹는 관계이다.

우리 할 때마다 완전히 혼돈에 빠지는 사람. 식탁은 그만큼 우리가 강조되면서 한 가족으로 초대되었다는 뜻. 그런데 이 식사자리가 죄인을 상징하는 과거 문둥병 환자였던 시몬의 집에서 베풀어집니다. 그 과거의 죄인되었던,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나환자 시몬과 한 식탁에 앉아있어요. 마치 23 시편, 원수의 목전에 왕의 잔치에 초대되어진 것 처럼. 에베소서 5:2-8 에 보면, 원수가운데 죽었던 우리들을 하늘에 올리사 하나님 앞에 앉힌다. 그 분 앞에 있다 라는 말은, 동작이나 상태가 아니라 우리 신분이 달라져있는 구원에 관한 강렬한 메세지이죠. 지금 은총의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

다른 성경에는 마리아라는 이름이 밝혀져 있어요. 그러나 여기에는 안밝힙니다. 이유가 있어요. 그냥 한 여인이라는 무명이라고 처리한 이유. 나도 이 여인처럼 뭔가 주님께 드리고 헌신해야 할 텐데. 천편일률적으로 끝이 나는 게, 마리아와 같이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깨뜨려 드리자. 이렇게 끝이 납니다. 헌신한 한 여인의 헌신에 초점이 끌려가는 해석적 실수를 범합니다. (?!) 왜 마가가 무명으로 처리했을까요. 그것은, 한 여인의 헌신과 그 헌신의 열정에 일절 메세지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32
Q

Mark 14:6–9 (KRV)

A

6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칼론 에르곤. 여호와킴 예레미스 책에 언어학자의 대가인데, 제가 자주 찾아보는데, 어떻게 해석해놓았냐면, 적절한 아름다움. 이거야 말로 하나님이 무너진 세상, 폐허된 인간의 세상 에 최고의 목적지입니다. 적절함이 얼마나 놀라운 가치인지. 어떤 사람 보면 텔레비젼에, 눈 코 입 각각 보면 다 잘 생겼는데 멀리서 보면 조화가 안되어있어. 그런 얼굴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그렇게 각각이 썩 잘 생긴 게 아닌데 조화로워요 모아놓아보면. 원래 제자리에 있는. 창조할 때 본래의 모습. 적절한 아름다움.

예수님이 여인을 칭찬한 것은 보통 칭찬한 게 아니라 적절하게 아름답다. 적절하게 아름답다. 최고입니다. 옳은 개념보다 훨씬 높은, 비교급으로도 무색할 정도로 높은 가치입니다. 이 여인에게,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했다. 칼론 에르곤. 적절한 아름다운 행동을 했다. 다른 복음서에는 이 여인이 머리를 풀어 발을 닦습니다. 머리에 부은 기름이 내려오겠죠. 유대의 여자가 머리를 푼다는 것은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민수기에 보면 여인이 머리를 풀 때는 자기가 철저히 죄인을 고백할 때 머리를 풉니다. 매우 깊은 헌신이 아니라, 더 깊은 신앙 고백이 있는 것입니다. (!)

네 경우와 다섯 경우에 따라 기름을 붓도록 되어있습니다. 첫째, 선지자에게. 둘째, 왕에게. 셋째, 제사장에게. 넷째, 손님 올 때에도, 존중한다는 의미로, 환영한다는 의미로, 맞아들입니다. 다섯째, 중요한 예식 때. 기름을 붓습니다. 이게 다 드러나요. 마가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다른 복음서에 머리로 발을 닦습니다. 철저히 부정된 상태에서.

7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8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자기 신앙 고백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 여인이 의미한다고 정확히 말합니다. 나같은 죄인이 구속함을 입습니다 라는 옳은 가치보다 더 높은 적절한 아름다움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거에요. (!)

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복음 전파되는 곳마다 솔직히 마리아 얘기 같이 해요? 안그러던데요? 저도 그렇게 안하는데요? 예수님이 오늘, 복음이 어디서든지 전파될 때 이 여자 행한 일도 말하라. 헬라어 문장을 보면, 이 행위 속에 뭐가 다 포함되어있습니까? 복음. 그분의 죽으심. 그분의 고난. 그분의 부활. 자기 부정을 통한 죄인의 고백. 이 여인의 행위 속에 다 녹아져 있는 거에요. 복음이 전파된다. 주님께 쏟아놓은 고백이 전파된다. 다른 복음서에는, 온 집에 향유냄새가 가득하더라.

