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 May 2019 Flashcards
Hebrews
Hebrews 1:1 (KRV)
Hebrews 1:2 (KRV)
Genesis 18:17 (KRV)
: 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말씀 이라는 수단으로 계시하셨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난 이미 말했다. 의사전달이나 소통이 아니에요. 적어도 하나님이 말씀할 때에는, 그 말씀이 한 사람의 개인의 생애를 통해 진행되고 완성되는 것 까지를 말씀하셨다. 합니다. 능력이 있고 힘이 있기 떄문에, 날선 검과 같기 때문에, 내 인생을 관통하시고 하나님의 경영을 이루신다. 이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이야기냐면, 정말 매일 그렇게하나님 말씀을 듣고 있습니까?
: 17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연초에 결심. 삼독은 무리고 일독은 실천하자. 몇날 이미 스킵 하고 뭉게고 갔죠? 그러나 감사하게도 구정이라는 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어요.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정말 위대한 특권입니다. 왜 그걸 놓칩니까? 아무개야, 나는, 이 놀라운 경영을 너와 함께 공유하고 싶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두고 내 하는 일을 어찌 너에게 숨기겠느냐? 이런 특권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늘 하나님 자녀들에게 특권으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매일 서기바랍니다. (!)
: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러다가 예수님 오시기 전에 끝날까. 처음에 탄탄히 해야 나중에 쭉쭉 나갈 수 있어요. 종말을 말합니다. 여러분은 다가오는 종말을 기다리는 자입니까, 아니면 종말 안에 들어와있습니까? 개혁주의의 종말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순간부터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여있다는 거에요. 종말 안에 이미 들어와 있어요. 종말 앞에 놓여진, 다가오는 종말의 때 안에 있는 우리 입니다. 우리가 시공간이라는 인생을 통해 어떻게 채워가야 하는지가 종말의 싸움입니다. 어떤 성도들의 인생이든지, 남은 종말의 때를 살아가면서, 십자가로 채워지지 않으면 그 인생은 무의미합니다. (?!) 아이들을 낳았는데, 정상적이라면, 이런 부모? 첫째는 앵벌이로 어느정도 수입잡고, 둘째는 껌팔이 해서 어느 정도 수입. 정상이라면 그러지 않아요. 건강한 미래로,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램일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에요, 한국 교회 분위기가 항상 헌신 컴플렉스가 있어요. 쓰임받겠다는 거에요. 좋아요. 하나님이 쓰실 거에요.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의 최종목적으로 이해하지 마시라구요. 크던 작던 여러분 존재로 하나님은 즐거우신 분이에요. 그럼 왜 선교를 맡기고 봉사하라고 하죠? 그것을 만지작 거리면서 십자가 앞으로 인생이 다다르기를 원하시는 거에요. 두 가지 깨달아요. 첫째는 나의 절망스러운 모습, 둘째 하나님 은혜밖에 없구나, 이것이 십자가로 채워가는 종말을 사는 진짜 우리의 모습이고 하나님의 관심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그리스도를 얘기하죠. 구약서부터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예고하고 상징적으로 보여주던 그 실체가 한 사람. 아들 그리스도. 이 모든 역사는 그리스도로 채워지고 그리스도에서 끝난다. 기승전 예수, 기승전 십자가 입니다. 역사는 그렇게 마쳐지도록 되어있습니다. 빗겨가는 모든 업적은 의미가 없는 거에요. (!)
Hebrews 1:2 (KRV)
1 Peter 1:4 (KRV)
: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베드로 사도가 이르기를,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법원에서 내 이름으로 법원에서 누런 봉투가 날라들어요. 우리나라 삼대 재벌중의 하나인 사람인데, 내가 법적으로 상속자가 되는 거에요. 모든 재산의 상속자가 법적으로 제가 되어있는 거에요. 리액션을 좀 해보세요. 그럼 시시한 잔돈가지고 싸우겠어요? 안싸워요. 몇만원가지고 시비? 안해요. 물질과 물질의 비유에서도 그럴진대, 그거랑 차원이 다른, 팔구십년 만지다가 가는 거에요. 영원히 가져갈 수 없어요. 장례식에서 수의를 입히며 공통점이 있더라구요. 죽은 자가 있고 가는 옷에는 카드 한 장 들어갈 수 있는 호주머니가 없어요. 오늘 베드로 사도의 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안에 우리를 죽여서 다시 살려놓으신 거에요. (!)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하나, 성부 하나님은 창조하시고 성자 하나님은 구속하시고 성령 하나님은 천성에 이르기까지 안내하시는 역할로 국한된 줄 아는 것.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시고, 그러므로 당연히 오너십 이 있는 거에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천지 주재이신 하나님께 감사할지어다. 그리스도가 창조주라는 말은, 만유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청지기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시각을 열어줍니다. 주인의 그분의 물건을, 시간을, 물질을 맡은 자, 청지기라고 표현합니다. 내 것 없어요. 불의한 청지기가, 빚진 자들에게 빚을 다 탕감해요. 십억진자 팔억으로. 이유는 간단해요, 해고 통고 받고 아 이돈 자기돈 아니구나, 지돈 같으면 그렇게 깎아줘요? 살떨리는데? 내 돈 아니니까 막 깎아줘요. (?!)