33
Q

Mark 15:34 (KRV)
Leviticus 16:23–28 (KRV)
Hebrews 13:8–11 (KRV)
Hebrews 13:12–13 (KRV)

A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하나님이 아들을 버리시는 시간.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면서 가장 완전한 사랑을 드러내시는데, 용서는 반드시 죄값을 치룬 것을 전제합니다. 없던 걸로 해줄게. 하나님 공식에 이런 것 없어요. 반드시 죄값을 묻는데 아들에게 지웁니다. 마가는 구약에도 능통한 학자적 자질을 가지고 있었어요.

23 ○아론은 회막에 들어가서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입었던 세마포 옷을 벗어 거기 두고
24 거룩한 곳에서 물로 몸을 씻고 자기 옷을 입고 나와서 자기의 번제와 백성의 번제를 드려 자기와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고
25 속죄제 희생의 기름을 단에 불사를 것이요
26 염소를 아사셀에게 보낸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진에 들어올 것이며
27 속죄제 수송아지와 속죄제 염소의 피를 성소로 들여다가 속죄하였은즉 그 가죽과 고기와 똥을 밖으로 내어다가 불사를 것이요
28 불사른 자는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진에 들어올지니라

예수님은 마치 영문밖으로 쫓겨난 염소처럼 모든 더러운 것을 다 뒤집어쓰고, 우리가 성경대로 싸 저지른, 이 모든 죄악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간 거에요.

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10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인간이 토해낸 죄, 오물을 뒤집어쓰고 죽으시는 장면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설명합니다. 기독교는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뒤집어 쓰고 오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에 나아가서 자기 몸을 불태워 제단에 바쳐진 것 처럼, 우리도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입에서 억울하다는 소리 안해야 해요. (!) 억울한 거, 없다. 진심입니까? 우리는 억울한 거 없어요. 뭐 때문에요. 근거가 있어야죠. 예수님이 짊어졌던 치욕을 같이 짊어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34
Q

Hebrews 13:14 (KRV)

A

14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이것이 종말론적 삶의 스케치입니다. 살면 살수록 세상이 좋아져요 더 절망이라 생각해요. 유토피아가 살수록 보여요? 살수록 죄악이 끔찍해져요. 무식해져서 죄짓지 않고 가르쳐 놓으니 더 교묘하게 죄를 지어요. 어느 어린이집 교사의 어린아이를 때리는 장면을 다 보셨을거에요. 마치 내가 한 방 맞은 것 처럼 치를 떨죠. 우리 안에 그게 똑같이 있어요. 교회 안에서도 그런 청년을 하나 봤어요. 그 장면을 마침 직접 보았어요. 교육관에서 방석이 쌓여있어요. 애들이 얼마나 놀기가좋아. 푹신한데. 들어가서 방석 뿌리고 원없이 즐겁게 놀고 있는데 청년이 가지런히 쌓아 올린 방석을 허물었다 이거에요. 이단 옆차기로 하는데 공중에 뜬 장면을 봤어요. 주일 학교 교사에요. 당장 그만두게 했어요. 폭력을 어떻게 쓰냐. 폭력 쓰는 건요, 정신적인 문제에요. 병이에요 병. 그래서, 종종 가끔 자주 얘기하지만 폭력은 한 번도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여성들은 배우자나 이성친구의 폭력을 단 한 번도 용납해서는 안되요.

세상은 살수록 유토피아가 아니에요. 살수록 세상은 소망이 없다. 이것이 느껴지는 게 정상입니다. 이 땅에 소망 없는 것 계속 차곡차곡 확인해야해요. 히브리기자가, 영구한 도성이 이 땅에 없다. 누구를 소망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영원한 나라를 소망합니다.