Hebrews 1:3 (KRV)
: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최근에 은퇴한 한 목사님, 개척할 때 간증처럼 묶은 책이 있습니다. 선배니까 얼마나 피눈물 나는 고생을 하고 목회했는지 잘 알죠. 집집마다 자동차가 흔하지 않아서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돌아다니면, 그분만 지나가면, 저저저 진짜 목사 지나간다. 그게 광채에요. 뭐가 반영된겁니까? 하나님 영광이 반영된겁니다. 하나님 자녀를 통해서. 이 똑같은 논리로 같은 현실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삶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비지니스 현장 속에서 일터에서 그런 소리 들어봤나요? 저 사람 보면 신이라는 존재가 자세히 모르는데 확실해. 안그러면 저렇게 살 수 없지. 광채의 삶입니다. 쉽지 않죠? (!)
하나님이 우리를 빚고 창조하실 때 우리를 뭘로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럼 우리를 통해 하나님 본체의 그림이 나와야 해요. (!)
Colossians 2:18 (KRV)
Hebrews 1:14 (KRV)
: 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천사 숭배를 바탕으로 금욕과 은사를 강조함으로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렇게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환상입니다. 이 끝에 재밌는 표현이 있어요.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진짜에요 가짜에요, 가짜라는 얘기에요. 보았다고 착각을 하는 거에요. 이것이 골로새 지역을 중심으로 그 당시 로마 소아시아 히브리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의 성경을 잘 못 이해해 벌어진 자가당착이라는 말이죠.
그럼 슬며시 여러분들 가운데 이런 생각들 할 수 있어요. 이해는 하겠는데, 그게 오늘 내 생활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오늘날 기독교 인구가 자꾸 줄어요. 불과 1-20년 사이에 700만, 650만 까지 줄어들었어요. 다 가돌릭으로 1-2백만이 넘어갔다는 거에요. 보기에도 뭔가 있어보여요. 매너있어보이고 사회에도 교양있어 보이고, 짜장면을 먹어도 얼굴에 떡칠해서 먹는데 가돌릭은 입만 딱 닦으면 되도록. 외형적인 나타나는 어떤 것으로 종교가 갖는 본질을 재단해서는 안됩니다. 과학의 표현하자면, 다니는 교회가 맘에 안들면 다른 교회로 옮기지 가돌릭으로 옮기지 마세요. 거의 이단시 합니다. 너무 많은 매개물들을 설치해 놓아서 그 대상이 그 매개물들이 대상이 되어있고 우상이 되어있어요. 성인들을 섬겨야 하고 마리아에게 기도해야 하죠, 천사를 숭배해야 하죠. 왜 이런 현상이 빚어졌나 하면, 그런 천사 숭배가 처음에 아니었어요. 천사의 예배를 흠모하고 참여하려는 잘못된 열망 때문에,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기독교가 의지하면서… 연옥설, 교황무오설, 사도직계승 등등
천사는 어떤 존재인가.
: 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Hebrews 1:6 (KRV)
Hebrews 1:14 (KRV)
: 6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찌어다 말씀하시며
맏아들을 이끈다. 그리스도를 맏아들로 표현했어요. 그런데 언젯적 그리스도에요?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 재림의 때입니다. 어떤 명찰을 가지고 오세요? 다시 오실 때에는 뾰족하게 정확하게 맏아들로 다시 오신대요. 몇 가지 중요한 여러가지 암시중 대표적으로 두 가지 암시가 있어요. 첫째, 누구에게만 상속이 이루어집니까, 맏아들에게만 상속이 있습니다. 두번째, 맏이라는 말은, 근원이요,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당연히 아버지의 경영을 상속받는 것 마땅합니다. 지난시간과 앞서시간을 통해 공부한 바입니다. 놀랍게도. 그런데, 그 상속의 명단과 반열에, 누가 있어요?
: 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우리를 뭐라고 부르죠? 상속자. 후사. 저와 여러분들은 상속자로, 맏아들로 오시는 그리스도 안에 묶여있기 때문에, 법적으로 상속자의 명단에 들어가 있는 거에요. 이 진리를 안다면,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여러분의 입가에는, 영혼이 미소짓게 하는 미소가 있어야 해요. 저기 부처상도 웃고 있는데 우리가 못 웃을 이유가 어디있어요.
금요일 영성집회 한 시간 전에 청년 둘이 새해 되었다고 이쁜 양말 세트와 선물을 가져와서 인사해요. 형제 한 명이 쭈뼛쭈뼛 하면서 드릴 선물이 있다고, 또 무슨 선물이니. 가방에서 꺼내는데 보니까, 빨간 봉토에 뭘 가져왔어요. 나중에 은퇴하시면 노후자금 하세요. 뭐냐, 내일 토요일이죠. 8시에 티비 보시면, 로또 발표를 할 거래요. 나는, 로또를 사본 적도 없지만 이런 선물은 또 처음이네요. 오천원짜리인데, 서로 웃었죠 한참. 그런데, 그 하룻동안이라도 기분이 좋더라구요. 만약 이게 되면 내가 찾으러 가면 얼굴이 팔려있을 꺼고. 은퇴기를 보낼까. 어제 설교준비하느라고 이걸 잊어버렸어요. 여덟시에 발표래요. 열두시가까이 설교준비를 마치고 이게 생각난 거지. 인터넷에 열어봤죠. 세상에, 꽝이에요 꽝. 보너스도 안되었어요. 재밌었어요. 문제는,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상속은, 될지 안될지 모르는 상속이 아니라, 확고한 자기 목숨을 담보하신 상속이에요. (!)
우리가 호도 되고 왜 천사숭배 자기과장에 빠지느냐? 이유는 한가지에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바로 몰라서 그래요. 나에게 그분이 누구신지 정확히 몰라서 그래요. 어떤 사랑을 주셨고, 어떤 약속을 주셨는지 모를 때 이걸까 저걸까 혼돈의 나그네 길이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1부 마치고 한 자매, 말씀 들으면 생각한 한가지, 올해에는 어떤 비젼보다도, 십년 동안 비젼 보여달라고 기도했는데, 무엇보다 그리스도 아는 일에 집중해야겠다는 새로운 비젼을 가졌다.
그겁니다. 그리스도를 잘 모르니까 종교적 열정에 매달리고 누구보다 낫냐 못낫냐, 팍팍해지고 율법적이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흥건히 안다면, 그런 피곤한 경쟁과 싸움에 매몰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구정이지만 밝아온 새 아침에는,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비젼에 눈이 열어지고 (!) 그 하나라도 충분하다는 영혼이 미소짓는 복된 새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Hebrews 2:1 (KRV)
: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비가 와요. 멋지죠. 실록의 계절입니다. 흔히 보는 장면이고 듣는 비소리에요. 삼겹살 굽는 소리에요. 소리는 왜 중요하냐면, 소리는 이미지를 담습니다. 긴박한 위험성 을 알릴 때는, 사이렌 소리를 내요. 소리는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허구에요. 엮어지면 스토리가 됩니다. 그럼 그 스토리는요, 허구에요. 영상 뿐입니까. 사운드 뿐입니까. 우리가 매일 어마어마한 정보량들을 한 번 보세요. 이게 진실인 줄 알고 거품물고 했는데 이거 가짜였대. 그런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너무 빠르게 패턴이 휘몰아가다보니까 우리는 미처 그것을 구분할 마음도 안생겨요. 단말기적이되고 단순해지고, 감흥과 감성에 자기 가치관을 걸어요. 얼마나 위험해요. (!)
이 세상이 만들어내는 허구 세상입니다. 과연 여기에서 흘러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
Hebrews 2:4 (KRV)
: 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하나님이 함꼐 증언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분명하고도 정확 무오한 말씀이라는 것을 삼중으로 증거했어요. 첫째, 그리스도, 둘째, 사도들, 셋째, 하나님이 친히. 믿습니까? 이것이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중요한 내적 증거입니다. 이렇게 성경기자는 떠내려가는 위험에 처해있는 성도들에게 왜 얘기할까요? 결국 그것을 막을 수 있고 붙들 수 있는 방법은 말씀에 삶의 뿌리를 다시 내려야 한다는 거에요.