35
Q

Mark 15:38–39 (KRV)

A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백부장. 최초의 인물입니다. 전쟁의 영웅. 로마의 백부장 정도면 전쟁터에서 닳고 닳은 사람이에요. 직접 죽였을 수도 있었던사람. 수많은 적을 앞에 두고. 군인 중 베테랑입니다. 진실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로마 가이사의 관리입니다. 황제의 법정이 위임을 받아서 사형을 언도한 인물이 십자가 위에서 죽습니다. 이 발언은, 정황상 매우 위험한 발언이에요. 서슴없이 이 발언을 하는데 뜻하는 바가 뭐냐면, 중요한 결론입니다. 진실로 하나님 아들입니다. 이 고백은 로마의 모든 백성과 관리들이 가이사에게만 할 수 있는 이야기에요. 근데 이 로마군대의 꽃중의 꽃인 가이사에게만 하는 충절한 고백을 로마 법정 판결에 의해 죽어가는 한 유대 청년에게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라고 자기 운명을 겁니다.

이런 인생의 전환점이 우리에게 문득 문득, 생사를 앞에 우고 들이밀 때가 있어요. 고백 하나가 어마어마한 이익을 줄 때가 있고 죽음을 각오해야할 때가 있어요. 집행관으로서가 아니라 로마 당국에는 테러 분자인 예수에게 하나님 아들이었습니다. 가이사에서 주인을 바꿉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고백은 우리 치열한 인생의 현장에서 매번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내 모든 삶의 기로와 선택 앞에 매일 매일 내 입술을 통해서 마치 그 안의 것이 견딜 수 없어 터져나오듯 터져나오는 고백이어야 해요. 이익 앞에서, 일터 앞에서, 생의 결단 앞에서 그는 진정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나를 존귀히 여기는 자는 나도 존귀하게 여길 것이요. 한 번도 실망시킨 적 없어요.

36
Q

Mark 3:31–35 (KRV)

A

그러나 정말 그렇게 부모도 애비도 모르는 싸가지 종교일까요? 십계명 중 오계명, 부모를 공경하라. 1-4 는 대신 관계. 5-10 까지는 대인 관계요. 대인 관계의 첫번째가 부모를 공경하라. 공경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바드. 가장 중요하게 여겨라. 가장 비중있게 여겨라. 이것이 옳으니라. 옳으니라는 이것이 인간이 본성이라는 얘기에요. 하나님이 인간 안예 설계하신 이 본성, 마땅하다, 본성이다, 옳다. (!하나님이 옳다, 복음이 옳다)

디모데 전서에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

오늘 본문에 할 말을 잃는 모양새를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맥락을 잘 봐야 해요. 안그러면 싸가지 없는 종교로 비추어지기 그림이 딱 좋게 되어있습니다.

31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가족공동체를 설명하고 싶으신 것이요. 33절에, 대답하시되. 원문에는, 카이. 카이라는 말이 대문자요. 문장이 바뀌고 대문자로 시작될 때는, 중요한 강조법이다. 중요한 강조점을 말할 때. 게다가 티스, 누가 라는 말인데, 이 말도 대문자에요. 이 말속에는 매우 중요한 예수님의 암시를 담아냅니다. 누가 이것을 내가 새롭게 정의해 주겠다.

34둘러 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시선을 돌려보시며, 성경공부하고 있는 이 성도들을 향해서.

35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밖에 있는 모친과 동생들이 나랑 상관없다는 게 아니고, 그들이 내 모친이고 형제지만, 예수 안에서 더 큰 가족이 새롭게 탄생할 것이다. 새로운 교회의 탄생을 암시하고 있어요.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제일 열심히 강조하고 배워야 할 것.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는, 무슨 사업 하는 곳 아니에요. 교회의 여러 역할과 기능이 있죠. 다 잘라내고 한 가지 개념만 뽑으라면 가족이요. 옆에 앉은 분, 가족이에요. 교회 수가 점점 늘어나다 보니까 이게 흐려져요. 대형화되면서 이것은 많은 역기능이 발견됩니다. 작은 셀로 자꾸 묶어져야 합니다. 안그러면 몇십년 참여해도 청중 외에는 아무것도 안되요. 팀을, 구역을, 목장을, 순장을, 리더로 묶여져야지, 안그러면 어디서 가족의 개념을 배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