우리가 정신없이 살아요. 바다에 떠다니는 뿌리없는 부유물 처럼. 마태복음 집짓는 이야기. 똑같이 집을 짓습니다. 어느날 바람이 불고 창수가 일어나자 한 집이 무너져요. 무슨 재료로 무슨 구조로 지었는지 가 중요하지 않고, 기초 문제였어요. 모래 위에다가 기초없이 지었다. 무너지지 않는 집은, 똑같은 날씨에 반석에 지었더라구요. 집짓는 싸움이 아니라 기초 싸움이었어요. 무늬만 종교인이라면, 이 세상이 헤일 처럼 덤벼드는 이 풍파에 견뎌낼 사람이 없어요. 워렌 워습 이라는 분이, 이런 논리. 히브리서, 다섯개의 권면으로 되어있다. 말씀을 떠날 때 심리안에 있는 경로를 말해놓았다.
- 말씀을 놓으면 표류현상이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11일이면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을 방황합니다. 이유는 하나님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았어요. 물리적으로 무엇인가 필요할 때. 절망도 무섭지만, 더 무서운 것은 잘못된 희망이 더 무서워요. 성취가 되어도 재앙입니다. 잘못된 희망은 절망보다 더 무서워요. (!)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방황했어요. 낭비와 탕진이라 말합니다.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을 때 나타난 표류의 현상입니다 (!) 어느 눈 먼자, 바디매오, 혼돈의 아들이라는 뜻이에요, 보지 못하니까 혼돈스럽죠. 표류하는 인생, 주님이 묻습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그 사람의 소원은 그 사람의 정의입니다. 그 사람 이에요.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 때 두가지 행동을 합니다. 겉옷을 벗어요.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랐다 합니다. 제자는, 겉옷을 벗고 삶의 방식, 길에서 주를 따르는 자입니다.
- 그러다가 뭐가 들어오냐면, 말씀에 대해 사탄이 주도적으로 쓰는 방식, 의심을 하게 됩니다.
에덴동산의 실낙원. 하나님 말씀에 의심하게 만들죠. 정말 죽는대? 자꾸 말씀에 엠에스쥐를 쳐서 변질시키고 변경시켜요. 그 의심이 세번째 단계에서는,
- 굳은 살 배기게 만들어요.
자꾸 듣는데, 귀에 귀지가 차고. 안듣게 만들어요. 무디게. 칼끝이 들어와도 못느끼게. 나환자. 썩는데 썩는지 몰라요. 말씀의 칼 끝으로 쑤시는데 뜨끔거리지도 않아요. (!)
- 불순종으로 이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 배교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말씀에 도전합니다. (!)
역사 속 실제 이야기,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 평상시 만나고 싶은 호기심이 있었어요. 별 질문을 다 쏟아냅니다. 진짜 유대인의 왕이냐? 이런 이야기를 남깁니다.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라. 정확하게 자기 정체성을 밝히셨어요. 나는 진리에 대해 아버지 말씀을 증언하러 이 땅에 왔다. 그러자 빌라도가 온 최대 공략수에 해당하는, 그 질문. 진리가 무엇이냐? 이거 물었어요. 그런데 목마르거나 허기진 질문이 아니죠. 진리가 뭐냐? 우리말로 이해를 돕자면, 진리가 밥먹여주냐? 도대체 뭔데 네 목숨을 걸었냐? 죄 없는 줄 알았죠. 그러나 정치적인 시각이 가렸죠. 이보게 청년, 진리가 밥먹여줘? 신앙인으로 살면서, 그런 얘기, 김과장, 진리가 밥먹여줘?
그 소리 당연히 들어야 합니다. 청년, 진리가 밥먹여줘? 그러면 아멘. 밥 먹여줍니다. 선생님, 음식 준비해왔습니다. 예수님이,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 누가 선생님한테 먹을 것 갖다드렸냐? 양식의 정의를 말씀드렸죠. 먹어서 그 사람에게 힘 되는 것이 양식이에요. 먹지 않더라도 힘 된다면 양식이에요. 골프가 그렇다면 골프가 양식이에요. 정확하게. 자기에게 힘 되는 것이 양식이에요. 예수님 양식이 뭐였죠? 희어져 추수할 때가 왔다. 주인을 청하여 일꾼을 불러라. 하나님의 잃어버린 생명들을 돌아오게 하는 복음 전파에요. 진리가 뭐냐? 밥먹여주냐? 4천만이 대답못해도 여러분은 하세요. 진리가 밥먹여줍니다.
또 한주가 문 열고 나가면, 해일처럼 스나미 처럼 허구와 거짓이 우리를 흔듭니다. 이리 가는 게 맞다고. 그럴지라도 견고하게, 여러분은 (!) 흔들리지 말고, 영원한 푯대이신 주를 바라보는, 승리의 떠내려가지 않는 견고한 걸음 걸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Hebrews 2:11 (KRV)
- 왜 천사들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한 존재가 되었는가 (7절)
: 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어떻게 양자가 형제로 불리웁니까. 이것이 가능한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신이신 그리스도가 사람의 옷을 입고 내려오시는 일입니다. 성육신이라고 해요. 기독론 적으로 이 구절이 왜 중요하냐면, 왜 사람의 옷을 입으셔야 하는 변증의 기록입니다. 이 말씀은 외우세요.
구약의 율법에 거룩한 것이 부정한 것에 닿아지면 거룩한 것이 부정해집니까 부정한 것이 거룩해집니까. 이 양자가 맞닿아질 때. 거룩한 것이 부정해 져요. 예외가 있었죠. 신약에 예수님께서 길 가시는데 부정한 여인. 상징적인 혈류병걸린여인이 거룩하신 옷가에 손을 대요. 부정한 것이 거룩한 것에 손대었습니다. 율법의 원리대로 누가 부정해져야해요. 예수님이.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부정해졌어요. 그리고 누가 거룩함을 입습니까. 그 여인이요. (!) 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깨끗하게 질병이 고침 받습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중요한 목적이에요. 자기가, 인류의 부정함을 뒤집어 쓰는 거에요. 성육신한 사건 자체가, 부정함을 입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 그 부정한 여인에, 우리를 대신하는 상징적인 그 여인의 평생의 고통을 뒤집어 쓰고, 예수님의 부정함의 결과로 깨끗함을 입습니다. 이사야서가 노래한 고난의 종의 노래에요. 그가 능욕당함으로 우리가 고침받았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중요한 목적이에요.
: 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말이 되요? 본질적으로 다른데. 실질적으로 틀려요. 예수님이 이 땅에 그렇게 오셔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고 뭘로 부르셨다구요? 형제로 부르시기로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대요. 우리를 끌고 영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우리를 다 하나님아버지의 한 근원에서 난 존재로 난 여김을 해 버리신 거에요. 여김을 받아요. 하나님의 아들로 딸로. 놀라운 일이죠. 어마어마한 일이 내 신분 속에 일어난 거에요. 이땅에 오신 중요한, 하나님보다 잠시동안 못하게 되실 수 밖에 없었던 인카네이션의 중요한 이유다 이거에요. (!)
Hebrews 2:14 (KRV)
- 십자가에 죽은 분이 어떻게 그리스도인가 (9절) 사망의 세력을 잡은 마귀를 멸하심 (현재)
에덴에서 아담이 넘어짐으로 사망이 들어왔어요. 그 권세는 마귀에 있습니다. 이 죽음의 문제를 가지고 매일 겁박합니다. 온 인류는 죽음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벌벌 떨게 되어있어요. 누구도 풀 수 없는 사망의 문제에요. 우리 안에는 함께 죄 지은 영적인 디엔에이가 있어요. 넘어졌어요.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아담의 혈통에서 태어난 어떤 사람도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그 사망을 설명하는 것, 운명적으로 말해주는 것이죠. 기독교가 가장, 위험한 것은, 기독교가 도덕적이 되고 윤리적이 되고 박애주의 되는 것입니다.
더 미션이라는 영화에 가브리엘 선교사가 등장하는데 창을 들고 협박해 들어오는 자 앞에서 오보에 연주를 하죠.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오에스티가 멜라 판타지입니다. 가사가, 인류애. 인간의 선함으로 이루어질 낙원. 박애주의를 얘기합니다. 그 신부의 연주에 등장하는데 끝에 포르투갈과의 싸움 아닙니까. 한 세 번 정도 본 것 같아요. 끝부분에 폴란드 군인들이 교회를 습격 해요. 개정한 성도들과 가브리엘 회개한 신부까지 멘도자. 온몸으로 막죠. 무자비하게 불을 지르고 죽입니다. 기가막힌 대사 하나, “우리는 인간이잖아.” 아니요. 인간의 박애주의로 폼잡을 만큼 선하지도 않아요. 인간의 실체에요. (!) 얼마나 인간이 악합니까. 짐승만도 못한. 짐승들이 화내요. 자기 배부르면 안뺐어요. 사람은 배가 터져나가도 계속 빼앗아요. 모든 인류는 죄의 문제 해결할 사람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절절히 끌어요. 꺼내논 카드가 예수님의 성육신 카드입니다.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아들은 아버지의 계획에 순종한, 이것은 신비에요. (!) 평범함 속에 하나님의 경이가 담겨져 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그런 방법을 택하셨을까요? 그 안에 경이를 담으신 것입니다. 기꺼이 십자가 제단에 자신을 죽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범죄한 자는 죽도록 되어있어요. 성경적 정의, 죄의 정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흐트러진 게 죽음이고, 죽음의 결과는 시체입니다. 민수기 6장에 보면, 나실인, 구별된 자. 시체에 손 못댑니다. 행위나 율법의 문제가 아니라 네가 누구인지 존재를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죄의 값이에요. 더이상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입은 우리는 죽음과는 관계가 없다. 선언하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슬피 통곡하며 장사지내는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담아져있는 관에 율법을 깨며 손을 대시사. 일어나라.
: 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무장해제 시키셨어요. 이것은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에요. 죄에대한 괴로움과 죽을 수 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끓는 사랑이 함께 입맞춤 한 자리가 십자가의 현장이에요. 이 십자가의 사건은, 이천년 전, 갈보리 언덕 못박히고 죽으신 박제된 역사로 남아서는 안되요. 의미를 되살리자는 말도 아니에요. 지금도 십자가 보혈이 우리삶의 현실에 흘러야 합니다. (!) 진짜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마틴 루터가 거대한 교회라는 조직과 맞서 싸웠던 진짜 명분입니다. 제도나, 법 뜯어고치는 게 개혁이 아닙니다.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가 드러나기까지. 오늘도 우리 삶 속에 한국 교회 한복판에 이천년 전 갈보리 언덕의 죽으신 피의 사건이 살아있는 사건으로 매일 우리 일상에 흘러내려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그 구원을 입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사망에서 완전히 옮김받았어요. 그러나 완전해지기까지, 광야에서 새로운 양식이 필요했듯이, 그 보혈의 공로가 나에게는 필요합니다. 이것은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에요. 대제사장 되신 중요한 이유입니다.
Hebrews 2:18 (KRV)
John 17:15 (KRV)
- 그리고 만유는 왜 그리스도에게 복종하지 않는가 (8절)
: 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능히 도우시는 게 시험 없이해주고 환란 없이해주고 이런 의미가 아니에요. 예수님이 명하시기를, 배를 타고 먼저 건너가라. 이 뱃길에 두가지 의미. 가라 명하신 길이고, 배 안에는 사랑하는 제자들이 태워져있어요. 바다로 진입할 즈음에, 새벽이 터오기 전에, 기류가 변화면서 폭풍이 칩니다. 배를 뒤집어 엎을 듯 큰 물결이 일어납니다. 이상하잖아요. 주님이 가라신 길이고 사랑하는 제자들이 탄 배에, 바람이 치고 파도가 쳐요. 성도된 우리의 삶입니다. 그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우는 거에요.
: 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네 절망을 안다, 그러나 내가 그 자리에 함께 있다. 뭘 바라실까요. 예수님과 동행하는 법을 가르치십니다. 광야를 걷는 이스라엘, 매일 맞는 아침, 지글거리는 태양, 이백만 인구가아무것도 없는 벌판을 또 하루 살아내야 합니다. 무슨 생각으로 아침을 맞아요. 오늘도 정말 만나는 내릴까? 그걸 사십년 겪어봐요. 뭘 배워요? 주님 밖에는 답이없구나. 하나님의지하는 것 말고는 광야는 없구나. 혹독하게 훈련시킵니다. 신명기의 결론은 하루도 거름없이 만나를 주시는 하나님. 어디서 그칩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야 매일 내리던 만나는 끝이 납니다. 농경지가 있는 땅. (!?)
십계명
십계명 강의를 했었는데, 안식일에 대한 계명이 몇 계명이죠? 4계명이죠. 혹자는, 그 안식일을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라, 그 안식일이 우리를 지켜준다고까지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이 안식이 무너지면, 5, 6, 7, 8, 9, 10계명까지 다 무너져요. 확대해석입니까? 추론해볼까요? 쉼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탐욕이 중심 가치에 자리잡고 있어요. 그리고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어쩔수 없는 삶의 카테고리에 갇혀 쉬지 못해요. 5계명은, 가장 인류의 중요한 가치인 부모공경을 제대로 못해요. 일을 핑계로 전화 한통 못드리는 세월을 보내고 말죠. (!)
게다가 안식이 없는 것은, 서서히 자신을 죽여가는 일이에요. 살인이에요. (!) 피고용인과 고용주도 계시겠죠. 가장 최소의 인력으로 최대의 일을 내는 게 맞다고 세상은 말합니다. 과연 정답일까요? 정답이 아닙니다. 회사마다 프로젝트를 하죠. 야근까지 포한한 시간을 내포한답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지만, 집을 10시 이전에 퇴근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요. 대통령 후보들도 저녁있는 세상을 만들겠다. 야근에 시달리고. 한잔 해야 하고. 아빠는 하숙생이에요. 배게에 머리 붙이고 돌아가는 나그네입니다. 직장에 있는 분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아요. 오피스 와이프가 생겨요. 불륜적인 용어라기 보다 동료 이성과 같은 잡과 주제를 가지고 식사하고 생활하다 보니, 윤리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7계명 8계명 도둑질 하지 말라, 안식에서 이어지는 필연적 연결고리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주제이죠? 찰리 채플린이 나오는 1930년 미국 산업화, 대량 생산 체제에 들어섭니다. 모던 타임즈. 계속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 한 사람 눈 팔면 다 망해요. 나사 조이는 일 하다가 강박증합니다. 기계같이 계속 같은 일. 해학적으로 만든 아주 좋은 영화입니다. (@)
Genesis 3:19 (KRV)
Genesis 1:28 (KRV)
Genesis 2:15 (KRV)
: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타락 후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막연히 어떤 편견에 나도 모르게 형성되었냐면, 땀은 무조건 타락의 결과이고 죄악의 결과라는 잘못된 공식을 갖기 시작했어요. 정말 이 땀은 타락의 결과일까요? 창세기 1장을 볼까요?
: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명령만 다섯가지에요.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 다 땀 흘리는 거에요. 타락 전이죠. 놀랍게도 (!) 우리가 일해야 하는 과제는, 타락전에도 하나님 계획 속에 담아져 있던 거에요. 노동이 단순히 타락의 결과만이 아니에요.
: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최초의 인류를 만드신 후, 그 모든 지어진 피조물을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한다. 아마르, 샤마르, 일한다는 거에요. 돌본다. 일하는 거에요. 이런 결론이에요. 아, 노동이나 일이나 땀은, 타락전에도 하나님 계획 안에 있었고 타락 후에도 결과로 땀을 요구해요. 양자 사이에 무슨 차이죠? 타락전의 땀흘림은 무엇이고 타락후의 땀은 뭐에요? 타락을 통해 우리가 죄가 들어왔는데 그것은 탐욕의 결과였습니다. 타락 후의 노동은 타락과 착취가 개입된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일은 즐거움으로서의 행복이었어요. (!)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먹고 살아야 하는, 자기 본위의, 자기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 자기 왕국을 지켜야 하는 고통의 산물이 되었습니다. (!) 노동이라는 객관적 사실은 동일하지만 그 성격이 달라진 것입니다.
인간의 일은, 자기 중심으로, 자기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혹독한 수고가 되고, 남의 안식과 남의 행복을 착취하는 개념으로서 뒤엉키기 시작합니다. 일 자체가 수고가 되어버린 거에요. 인류는 사실상 안식을 잃어버렸죠. (!)
Matthew 6:25–26 (KRV)
Matthew 6:31–32 (KRV)
: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늘 하나님이 아니에요. 아버지에요. 천부. 이 단어 놓치지 마세요. 피조물들에게는 창조주이세요. 그런데 우리에게는 창조주가 아니에요. 아버지에요. 이 단어를 반드시 씁니다. (!)
: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 하늘 아버지. 우리에게 아버지에요. 결국, 남은 안식으로 찾아들어가는 방법은, 아버지의 안식으로 들어가는 싸움이에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명분은 아들로 살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들로 못살아요. 여전히 자기 인생, 자기가 통치하고, 쩔쩔매고, 책임지려는 이방인의 삶을 살고 있어요. (!) 이방인의 정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적어도 아버지에요. 아빠 아버지. 제게 참 낯선 단어입니다. 8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거의 기억이 없어요. 부른적은 있겠지만 기억에 없어요. 하늘 아버지. 아빠 아버지. 그 아버지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울 뿐 아니라 필요를 아시고 그 필요를 구하기를 항상 문기대어 찾기 원하세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안식이라면, 가만히 누워서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야 맞을 거에요.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전쟁 시작이에요. 만나가 그치고 농사 지어야 해요. 어떻게 정복되어야 할 땅으로 명명됩니까? 하나님 약속을 믿고 그 믿음을 가지고 밟으면, 순종만하면 주시겠다 하십니다. 안식은 그것을 훈련합니다. 광야를 걷는 동안, 안식 누리는 것은 오직 하나, 하늘 아버지를 아버지로 찾는 일입니다. (!)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안식이 없어요. 자기 인생 자기가 책임지는 거에요. 남은 안식은 뭐에요? 내 삶을 헤집어 보면, 내가 아직 주인 삶은 모든 삶의 영역을 십자가 밑에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거기에서 진짜 안식이 찾아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그 안식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수고롭고 짐진 자들아, 나에게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맡기고 믿음으로 순종하라는 말입니다. 신앙은 안식에게로 찾아들어가는 일, 아버지께로 가는 길입니다. (!) 탕자가 독립하여 찾은 것은 낭비와 핍절이에요. 자기 자본이 거덜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언제 안식을 얻습니까?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때 안식을 얻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 뿐이죠. 진짜 안식은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을 찾아가는 싸움이에요. (!) 예수 안믿는 자가 탕자가 아니라, 여러분들입니다. 품꾼 처럼 일하는 삶이었죠. (!) 아버지와 함께 하는 것의 의미를 배워야 해요. 집안의 탕자, 첫째 아들이죠.
결국 남은 안식으로 초대하는 삶은 하나에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그의 패턴에 순종하는 그 싸움을 다시 싸우라는 것입니다. (!) 현대인들 얼마나 아프게 살아갑니까? 미국, 풍요의 나라라 하는데 잠깐 보면, 자동차, 집, 보험료. 생활의 기본입니다. 이것을 매달 페이해요. 매달 고지서가 날아들어요. 빌을, 한달에서 석달까지 지불하지 못하면 바로 노숙자 됩니다. 간단합니다.
Hebrews 4:14 (KRV)
: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하나님 아들 예수. 신성을 강조해요. 하나님 아들이시기 때문에 승천할 수 있었어요. 아론을 포함한 구약의 모든 대제사장. 승천하신 대 제사장이 있나요? 없어요. 인간만의 영역에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다시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제물로 피흘려 죽으시고 하늘 성소로 들어가 완성하신 거에요. 이러한 신학적인 까탈스러운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이 잡다라는 말은, 행위를 강조하는 표현이 아니고 잡으라는 말은, 그 약속에만 매달려 있으라. 매달리다 라는 말이에요. (!) 신앙은 공덕을 쌓고 지성 쌓는 싸움이 아니라 매달리는 싸움이에요. 뭘 매달리라구요? 믿는 도리. 하나님의 약속이요, 언약, 말씀을 말합니다. 길이 한 번도 밟지 않은 미래의 이야기이지만. 히브리 인들이 안팎으로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로마 제국 아래 위협받고 자칫 떠밀려 가기 쉬운 자리에 있습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지만 약속에만 매달려라. 왜, 우리에게는 큰 대제사장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 우리의 여부에 따라 될 수도 있고 안될 수도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신실하심을 걸고 완성되어진 것 과 같은, 아니 완성되어진 약속이다. 우리는 거기에 매달려 있으면 되요.
Hebrews 4:15 (KRV)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아니 하나님 아들이어서 이긴거 아니유? 아니요, 인간으로서 이기셨어요.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시고 그 제한 된 상태에서 모든 죄를 이기셨기 때문에, 완전하고 온전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전지전능한 입장에서 이기신 게 아니에요. (!) 우리의 약함 가운데 들어오셔서 이기셨기 때문에 온전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동정하실 수 있는 분이에요. (!) 사람의 동정의 한계와 달라요. 동정이래야 기껏 함께 울어줄 수있는 자리까지 가능해요. 한 케이스를 들어봅시다. 나인성 과부의 이야기. 독자에게 과부는, 이 세상 어느 그림보다 쓸쓸한 풍경이에요. 근데 그 독자가 죽습니다. 더 이상 절망의 그림이 있을까요? 아마 그 아들은 아들겸 친구겸 남편같은 존재일 겁니다. 근데 어머니보다 앞서 죽어요. 어떻게 그 상황을 동정합니까? 그 마을 근처 공동묘지에 장례행렬이 마을 밖으로 나옵니다. 그 때 같이 울었다 라고 말해요. 그거밖에 안되요. 함께우는 정도. 과부에게 가장 완전한 위로는 죽은 아들이 살아나는 겁니다. 이 때, 그 외길에서 생명의 행렬인 예수님과 맞닥뜨립니다. 처음 나온 단어가 울지 말라. 관에 손을 대시니. 유대정통 율법에 어긋납니다. 율법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 아들을 죽음에서 일으킵니다. 가슴이 뻥 뚫어진 가슴을 메꾸어진 가슴의 품으로 아들을 되돌려 보내요. 이렇게 동정하십니다. (!) 이 땅에서 모든 시험을 우리와 함께 겪으셨다 합니다.